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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Apr 13. 2023

대망(야마오카 소하치작)


대 망 (야마오카 소하치 작)을 읽고. . .


약 45일간에 걸쳐 일본의 대하 소설 대망 제 1부를 완독했다.

35년전 유학가기 전에 읽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이번에 큰 맘먹고 완독에 도전하기로 했다.

어찌보면 코로나19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다.

일본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는 우리가 좋든 싫든 극복해야하는 대상으로 그의 뿌리를 그들 만큼

알아둠으로써 21세기 복잡다단한 한일 정세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하는 심정도 다분히 있었다.


흔히들 일본 전국 시대의 3대 위인,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하여

평하길, 두견새를 예를 들어서,

노부나가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히데요시는 두견새를 울게 만들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정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이 대중적인 이해라 하겠다.


하지만 대망을 꼼꼼히 읽어 가노라면,

노부나가는 시대가 낳은 풍운아이고

히데요시는 불세출의 영웅적 인물,

이에야스는 불굴의 의지로 시간을 다스릴 줄 아는 혜안의 소지자였다고 말하고 싶다.


혁명가적 기질의 노부나가는 시대적 흐름을 거슬러 역 발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직접 행동으로 옮긴 뜨거운 정열의 사도라 하겠다.

대망이란 소설을 통하여 드러난 히데요시란 인물은 하늘이 주신 천부적인 지능과 기회 포착 능력,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는 영리한 두뇌를 겸비한 영웅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이에야스의 최대 장점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고 오히려 평생동안 절제된 행동과 처신으로 시간을 다스리는 구도의 심정으로 치세에 집중하였다는 것이며, 후세에서도 인정하는 바 이지만, 이퇴계의 경 사상에 심취하여 이를 치국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였다는 것은 통치자로서 그 인물의 됨됨이를 설명해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대망이란 소설은 야마오카 소하치가 쓴 20권과 시바 료따로가 저술한 10권 총 3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제 고작 제 1부를 완독하였기에 전체적인 내용을 두고 독후감을 쓰기가 매우 미흡하다.

하지만 제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시대적 흐름상 하나의 큰 결이 바뀌어가는 내용의 전개라서 1부를 마감하는 순간에 내용을 정리(?)할 겸 소감을 적어두지 않으면 감상이 휘발될 것 같아 몇 가지 테마를 정리하여 감상문을 남겨두고자 한다.


- 먼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대성과 영웅주의적 발상

- 16세기 일본 봉건주의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실제의 역사적 사례

- 섬나라 특유의 대륙 진출에 대한 열망과 절대적 필요성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종 승자인가?


상기 테마의 순서와 상관없이 16세기 일본 여성에 관하여 들여다 보고자 한다.

이에야스의 출생과 연계하여 그 가문의 씨족 계보를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레 당시 여성의 지위와 대우에 관한 이해가 뒤따라올 것으로 사료된다.

이에야스의 할아버지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다다미사 가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다다미사의 아내인 게요인의 미모에 반하여 그녀를 선물로 받고자 한다.

당시 게요인은 이미 5 자녀의 어미이지만 나름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측실이지만 기요야스의 아내로서 훗날 이에야스의 작은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기요야스의 아들 히로타다는 오다이를 정략 결혼에 따라 아내로 맞이 하는데 오다이는 바로 상기 게요인이 다다미사와의 결혼 생활 동안 출생한 5자녀 중의 하나이다.

히로타다와 오다이 사이에 출생한 인물이 바로 이에야스가 되는 것이다.

즉 이에야스에 있어 게요인은 이에야스의 친할머니이자 외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짐작되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 있어 여성이란 출산의 도구이자 정략적 교섭을 위한 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훗날 이에야스가 오랜 볼모의 생활을 지내는 동안 게요인과 오다이는 음양으로 이에야스를 위한 헌신의 노력을 기우린다.

모자지간의 끈끈한 애정은 동서고금에 있어 한결같다는 생각이다.


대망에 나오는 여성 인물 중에 히데요시의 정실인 기타노만도코로(네네)를 빠트릴 수 없다.

오와리 지방 농군의 아들 히데요시와 결혼하여 농사만 짓다가 히데요시가 벼락 출세를 하는 바람에 실질적인 왕후의 지위에오르게 되지만 항상 히데요시의 곁에서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담당한다.

더불어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있어서도 히데요시에게 간언하기를 서슴지 않고 히데요시 또한 그의 충고를 믿고 따른다.

네네의 유일한 흠결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는 것이고, 훗날 히데요시가 그의 나이 58세에 유일한 아들을 보게 되는데, 그 어미가 바로 자차히메이다.

자차히메는 히데요시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장조카인데 자차히메는 18세때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무튼 40살 연상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다.

히데요시는 어리기도 하지만 소시적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할 지위에 있던  자차히메를 측실로 얻게 되고 게다가 나이 58세에 자차히메를 통하여 득남까지 하게 되니

그에 대한 애정이 몽땅 쏠려가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기타노만도코로는 항시 의연함을 잃지 않을뿐만아니라 히데요시를 쥐락펴락 언제까지나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현명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여성으로서 히데요시의 누이 동생인 아사히히메이다.

