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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Apr 15. 2023

조정래의  "한강"을 읽고


조정래의 “한강”을 읽고. .


조정래 작가의 역사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의 뒤를 잇는 “한강”을 읽었다.

시대적으로 보면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의 순으로 조정래 작가는 약 100년간의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대 역작을 이루어 낸 것이다.


동 소설 “한강”은 정확히 1959년부터 1980년 5월까지 우리 현대사의 성공과 애환으로 어우러진 사연과 곡절로 점철되어 있다.


빨치산 일원이었다가 월북한 아버지를 둔 1940년생 유일민과 그의 동생 유일표가 전라도 강진에서 서울 명문고등학교로 유학 와서 1980년까지 성장하고 살아가는 동안에 겪는 인생스토리와 함께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당시 시대 상황을 절절한 장면 묘사로 구성된 작품이다.

읽는 도중 눈물이 앞을 가려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가 내 어릴 적 생각을 떠올리며 내 부모와 삼촌뻘 되는 세대들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나를 돌이켜보곤 했다.

1953년 6.25동란 휴전 이후 1960년 4.19 의거와 1961년 5.16 쿠데타를 온 몸으로 겪으며 1980년 5.18 광주혁명까지 지내온 격동의 시간 40년은 지금까지도 평가와 재평가가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 역사의 한 단락이자 세계사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우리만의 발자취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강이라는 소설은 박정희 시대의 공과(功過), 허상과 실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매우 객관적인 자세에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 없이 집필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도 있다.

약 30년 전 박정희와 중남미 포퓰리스트와의 비교 논문을 썼던 내 기억으로 돌이켜볼 때 조정래 작가가 얼마나 균형점을 잡고자 애를 썼는지 눈앞에 선하다. 왜냐하면 박정희라는 인물은 연구하면 할수록 어느 한 쪽으로 편향되게 만드는 그런 독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에서 박정희의 약력을 먼저 일견한 후에 소설 “한강”의 시사점을 짚어보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생각된다.


1917.11.14. 경북 구미에서 출생

1926.4. 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

1932.3.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제11회)

1932.4. 대구사범학교 입학 (제4기)

1937.3. 대구사범학교 졸업

1937.4. 문경공립보통학교 4학년 훈도

1939.4. 문경공립보통소학교 교사

1940.4. 만주국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신징군관학교 입교

1942.3. 만주국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신징군관학교 예과 수석 졸업 (제2기)

1942.10.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

1944.4.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제57기, 3등)

1944.4. 일본제국 육군 헌병 수습사관 (조장, 관동군 635부대)

1944.7. 만주군 소위 임관, 만주군 열하성 제6군관구 제8보병단 배장

1944.12. 만주군 제6군관구 제8보병단 부관실 을종 부관 겸 단기 책임자

1945.7. 일본제국 육군 만주군 중위

1945.8. 일본제국 육군 만주군 중위 강제 전역

1945.9.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 중대장

1946.9.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

1946.12. 조선경비사관학교 졸업 (제2기, 3등), 남조선국방경비대 포병 소위 임관, 춘천 8연대 배속

1946.12. 남조선로동당 입당, 군사총책

1947. 조선경비보병학교 수료

1947.9. 남조선국방경비대 대위 진급[23]

1948.8. 남조선국방경비대 소령 진급,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배속

1949.1. 육군 소령 불명예 전역,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문관

1950.6. 대한민국 육군 소령 복직,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

1950.9. 육군 중령 진급, 육군본부 수송지휘관

1950.10. 제9보병사단 참모장

1951.4. 육군 대령 진급

1953.11. 육군 준장 진급,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5.7. 제5보병사단장

1956. 육군대학 입교

1957.3. 육군대학 졸업

1957.3. 육군 소장 진급, 제6군단 부군단장

1957. 제7보병사단장

1959.7. 제6관구사령관

1960.1.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

1960.7.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1960.12.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1961.5. 5.16 군사정변 주도

1961.5. 군사혁명위원회 부위원장

1961.5.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961.5.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1961.5.20. ~ 1961.7.2.)