아사히히메는 오와리 농군의 생활이 뼈속까지 젖어 밭일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정치적 라이벌인 이에야스와의 전면적인 대립을 피할 목적으로 이에야스와 정략 결혼을 추진코자 아사히히메에게 소에다 요시나리와 강제 이혼할 것을 종용한다.

아시히히메는 요시나리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절대 깨고 싶지 않았지만 히데요시의 강압에 눈물을 삼키고, 그의 남편 요시나리는 하데요시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이혼과 함께 자결을 한다.

아사히히메는 이에야스의 두 번째 정실의 지위로 결혼을 하지만 엉망진창이 된 심신으로 명목상의 자리만 지키다가 요시나리에 대한 환몽과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쓸쓸히 병들어 생을 마친다.


게요인, 오다이, 기타노만도코로, 자차히메 그리고 아사히히메는 16세기 중후반에 여성의 지위와 사회적 위치를  들여다 보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여성이란 출산의 도구, 정략적 거래를 위한 상품, 그리고 전리품의 하나에 지나지 않은 존재였지만 120년간 전란속에 있는 일본의 통일을 위하여 혀를 깨무는 아픔을 견디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초개와 같이 희생되어간 존재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당시 조선은 선조 시대로서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이라는 걸출한 여성 위인들이 있었다.

허나설헌은 허균의 누이이고 신사임당은 이율곡의 어머니이다.

특히 신사임당은 당시에도 여성 인권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분이시고, 한 번도 시댁을 찾지 않고 자유로운 여성의 삶을 살다가 떠나신 분이다.

신사임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모양처의 상과는 아주 멀리 동떨어진 생을 살았고,

허난설헌은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자식 뒷바라지에 애쓰다가 단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튼 동 시대 조선과 일본에 있어 여성의 지위는 제아무리 유교의 영향권에 조선이 속해 있었다 하지만 눈만 뜨면 전쟁을 하던 일본과는 상대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다음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한 내용을 담지 않을 수 없다.

히데요시는 오와리라는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타고난 비상함으로 따로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천문과 지리에 밝았다고 한다.

주변 상황 파악에 대한 동물적 감각, 상황에 따른 능란한 임기응변, 강철같은 체력, 목표 달성을 위한 집요함, 무엇보다도 주변 세력의 규합을 이루는 정치력과 민심을 얻기 위한 인기 전략, 그리고 미래 비전의 제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히데요시는 문맹을 간신히 면한 학문 수준이었지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에는 뛰어난 달변가였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말고삐를 잡는 시동으로 시작하였지만

전장에서는 말의 속도에 버금가게 달음박질하는 건장한 다리의 소유자였다.


그가 마굿간 지기를 담당할 적에는 사흘간 마굿간에서 먹고자니 말들과 대화가 되었다고 하며, 노부나가의 신발 시중을 드는 자리에 있을 때에는 매일 새벽 노부나가의 신발을 등짝에 꽂아 따뜻하게 녹여 두었다고 한다.

가슴에 품으면 배앓이를 할 수 있기에 등짝에 두어 예열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던 때에,

마쓰히데의 반란으로 노부나가가 비명횡사를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는 군력을 추스려 반란군을 진압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노부나가의 자손들도 있지만 전쟁의 국면을 교묘히 이용하고 민심 속에 파고드는 전략으로 노부나가의 후계 자리를 히데요시답게 파고든다.

그의 유일한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노부나가의 죽음 당시 노부나가의 초대로 쿄토와 오사카를 유람 중이었고, 오히려 마쓰히데의 추적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급급하였던 관계로 히데요시의 위대한 전과를 멀리서 구경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즉 하늘의 손길이 히데요시로 향하였다고 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서로 사생결단을 회피하고 견제적 세력으로 양립하는데,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히데요시는 자신의 누이 아사히히메를 이혼시킨 후  이에야스에 두번째 정실로 보냄으로써 처남 매부의 관계를 맺고자 한다.

이처럼 모든 일본인의 소망이던 일본의 천하 통일을 외형적으로나마 이루게 되자 히데요시는  천왕으로부터 간파쿠의 직위를 받음으로써 명실공히 최고 지배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는 기세를 몰아 당시 일본 내 해외 문물과 정보에 가장 정통한 사카이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고  쿄토의 관문이랄 수 있는 오사카에 대하여 대대적인 도시 계획을 수립하여 전 일본의 물산과 인재가 주변에 모이도록 기획한다.

이 싯점부터 즉 1588년경 조선과 명나라 침공에 대한 욕망을 수시로 드러내고 히데요시는 세계 정복의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에 관한 내용은 대망 2부에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약한 아빠 히로타다와 게요인의 딸 오다이 사이에서 오카자키 영주의 아들로 태어난다.

오다의 집안과 요시모토 집안의 갈등 속 국면에서 어느 편에 편입되는 것이 유리할까 우왕좌왕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 히로타다가 측근들에 의하여 살해되고, 이에 이에야스는 어릴 적부터 볼모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슨푸의 요시모토 집안 볼모로 잡혀갈 때에도, 도중에 오다 집안에 납치되어 본의 아니게 엉뚱한 곳에서 볼모의 신세를 지게 되는데 이것이 오다 노부나가와의 어린 시절 둘 간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나이 차이는 약 10년 정도 지지만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인물됨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 때부터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성장에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다.

이에야스가 성년이 되는 18세를 넘기고서야 간신히 볼모의 자리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등 파란만장한 어릴 적 고생을 통하여 이에야스는 신중하고 인내하는 심성을 몸소 키워온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에야스는 슨푸(현재의 시즈오카)의 요시모토 조카인 츠루히메(후에 쓰키야마도노)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츠루히메는 고귀한 이마가와 집안 출신에다가 미색을 겸비한 터라 겸손과 절제를 몸에 배인 이에야스와 심한 갈등을 겪는다.

결국 츠루히메는 이에야스의 심복과 심지어 전담 의사와도 밀교를 맺는 등 행실에도 문제가 많았고 심지어 아들 노부야스와 도쿠히메(오다 노부나가의 딸)의 사이를 질투하여 둘 사이를 갈라 놓으려 한다.

결정적인 것은 자신의 본가와 가까운 다케다 집안과 밀통하여 이에야스를 파멸로 몰고 가려는 어리석은 반란 계획이 발각되자 오다 노부나가는 츠루히메와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장자인 노부야스에게 자결을 명한다.


이에야스는 영웅호색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여성 편력이 제법 심한데, 독특한 것은 주로 신분이 낮은 시녀들을 대상으로 사냥에 나선다는 것이다. 이는 고귀한 집안 규수들에게 씨를 뿌리면 후에 후계자 선택에 있어 많은 제약과 걸림돌이 생길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이에야스가 자신의 영향력 하에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지론을 펴기도 했다.

 

아무튼 첫번째 정실인 츠루히메가 불행히 삶을 마감하고 주로 측실들의 몸을 통하여 후손을 생산해가다가, 뒤늦은 나이에 상기 언급한 바와 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이 아사히히메를 두번째 정실로 맞아 들임으로써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 된다.

객관적 힘의 우세는 히데요시가 절대 우위였으나 이에야스를 무력으로 정복하기에는 많은 피해가 예상되고 이에야스의 인지도 또한 만만치 않아 히데요시는 회유의 술책을 쓰기로 한다.

이 점은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히데요시는 수시로 일본 국토의 협소함을 토로하였고 이의 타개를 위해서는 일본 통합이 급선무인 바, 어떻게든 이에야스와 화학적이든 물리적이든 평화를 위한 결합을 해두고 즉각 대륙으로 향한 야망을 불태우고자 했던 것으로 추론된다.

히데요시로서는 뒤돌아볼 틈도 없이 전쟁과 전쟁을 거듭하여 천하 통일을 목전에 두었으나, 논공행상에 있어 목숨 걸고 추종한 신하들에게 나눠줄 봉토가 절대 부족하다는 것을 미리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대목이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생각되는데,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바로는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이후 내부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막연히 알고 있었던 바, 임진왜란의 발발 동기는 해석 상에 있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봉건국가의 경험이 없는 우리가 생각하는 당시 일본의 상황과 실제 봉건국가의 큰 틀에서 봉토를 위주로 전쟁을해온 그들의 통치 철학 간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히데요시의 대국적인 생각의 크기를 새로운 차원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상권과 경제계를 주름잡고 있던 사카이 인들은 전쟁보다는 화평을 선호하였기에 조선 진출을 전면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전쟁보다는 교역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던 바, 히데요시는 전쟁을 위한 물자 수급을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타개하고 조선 침략을 결정할 수 있었는지 그 내막을 제 2 부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임진왜란 동안 과연 이에야스는 어떻게 히데요시의 감시를 피해 내부적 힘을 축적할 수 있었는지, 과연 이시카와 가즈마사의 예측, 즉 히데요시보다 나이어린 이에야스에게 시간의 절대성을 믿고 꾸준히 힘을 기르면 그의 시대가 반드시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 것인가가 2부를 읽는 내내 흥미로운 점이 될 것이다.


혹여, 약 3년전 오키나와 여행 당시, 류큐 왕국(16세기 오키나와에 존재한 나라)은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출병은커녕 일체

협조하지 않았던 것을 확인하였는 바, 2부에서 야마오카 소하치가 이같은 점도 다룰 것인지 더불어 살펴봐야겠다.    


흔히들 대망을 일본의 삼국지라고 한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도 1200년의 차이가 있고 인물의 구성과 성격도 상이한 점이 너무 많다.

삼국지는 중국인 특유의 하늘의 운명과 인간의 조화를 위한 노력 등이 밑바탕에 있는 반면,

대망은 생존을 위한 ‘Survival Game’ 같은 느낌이 매우 강하다.

삼국지는 고사성어를 비롯한 문학적 가르침이 그득한 보고의 역할을 하지만,

대망은 섬나라 특유의 자기만의 색채가 강렬한 문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 중에서 할복에 관한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할복이라는 것도 자기 맘대로 활개치고 뻥뻥 내지르다가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 그냥 꽉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정이고 뭐고 간에 맘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그러다가 거짓임이 드러나거나 혼연의 힘을 다해도 안된다고 생각할 때, 할복이라는 최후의 비상 수단을 챙겨두고 있다는 것이다.