1961.6. 내각수반 (1962.6.18. ~ 1962.7.9.)

1961.7. 제2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1.7.3. ~ 1963.12.16.)

1961.8. 육군 중장 진급

1961.11. 육군 대장 진급

1962.3.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1963.1. 민주공화당 입당

1963.8.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장으로 전역

1963.10.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1963.12.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1963.12. 무궁화대훈장 수훈

1963.12. 제2, 3대 민주공화당 총재

1967.5.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1967.7. 제6대 대한민국 대통령 (재선)

1971.5.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1971.7. 제7대 대한민국 대통령 (3선)

1972.12. 제8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간선)

1972.12. 제8대 대한민국 대통령 (4선)

1972.12.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

1978.12. 제9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공화당, 간선)

1978.12. 제9대 대한민국 대통령 (5선)

1979.10. 피살

1979.1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박정희는 누구인가? 일제식민지 때는 '황군장교'였고, 1948년 여순반란 사건처럼 좌익이 한국사회를 지배하자 남로당에 가입했지만, 숙군 대상에 올라 처형당할 처지가 되자  동료들을 밀고했다. 당연히 그는 자기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1961년 5월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1972년에는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되었고, 긴급조치를 난발해 말하는 자유를 빼앗았다. 그는 지독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지향한 사람이다”(2013.08.13. 경향신문).


박정희는 일제 시대에는 출세를 위하여 일본 천황에 멸사봉공의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을 하고 수석으로 졸업하여 일본 본토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수혜를 누리다가, 일본군 장교의 신분으로 해방을 맞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조선국방수비대 포병 소위로 임관을 한다.

박정희는 친형 박상희를 흠모했는데 그의 영향으로 좌익 계열의 남로당에 입당하였고, 여순 사태에 연루되어 불명예 전역 및 사형까지 언도받는다. 그러다가 6.25 동란으로 말미암아 육군 소령으로 복직을 하게 되는 행운이 뒤따른다.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 전력은 장군 승진 심사에서 결격 사유로 대두되었으나 친일파 백선엽의 지원으로 이를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고, 1963년 윤보선과의 대선 경쟁에서도 친일 전력과 좌익 활동이 거론되었으나 오히려 빨치산의 경험이 있는 전라도에서 몰표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는 천운을 누리게 된다(소설에 따르면 박정희가 좌익 경험이 있으니 좌익을 차별하기 보단 이해하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전라도에서 작용하였다는 해석과 전라도에서 10만 표 이상의 격차로 박정희 당선에 기여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소설 한강에서 박정희와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인물이 바로 한인곤이다.

한인곤은 광복군 출신의 독립 투사였고,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대령까지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광복군 전력은 장군 승진의 걸림돌로 항시 작용하였고, 비적떼(독립군)출신이라고 비아냥대는 친일파 장교들 틈바구니에서 계급승진 연한에 걸려 옷을 벗게 된다. 자신의 영광이자 자부심의 근원이었던 독립군 전력이 해방을 맞은 고국에서 오히려 역차별을 받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 속에 빠진다. 천안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당히 야당 의원으로서 의정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회유, 고문, 심지어 중앙정보부원의 꾀임에 빠져 술자리에서 난잡하게 노는 장면이 사진으로 남겨 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협박을 받게 되자, 그는 야당에서 여당 의원으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그의 정치 인생도 막을 내리게 된다.

그는 정계 은퇴 후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실존 인물)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자신의 인생 역정을 글로써나마 남기고자 저서 집필에 매진하지만 이 작은 소망조차도 중앙정보부의 검열에 걸려 좌초하게 된다.

아마도 작가는 한인곤이라는 인물을 장준하를 모델로 하여 설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전언한 바와 같이 박정희 공과에 대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최대한 정제된 서술로 일관하였다고 보여 진다.