할복에 관해서 시바 료다로의 작품 ‘제국의 아침’에서 그 방법과 의미를 접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의미가 정확히 와 닿지 않는다.

그저 벚꽃처럼 피었다가 지는 그런 수단이자 의미. . .

아무튼 삼국지와의 비교는 소하치의 2부를 마감하고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을 성 싶다.


대망 시리즈 20권째를 완독했다.

지난 일기장을 들춰보니 정확히 2월 18일 집으로 배달되어 오늘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대망 1부를 읽고 미리 내용을 요약하여 독후감을 써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망 2부는 1부에 비해 박진감은 떨어지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전기와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

야마오카 소하치는 17세기초 일본의 전반적인 역사 흐름과 생활상을 2년여 동안 면밀히 조사하고, 18년간 이 소설을 연재하였다고 하니 총 20년에 걸쳐 대망이라는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분량(약 10,000페이지)이나 내용 면에서 大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기억 속에 이처럼 십 수 년 간에 걸쳐 작가 내면의 모든 것을 밑거름으로 하여 탄생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그리고 25년간 연재된 소설 박경리의 “토지” 이다.


그들의 작품을 읽고 혼자 차분히 내가 느낀 바를 글로써 담아보는 것은 그들의 작품을 평한다기보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영광스럽고 그런 벅찬 감흥을 지속적으로 남겨두기 위함이다.


 


대망 1부의 독후감에서 피력한 바와 같이,

- 임진왜란에 대한 다양한 해석

- 일본 나라와 이에야스

- 이에야스의 일생

- 서양에서 바라본 일본

이런 테마를 갖고 감상을 써 보고자 한다.


먼저 임진왜란(1592~1598)은 조선과 일본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각론하고,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감행한 요인을 작가 소하치는 절대적 권력자 히데요시의 내면으로부터 찾고자 했다.

히데요시에 의한 전국 평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그는 간파구의 지위를 아들 히데쓰구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태정대신이자 다이코의 절대적 지위에 오르게 된다.

히데요시의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말처럼, 조선과 명나라를 모두 굴복시켜 무사들에게 봉토와 영지를 한껏 분배해주겠다는 야망의 발로였음은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통일 일본의 미래 비전을 나름대로 제시한 것이었으리라....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실직자로 나앉은 낭인 무사 계급이 무려 수 십 만에 이르게 됨에 따라 이들에 대한 구제책이자 히데요시의 개인적 야망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더불어, 전쟁 직전에 최후 통첩으로 보낸 협상안을 보면 조선의 항복(볼모 요구)과 명나라 공주와의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명나라의 속국이 되거나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은 지역(나라)과는 상업적 거래를 금지하고 있었으며 당시 일본 쓰시마는 신하의 예를 갖추어 긴밀한 상거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명나라는 양국간 통상을 위하여 히데요시를 ‘일본의 王’으로 임명할 의향이 있다는 서신을 보낸다. 이에 히데요시는 격노하였고 싸움에 자신이 있는지라 조선 출병을 다짐하게 된다. 히데요시는 일본 전체의 동원 가능한 군사가 약 1백만 명 정도로 예상하였고 이 중에서 약 40만 명을 정벌에 파견할 계획을 세운다(실제로는 약 25만 명 투입).

당시 협상을 주도한 명, 일, 조선의 책임자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절대 권력자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사실을 은폐하고 자신의 절대자의 입맛에 맞는 유리한 보고만으로 일관하였던 것도 전쟁 발발의 요인 중에 하나이다.

히데요시의 성격상 돌출 행동과 비상식적 언행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과대망상적 자만심이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


여기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조카인 자차히메(당시 18세, 후에 요도기미로 불림)와 58세의 나이에 첫 아들 쓰루마쓰를 얻게 되는데 쓰루마쓰는 출생 후 3년 만에 이유 없이 급사를 하게 된다.

쓰루마쓰의 급사는 히데요시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주었고 그는 천하를 가졌으나 자식이 없는 신세를 한탄하다가, 죽기 전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명예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 또한 임진왜란의 요인 중 하나로 보이는 대목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에 있어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3사람이 소하치의 소설에 있어 주요 인물로 부각되는데, 히데요시 사후에 벌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만이 이에야스의 편에 서서 일본 평화의 주축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편, 임진왜란의 전황은 히데요시의 예상과 달리 조선의 의병과 승병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명나라, 조선과의 협상도 지지부진한 채 답보 상태로 빠져든다.

임진왜란의 실패는 히데요시의 건강 악화를 재촉하여 결국 1598년 임종에 이르게 된다.

죽기 전 히데요시는 그의 둘째 아들 히데요리의 안위를 위하고자, 이미 처남 매부 지간인 이에야스에게(1부에서 언급) 히데요시의 아내 요도기미의 동생 다쓰히메를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타다와 결혼을 맺게 한다.

즉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처남 매부지간이면서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타다와는 동서지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히데요시는 홀로 남은 히데요리(양자인 히데쓰구는 자결하였고, 쓰루마쓰는 급사)를 히데타다의 갓 태어난 딸 센히메와 맺어줄 것을 이에야스에게 신신당부한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2중 3중의 혈연 관계로 묶어 두는데 히데요리와 센히메와의 관계는 족보상으로 무어라 불러야할지 알 길이 없다.