박정희의 과거를 비추어볼 때 또 한 가지 의아한 점은 그의 좌익 전력은 내내 그를 괴롭혔는데, 한강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유일민과 그의 동생 유일표는 40년 동안 그의 아버지가 월북한 사실로 말미암아 대학 전공 선택은 물론 취직과 사회생활에 있어 막대한 지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에도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항상 감시 속에서 숨죽여 생활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있어 좌익의 경력은 그를 괴롭히는 콤플렉스였으며 지독한 연좌제의 형틀로 철저한 감시 체제를 유지하였는데,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없는 자를 더 멸시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친일과 좌익의 전력은 평생 그를 괴롭혀 왔던 것이라 생각된다.


유일민은 1959년 상경하여 무허가 판자촌에 들어갈 여유조차 되지 않아 가마니로 벽을 가리는 움막 속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40세가 되는 1980년까지 철저한 감시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만 하는 일생을 그리고 있다.

그는 대학 전공 선택에 있어서도 신분 조회에서 탈락될 것이 당연시되는 법대를 피하여 서울상대를 지원하게 되었고 그의 동생 유일표 역시 철학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

1960년 4.19를 맞아 불의에 맞선 젊은 지식인들의 시위 행렬에 동참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혈기 왕성한 동생 유일표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입장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위하여 부잣집 가정교사로 들어갔지만 그의 월북 가정 이력이 드러나 숙식하던 집에서도 여차 없이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가정 교사로 있던 집의 큰 딸 임채옥은 유일민의 순수한 영혼과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유일민이 쫓겨난 후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임채옥은 물어물어 그의 집을 수소문하고 결국 입대한 유일민을 찾아 강원도 산간 부대로 찾아간다.

이루어질 없는 사랑임을 알고 유일민은 한사코 그의 사랑을 거부하지만 산간벽지까지 홀홀단신으로 찾아온 임채옥과 어쩔 수 없이 밤을 보내게 된다.

임채옥은 방학 때마다 여행을 핑계로 유일민을 찾아간다. 그러다가 채옥은 아버지에게 유일민과의 만남이 들통이 나게 되고 아버지의 구타 속에 일민과의 첫 아이를 유산하게 된다.

결국 임채옥은 집에서 주선한 혼사에 순응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유일민과는 1년에 1번 만난다는 약속을 받고 평범한 회사원에게 시집을 간다.

제대 후 유일민은 독일 광부로 가서 기회가 되면 공부를 할 수 있을 듯하여 광부 자격을 따고자 학원을 다니고 뒷돈도 주어 가면서 애를 쓰지만 이 또한 신원 조회에서 탈락하여 헛돈만 쓰는 낭패를 맛보게 된다. 그는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지 못해 전전하다가 회충을 병에 담아 수출하는 소기업에 입사하여 근무를 한다. 회충을 수출하는 사업이 일본 등에서 호조를 보이자 사장은 유일민에게 일본 출장을 지시하지만 신분 조회에서 여권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어 그마저 쫓겨나게 된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임채옥은 자신이 부모님 모르게 저금해 둔 모든 자금을 유일민에게 전달하며 조그만 개인 사업을 할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민은 플라스틱 사출 사업을 시작하여 그의 우수한 두뇌와 성실함으로 조금씩 사업을 키워나간다. 그러다가 임채옥의 남편은 간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게 되는데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 많은 재산을 임채옥에게 남겨뒀으나 병치레에 야금야금 자금이 바닥이 나기 시작한다. 임채옥은 버티다 버티다 유일민에게 병원비를 요청하게 되었고, 유일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채옥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임채옥의 남편이 병사하게 되고 백일 탈상도 지나 1년쯤 후에, 유일민은 서른 후반의 나이에 이르러 채옥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임채옥은 결혼을 승낙하기 전 하나의 소원을 일민에게 간청한다.

소원이란 제주도 여행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 제주 해변가에 함께 당도한 채옥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모든 옷가지를 가지런히 벗고 일민에게도 함께 알몸으로 바닷물에 들어가기를 종용한다.

차가운 바다 물결 속에서 임채옥은 일민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오빠, 오늘부터 제 과거는 완전히 없어졌어요, 오빠의 좋은 아내가 되겠어요....