후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결국 히데요리와 센히메와의 결혼을 승낙하지만, 2차에 걸친 오사카 전투로 히데요리와 그의 생모 요도기미는 자결하고, 센히메는 한 때 할복의 유혹을 떨쳐내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혼다 다다도키와 재혼을 하게 된다.

센히메의 재혼 당시 센히메를 납치하려한 ‘센히메 와사카사키 사건’이라고 제법 떠들썩한 일이 있었고, 그 사건의 주도를 셋쑤 쓰와노 성주 사카자키 대와노카미가 했다고 한다.

사카자키는 조선 사람으로서 우키다라는 성(姓)을 조선에서 얻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 편에 가담한 맹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에 협조하여 함께 일본으로 도일한 후 일본에서 성주의 지위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이완용의 선조 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봤을 때 이 같은 경우가 다수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시 여성들의 기구한 운명은 1부에서 언급한 이에야스와 아사히히메(히데요시 누이 동생)의 관계에서도 드러나지만, 잊기 전에 언급하고 싶은 것이 또 있다.

이에야스는 18명 정도의 측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자신의 측실 중에 나이가 어린 애첩을 젊고 의기 충만한 부하에게 포상으로 하사하는 것이다. 소설 내용 중에 두 차례나 이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혼다 마사즈미에게 자신의 오우메 부인을 주었고, 가쓰타카에게는 16세의 측실 오마키를 하사하는 것이었다.

소하치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엉뚱한 유물 분배였으나, 당시에는 그것이 명예이면 명예였지 누구 한 사람 이상하게 보지 않는 야만 풍습의 하나였다”

이에야스의 집권 시기는 조서 광해군의 시기와 맞아 떨어지는데, 아무리 남존여비의 시대이고 일부종사라는 말도 있었지만, 어찌 자신의 후궁을 신하에게 하사한다는 것이 상상이라도 가능하였겠는가?


이와 관련하여 또 한가지 예를 든다면,

이에야스의 임종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자아라는 측실은 이에야스의 아들 중 가장 출중하고 기백이 넘치는 6남 다다테루의 생모이기도 했다. 자아는 비록 생모일지라도 영주의 신분인 다다테루를 알현하기 위하여 하루 전에 신청해서 승낙을 받아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냐하면 자아는 생모이기 전에 이에야스의 측실이고 이는 하녀의 계급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경우 황후-비-빈 등으로 측실을 구분하고, 생모에 대해서는 예우를 갖추었다고 한다. 조선의 경우에도 비-빈-귀인-소의 등으로 품계가 있었으나, 일본에는 오로지 전쟁만으로 일관된 전국 시대로 이런 체계는 마련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임진왜란은 막을 내릴 수 있었고, 참전 중인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임종 사실을 극비로 하여 철수를 단행한다. 이 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언급, 사명당을 비롯한 승병과 의병에 대한 항전도 소하치는 나름 기록해 두었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 이전에 이에야스는 소위 간토 8주 라고 하는 일본 동북부 지역에 대한 토벌 전쟁을 성공리에 수행하였다.

이에 히데요시는 기존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 지역을 내놓고 새로 개척한 간토 8주로 영지 이전할 것을 명령한다.

히데요시의 속셈은 지역적으로 자신의 본거지인 오사카와 가까운 곳을 측근이나 친척으로 방어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고향과 본거지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이 시점에서 히데요시에 반발하여 한 판 승부를 보든지, 간토 8주로 옮기든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가장 용맹하기로 소문난 미카와의 장수들은 이구동성으로 결사항전을 부르짖지만 이에야스는 혀를 깨무는 고통을 인내하며 진정한 일본 나라의 평화를 추구하는 대망의 큰 그림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가까스로 히데요시가 어렵사리 이룩한 평화의 물결 속에서 지금 다시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아니면 인내해야 하는지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지...

결국,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쿄토에는 오사카같은’ 방어벽과 물산의 집산지가 있듯이, 슨푸(현 시즈오카)에도 이 같은 도시 건설의 필요성이 있음을 호소한다.

이것이 바로 에도 시대 탄생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히데요시와 이 같은 타합을 이룬 후에 이에야스는 측근들과 함께 눈물을 머금고 간토 8주로의 영토 교체를 받아들인다.

슨푸를 본거지로 하면서 에도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인내의 이에야스”라는 칭호가 나오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야스는 5세때부터 18세까지 10여년의 볼모 생활을 비롯하여 죽을 때까지 근검 절약을 생활 신조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정적이나 반란군을 진압할 때에도 아무리 힘의 우위에 있을지라도 손쉬운 완력을 최대한 자제하는 등, 이 모든 행동거지가 “인내”라고 하겠다.


천우신조라고 하던가?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이 같은 영토 교체는 이에야스에게 임진왜란 동안 자신의 힘의 축적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자 계기로 작동하는데, 그 이유는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결정할 당시 영주들로부터 군사 및 군량미 차출에 있어 간토 8주의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이에야스를 책무에서 제외하기에 이른다. 이는 임진왜란 동안 소실된 군사, 초토화된 민생 등으로 모든 영주들이 허덕이고 있을 때 이에야스만이 건재한 군사와 양곡을 비축할 수 있었으며, 이는 히데요시 사후 힘과 명성을 함께 보유한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히데요시 임종 후로부터 이에야스가 일본의 평화 시대를 완성하기까지 3번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3번의 내전이란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1차 전투 그리고 오사카 2차 전투를 의미한다.

이 모두는 히데요시의 추종 세력들이 그의 아들 히데요리를 등에 업고 권력 장악을 하고자 몸부림친 전쟁이었다. 그들도 힘의 우세에서 이에야스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히데요시에 대한 의리 그리고 무사로서 순순히 굴복할 수 없다는 요상한 자기 최면에서 발발한 즉 오래된 전쟁 문화가 만들어 낸 괴상망측한 아집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고 생각된다.


세키가하라 전쟁은 히데요시의 오른팔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전쟁이었으며, 오사카 성에 거주하는 히데요리와 그의 생모 요도기미의 묵인 하에 진행되었으나, 이에야스는 승전 후에 결코 히데요리와 요도기미를 처벌하지 않았다.

후에 오사카 1, 2차 전쟁이 더 거듭되었고 결국 오사카 2차 전쟁에서 히데요리와 요도기미는 자결을 함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과 오사카 1, 2차 전쟁은 그 성격을 달리하는데, 세키가하라 전쟁은 전언한 바와 같이 히데요시 잔당과의 싸움으로 볼 수 있지만, 오사카 전쟁은 그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

히데요시는 오사카 도시 건설을 할 때, 간파쿠로서의 권위와 권력의 본상으로서 오사카 성을 난공불락이자 가공할 규모로 건립하였다.

무사들로만 10만 명이 기거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규모면에서 상상이 간다.

자료를 찾아보니, 오사카 전쟁 동안 방화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이에야스 사후 히데타다가 복원하였으나 성벽과 해자가 파괴된 상태로 원래 규모의 1/4 정도로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오사카 성이 가지는 상징성은 성의 규모만이 아니라 히데요시의 거성(居城)이었던 점, 그리고 실제 적통을 잇는 히데요리와 생모 요도기미가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언제든 반란의 여지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한 것은 오사카 성 내에 히데요시가 비축한 황금이 비밀 창고에 그득했다고 하는데 장정 4명이 간신히 운반할 수 있는 황금 바위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황금을 군비로 사용한다면 10만 명의 낭인 무사를 3~5년 동안 유지할 수 있기에 언제든 농성이 가능하다는 계산 하에 오사카 전투의 음모가 싹튼 것이었다.

즉 오사카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건립되었고 군자금도 든든하다는 생각에서 토요토미 가문이 도쿠가와 가문에 굽실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냐 는 주변의 충동질이 전쟁의 발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와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손녀인 센히메를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고, 세키가하라 전쟁 후에도 히데요리 모자를 처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히데요리를 간파쿠의 지위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오사카 1차 전쟁에서도 히데요리 모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청원이 빗발쳤음에도 초인적 인내심을 발휘하여 품에 안고자 진심으로 노력했다.

오사카 2차 전쟁에서도 이에야스는 내부 인력(닌자)을 비밀리에 오사카 성으로 사전 투입하여 히데요리 모자를 구출하고자 했지만, 이들 히데타다는 히데요리 모자의 자결을 방치 방관함으로써, 히데요리 모자는 불길에 휩싸인 곡식 창고 속에서 비참하게 사라진다.


황금이란 무엇일까?

실로 황금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마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오쿠보 나가야스라는 인물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나가야스는 폐족이 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유랑 단원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닌 바 있으며, 매우 훤칠하고 인물도 반듯하였다고 한다.

나가야스는 재주가 신통방통할 뿐만 아니라 머리도 비상하여 수리력과 기획력이 아주 뛰어났 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야스의 중신 오쿠보 다다치카의 천거로 발탁되었으며, 심지어 오쿠보의 성(姓)을 허락받아 오쿠보 나가야스가 되었다.

그는 에도=>오사카=>쿄토를 연결하는 도로망의 확충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금맥을 찾는 비상한 재주가 있어 실제 전국 광산을 관장하였고, 도로 이정표 건설, 거리 단위 표준화 등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심지어 이에야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아, 이에야스의 6남 다다테루의 사부로 임명되기도 한다(*이 점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나가야스는 해외 문물에 대한 정보력도 탁월하여, 당시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나오는 지팡구를 찾아 헤메이는데, 그 지팡구는 현재 일본의 사도가 아닌가 추측이 되고, Zipangu란 명칭에서 현재의 Japan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팡구란 중국 동남쪽 1500킬로 지점에 금으로 치장된 섬이 있다는 설이 나돌았고, 많은 유럽인들이 지팡구를 찾아 모험을 하였다. 마치 18세기에 미주 대륙의 ‘엘 도라도’의 전설과 흡사한 면이 있다.

아무튼 나가야스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금광을 개발하여 금의 소출이 급신장하게 된다.