그리고 우리의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고 싶어요“


  

     

소설 속 등장 인물이 워낙 많지만, 그 중에서 유일민 형제와 같이 상경하는 기차에서 만난 천두만의 일생은 60년대 당시 우리 민중 다수가 얼마나 헐벗고 굶주렸는지 하층민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무일푼으로 상경한 천두만은 시골에 두고 온 가족을 어떻게든 서울로 불러오리라 맘먹고 닥치는 대로 막일을 시작한다.

그는 역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지겟일을 해주고 삯을 받아 생을 연명한다. 그러다가 서울 생활 선배 격이 되는 나삼득과 고달픈 서울 생활의 애환을 나누며 함께 지내는데, 어느 날 나삼득은 연탄 공장 큰 공터에 산처럼 쌓여져 있는 석탄 가루를 훔쳐 내다 파는 일을 제안한다. 돈 버는 일이라면 죽는 것 빼곤 다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천두만은 나삼득과 그외 다른 일당과 함께 석탄 가루 서리에 나선다. 한참 자루에 가루를 퍼다 담고 있는 와중에 석탄 가루 더미가 산사태처럼 우르르 무너지며 나삼득이 가루 속에 파묻히게 된다. 경비원이 추격해오는 중이라 다른 사람들은 줄행랑을 치지만 천두만은 나삼득을 구출하고자 두 손으로 헤집으며 발버둥을 쳐보지만 결국 나삼득을 구하지 못하고 자신은 붙잡혀 감옥 속에서 6개월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나삼득의 죽음이 평생의 빚으로 남아 천두만은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삼득의 남은 가족을 위하여 무진 애를 쓴다.

출소 후에 천두만은 서울역 지겟일도 다른 사람 차지가 되어버려 인천항으로 가서 항만 하역 작업을 한다. 허기진 상태에서 땡볕의 고된 작업은 허약한 사람들이 졸도하며 비명횡사하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후에 천두만은 유일민의 고향 친구이자 서울에서 건달로 자리매김한 서동철의 소개로 영화관 변소의 분뇨를 치우는 ‘똥퍼 아저씨’가 된다. 궂은 일 일수록 벌이가 좋고 안정되어 천두만은 가족을 서울로 부르게 되고 큰 딸은 가발 공장에 취직을 어렵사리 하게 된다. 가발 수출이 잘되자 그는 시골 구석구석을 돌며 처녀들 긴 생머리를 잘라서 납품하는 품팔이를 한다. 그리고 숙련공이 된 큰 딸 말분이와 함께 자금을 모아 가발 공장 하청 업체라도 하나 갖고자하는 청운의 꿈을 꾸기도 한다. 특히 말분이는 점심시간도 아껴가며 가발을 만들고 손재주가 타고나 숙련된 작업으로 다른 직원들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된다. 산골을 다니며 생머리 수집하는 일을 천두만에게 권유하여 부녀가 함께 동종업에 종사하는 시절이었다. 말분이는 급여를 받아 이를 더 좋은 금리를 쳐주는 공장 사장에게 대여를 해주는데 당시에는 이런 행태가 다반사였고 자금이 달리는 회사 입장과 높은 이자를 받는 종업원의 입장에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도였던 것을 보인다.

이렇게 고생에 고생을 하여 어느 정도의 자금이 모일 즈음 느닷없이 정부에서 소위 8.3 사채 동결 긴급 명령이 발동된다. 이는 1972년 8월 3일 정부가 제도권 금융을 잠식하고 있던 지하금융, 즉 세금을 내지 않던 사채시장을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하기 위한 극단의 조치로서 긴급명령 형태로 집행한 금융정책이었다. 사채의 채권자는 돈의 출처를 밝혀야만 하고 확인된 사채에 대해서만 채무자는 책임을 지며 이 또한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이자율 월1.35프로)하면 된다는 조건이었다.(   참조).