더불어 그는 그 황금으로 대형 범선을 대량으로 제작하고 명나라와 동남 아시아, 유럽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늘어나는 금의 생산 중 일부는 이 같은 그의 야망을 위한 자금으로 횡령을 하게 되는데 개인적 치부 차원이 아니라 세계 진출을 목적으로 하느니 만큼 그 양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에 맡긴다.


여기에 한 몫 거든 것은 소위 야소교(기독교) 세력의 일본 진출이다.

당시 일본은 구교인(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남만인(南灣人)이라 부르고, 개신교인(주로 영국과 네덜란드)을 홍모인(紅毛人)이라 칭하였다.

이에야스는 난파 사고로 일본에 체류 중인 윌리암 아담스(일본명 미우라 안진)을 등용하여 조선 기술과 항해술을 습득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우린다.

한편, 오쿠보 나가야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다테 마사무네와 조우하게 되는데, 마사무네는 세키가하라 전쟁 이후 이에야스에 가장 필적할 만한 재량을 가진 영주이기에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의 딸 이로하히메를 자신의 6남 다다테루와 혼인을 맺게 한다. 이는 이에야스도 마사무네의 힘과 인물됨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쿠보 나가야스는 다다테루의 사부이고 마사무네는 다다테루의 장인이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외눈박이 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야심이 가득한 인물이었고, 이에야스와 사돈 관계를 맺었지만 언제든 권력 찬탈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뱃심 좋고 실력도 겸비한 사람이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야소교(구교)에 관심이 많았고, 소텔로(Sotelo) 신부의 제안으로 남만인 여자를(스페인으로 추정됨) 측실로 삼기도 한다.

기독교가 구교와 개신교로 나뉘어 지듯, 이에야스는 미우라 안진의 중용으로 개신교 국가에 호의를 보이는 반면, 마사무네와 딸 이로하히메는 구교로 기울게 된다.

더불어 오사카 성의 히데요리와 요도기미 또한 구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데, 구교의 스페인 신부인 소텔로는 이에야스가 미우라 안진에 호감을 보이자 일본이 개신교 세력에 장악이 될까 두려워 다테 마사무네에게 접근하여 남만인 여자를 측실로 삼게 하는 등의 공작을 전개하고, 실제 소텔로는 그녀로부터 많은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면서, 마사무네에게 허황된 꿈을 그리게끔 한다.

즉, 당시 최고의 패권 국가인 스페인 군함이 언제든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음을 마사무네에게 공언하였고, 마사무네 또한 스페인 신부의 자격이면 그 정도의 청원도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마사무네는 오쿠보의 황금, 이에야스의 아들이자 영주로 있는 사위 다다테루, 오사카 성의 협조, 거기에다가 기존 자신의 기반을 더하고 스페인 함대의 조력이 있다면 일본 정복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마사무네는 겉으로는 이에야스의 협조자인 듯 행동하지만, 자신은 자기 영지에서 대형 범선을 건조하여 스페인 펠리페 3세에게 군사 파병을 요청하는 서신을 적어 출항시킨다. 출항의 명분은 당연히 로마와 스페인의 서양 문물을 답사한다는 구실로. . .


오쿠보 나가야스는 자신의 야망을 채워가던 중도에 뇌졸중으로 급사를 하게 되고, 사후 드러난 엄청난 양의 은폐된 황금만이 그를 대변하고 있었다.


마사무네는 오사카 2차 전쟁을 앞두고도 이에야스의 진지에 있으면서 차일피일 스페인 함대의 도착을 손꼽아 기다린다.

마사무네는 오사카 출정을 위한 집결 장소에도 굳이 우회로를 선택하여 돌아가기도 했고, 사위 다다테루를 부추겨 그의 형인 쇼군 히데타다와 반목을 일으키게끔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어떤 인물인가?

‘교활한 너구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머리가 명석하고 싸움과 전쟁의 神이라 불릴 정도로 사물의 간파 능력이 뛰어나기에 실제 히데요시도 고마키 전투에서 이에야스에게 꼬리를 내린 적이 있던 인물이 아니던가?

마사무네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꿰뚫어 보았기에 오사카 전투 이후 그는 마사무네에게 역모가 있음을 확인하고 하염없는 고민과 슬픔의 시간을 외로이 보내게 되었다.

이유인즉 마사무네의 야심 한 가운데에 그의 아들 다다테루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사무네를 군사로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이에야스가 추구하는 일본의 평화는 완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는 해법에 해법을 강구한다.


먼저, 이에야스는 다다테루를 불러 일장 훈시를 하고 마사무네의 농간에 놀아나는 그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차마 할복의 명을 내리지 못하고, ‘영구 대면 금지’라는 초유의 벌을 내린다. 실제 이에야스는 영면에 들 때까지 임종의 순간을 함께 한 자아 부인이 다다테루의 입회를 요청하자 노부나가로부터 받은 피리를 하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눈을 감는다.

다다테루에 대한 ‘영구 대면 금지’라는 벌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히데요시가 임종할 때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안위를 약조한 바 있으나 오사카 전쟁에서 히데타다의 방관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을 진정으로 가슴 아파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다다테루에게 죽음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죽음에 비견한 처벌을 내림으로써 히데요시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간다고 자위하였다.


다시 다테 마사무네로 돌아 와서, 이에야스는 다다테루에게 벌을 내린 후에,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슨푸에서 에도까지 직접 행차하며 산과 개울까지 모든 지형을 다시금 파악하고 군사 작전 계획을 꼼꼼히 작성 후 측근에게 이를 지시한다.

더불어 쿄토와 오사카에 대한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경비 책임자를 추가 발령을 내기도 한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평화를 위한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아낌없이 태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외눈박이 호랑이 마사무네는 철저히 울타리에 가두어진 야수에 지나지 않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전쟁의 神 이에야스가 직접 꼼꼼히 챙긴 방어벽을 무슨 수로 뚫을 수 있겠는가?

실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정수를 이에야스가 노구를 이끌고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를 두고 당시 최고의 무술가인 야규 무네노리는 이렇게 말한다.

“무술의 달인은 초급 무사와 대적할 때 그의 수준을 금방 알아보지만, 초급 무사는 깨닫지 못하고 열심히 하면 이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마치 위층에 있는 사람은 아래층의 사람을 보고 있지만 아래층에 있는 자는 위를 보지 못하는 경우와도 같다”

이에야스의 일련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할 마사무네는 아니었다. 그는 절대로 이에야스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역모의 야심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른다.

마사무네는 이에야스의 임종시 눈물로 참회하고 진심어린 용서를 구한다.

인내에 인내를 거듭한 이에야스의 승리였다.

“싸움은 강한 자가 이긴다.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 . . ”


  

이에야스는 장군의 지위를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이후, 일본의 총화와 나라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우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다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 통합에 절대적 필요성이 있는 황실을 극진히 대하여 잘 보존하였고,

튼실한 대비로 외부로부터의 전쟁을 미연에 방지토록 했다.

신불(神佛)의 뜻을 깨닫고자 수련을 통한 구도의 길을 찾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를 생불(生佛)이라 칭하기도 한다.

120년 이상 동안 전쟁으로 인해 피폐될 대로 피폐된 민중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야시 도슌을 발탁하여 유교를 적극 받아 들였으며, 인쇄 출판 등을 통하여 국민 계몽에 노력하였다.

농민으로 하여금 사공육민(四公六民: 소작인이 40%를 갖고 60%를 영주에게 납부)의 소작제에 빈틈이 없도록 직소제를 창안하기도 했다.

특히 이에야스는 좁은 일본 국토를 탈피하고자-히데요시의 정벌과 달리, 세계 주요 국가들과의 통상을 적극 장려했는데,

1609년 네덜란드와 무역을 허가하여 히라도에 상주관을 설치하도록 하였고, 안남(베트남)으로부터 사절단을 맞이하고,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에 편입된 오키나와 류규 왕국의 쇼네이 왕을 에도로 초빙하는 내용이 나온다. 더불어 명나라 복건성 총독과 교역을 인가하는 내용도 있다.

1610년 스페인의 루손(현 필리핀)총독 돈 로드리고(Don Rodrigo)가 새로 부임할 멕시코로 가는 길에 난파하여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배를 새로이 건조하여 일본인과 함께 멕시코 연안까지 입항하도록 선처하였다.

이에 스페인의 특사로 세바스찬 비스카이노가 이듬 해 방일하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당시 비스카이노는 특사의 목적 외에 전언한 지팡구를 찾아 오랜 기간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연안의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멕시코는 당시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na, New Spain으로 불렀다)가 국명이었고, 나는 약 30년 전 멕시코에 체류할 때 태평양 연안 Acapulco라는 휴양 도시를 일본인 가족과 함께 갔었는데, 일본인 방문 기념비가 근처에 있다고 다녀온 기억이 있다. 아마 이때(1610경) 돈 로드리고를 수행했던 일본인이 남긴 흔적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1613년에는 영국 사령관 존 세이리스가 제임스 1세의 국서를 갖고 방일하여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 같은 일련의 통상 무역을 장려하여 이에야스 집권 초기에는 9척에 지나지 않던 무역선이 10년 후 200척으로 늘어 나게 되었으며 이를 관장한 인물은 자야 시로지로였는데 세계 동향에 대한 발 빠른 정보를 바탕으로 국제 통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현재 세계를 주름잡는 일본 재벌 상사들의 효시이자 정신적 창시자가 바로 자야 시로지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이처럼, 이에야스는 일본의 통일을 이룬 후, 싸우고 뺏는 것에 익숙한 민중의 삶의 양식을 바꾸고, 통일 국가의 체제와 기틀을 공고히 다지고자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일과 마음가짐에 인내에 인내를 거듭한 인간 이에야스의 위대성을 그린 작품이 바로 야마오카 소하치의 大望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에야스의 작품 속 명언을 함께 하고자 한다.

“싸움이라는 커다란 비참과 비교할 때, 인간의 조그만 인내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이런 비교를 곧 잊어버리고 고집을 피우게 된다,

이러한 어리석음과 절연하도록 진지한 노력을 해가지 않으면 인생이란 영원한 지옥의 별명이

될 지도 모른다 (19권 전야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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