실의에 빠진 말분이는 귀갓길에 뺑소니 차량에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속에서 천두만은 아들 칠성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할 때까지 허드렛일을 하다가 합심농장건설단이라는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자급자족 단체에 귀의하여 농사를 짓고자 서울을 떠난다.


CEO 박정희!

나는 CEO형 리더로서 박정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은 박정희에 비하면 손오공 앞에서 그네 놀이하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작가 조정래는 ‘한강의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그 얘기를 풀어가는 솜씨는 실로 기가 막히게 매끄럽기만 하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이후 아무 것도 없는 한국에서 어떻게 산업화를 이룰 것인가 고민을 한다. 결국 답은 자본이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1965년 한일 수교를 시발로 배상금을 종자돈으로 삼고,

월남 참전과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부터 외자와 함께 엄청난 차관을 확보한다.

더불어 중동 건설 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대규모 자금을 국내로 유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금으로 외화 보유고를 채워 국제 교역을 원활하게 하고, 내부로는 경부고속도로를 뚫어 물적 인적 자원의 교류를 활발히 함과 동시에 박태준에 대한 절대적 신임으로 포항제철을 설립하게 된다. 박태준의 포항제철 신화는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대한민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맥을 정확히 짚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 정신으로 밀어붙인 것은 실로 신의 한 수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같은 국가 발전을 위한 마스터 플랜은 박정희의 탁월한 두뇌, 일사분란한 군사문화 그리고 사회 정화를 통한 대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설 한강의 스토리는 월남에 파견된 군무원들의 생활, 그리고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의 애절한 사연과 이야기들, 중동 열사의 나라에서 온 몸을 혹사하며 생활 터전을 만들고자 했던 민초들의 피땀으로 얼룩진 사연들이다.


문태복이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천두만과 함께 월남 파견을 신청한다. 천두만은 마음만 있지 별 다른 기술이 없어 탈락하고 문태복은 운전 기술이 있어 월남으로 파견될 수 있었다.

문태복은 전선이 따로 없는 월남에서 소총을 지참한 채 운전수로 근무하게 되는데, 생명을 담보로 솔솔찮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름에 빠져 모아둔 돈을 몽땅 탕진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귀국 후에 그는 현 상황의 탈피를 위하여 중동 파견을 신청하게 된다. 기존 운전 기술에다가 포크레인 등 중장비 운전을 학원에서 배워 중동으로 나가게 된다. 하루하루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게다가 잊을 만 하면 스멀스멀 다가오는 도박의 유혹 속에서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그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결국 과다 탈수로 인한 요로 결석을 앓다가 중도 귀국길에 오른다.


유일민과 함께 독일 광부로 가서 학업의 길을 가고자 했던 배상집은 출국 전 학원에서 배운 독일어를 바탕으로 독일 관리자들 눈에 띄게 되어 상대적으로 원만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독하게 맘먹고 저축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학비가 거의 없다시피한 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게 된다. 광부 출신으로 독일의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갖고 금의환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교수 자리를 얻고자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주임 교수로부터 신문에 사설을 실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고, 그는 서독의 사회복지제도에 관한 글을 실었다. 예상보다 뜨거운 호응에 한껏 부푼 꿈을 안고 있던 차에,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끌려와 고문실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유인즉, 서독의 사회복지제도에 관한 글을 게재한 것은 노조를 부추기는 일이고 노조는 빨갱이들이 국내 혼란을 야기하고자 하는 행동인데 이에 동조한 것은 빨갱이가 아니냐는 논리였다. 독성 화학 물질로 개 시체를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녹여 하수구로 보내는 시연까지 하면서 동원할 수 있는 최악의 모진 협박아래 배상집은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한다. 극비리에 정부 당국에 협조한다는 서약서와 함께 학생들 조직을 탐지하여 정보를 알려주기로 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전술적 지침을 받기로 한다. 즉 어용 교수가 되지 않으면 빠져 나올 길이 없었다.   


독일 간호사로 파견된 여성들의 사연은 애절하기 그지없다.

말이 간호사이지 실제 그들이 하는 업무는 현재로 보자면 요양병원의 간병인의 역할과 간호사의 일을 섞어 놓은 것이었다. 자신보다 덩지가 훨씬 크고 무거운 독일 노인들을 간호하고 용변을 처리, 세척 등의 오만가지 일을 다 맡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녀들은 자신이 송금하는 돈으로 가족들의 생계는 물론 형제자매의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심지어 휴무일에는 꽃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불철주야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내야만 가족의 생계가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극심한 피로는 병으로 이어지고 치료를 등한시한 간호사 정남희는 사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과 눈이 맞아 몇몇은 교수 아내가 된다는 꿈을 이루고자 어렵게 번 돈으로 유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상처를 받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이를 두고 간호 장학생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한다.

유부녀의 신분으로 독일로 온 간호사는 송금하는 생활비를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거나 노름에 탕진하는 바람에 두고 온 아이를 돌 볼 길이 없어 대책도 없이 귀국 길에 오르기도 한다.

이 와중에도 김광자는 의사의 자격을 따고 귀국하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갖고 억척같은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광자는 무거운 환자를 돌보다가 악성 허리 디스크를 앓게 되고 독일 병원에서 도저히 치료가 어려워 눈물을 머금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귀국 후 가족들의 따스한 보살핌을 기대했으나 가족들은 그녀가 마치 대단한 자금을 외국에서 쥐고 들어오는 것인 양 물적인 지원을 바라고 있었다. 급여는 물론 아르바이트로 번 돈까지 몽땅 송금했던 그녀로서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베푸는  일도 잦으면 받는 사람은 그것을 권리로 생각한다는 말이 바로 그 꼴이다. 하소연할 길 없는 가슴을 안고 광자는 허리 치료에 전념하였고 시간이 흘러 거동에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보내준 학비로 취직까지 한 오빠와 동생의 눈칫밥을 얻어먹는 신세가 되고 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 독일에서 근무했던 병원에 재취업을 위한 편지를 보낸다. 독일 병원으로부터 언제든 뜨겁게 환영한다는 회신을 받고, 광자는 어머니와 함께 오빠와 동생에게 독일 갈 노자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한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오빠가 마지못해 마련해준 비행기 삯을 갖고 광자는 홀홀 단신 다시 독일 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초창기 산업화의 주축은 봉제 산업이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종일토록 쭈구리고 앉아 재봉틀을 돌리는 작업은 실로 힘든 노역이었으며 실타래와 탁한 공기 속에서 일하는 열악한 환경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많은 여공들이 실제로 천식은 물론 폐렴에 걸려 피를 토하며 죽어 가기도 했으며 혹시라도 병에 걸리면 바로 해고가 뒤따랐다. 그러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는 그마저도 감지덕지하며 다녀야만 하는 일자리였다.

여공이었던 전묘숙은 폐렴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고, 전묘숙과 같은 여공 생활을 했던 나삼득의 딸 나윤자는 극도로 약해진 몸으로 세 차례의 유산 끝에 4번째 임신을 하지만 출산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다.

그리고 평화시장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전태일의 행적이 소상히 소개된다.

하루 14 시간 중노동에 시달리고 받은 일당 50원은 당시 차 한 잔 값이었다고 한다.

같이 일하던 여공이 폐렴으로 숨지고 이를 회사 측에 항의하던 전태일은 자신도 해고를 당한다.

억울한 심정으로 노동법 서적을 찾아 공부를 하게 되고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러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 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노동 운동을 위한 조직을 아름아름 키워 나가고, 업주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반복되었지만 마침내 그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기로 동지들과 합의한다.

그날 그는 자신의 몸에 미리 준비한 휘발유를 끼얹어 분신자살을 하며, 세 마디 외침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나를 잊지 마라! “.


        

유일민의 동생 유일표는 철학과에 다니던 대학시절 야학에 적극 참여한 인연을 계기로 근로재건대의 운영을 맡게 된다. 근로재건대라고 함은 소위 넝마주이라고 하는 고아 같은 불우한 소년들을 모아 야학을 통하여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단체였다. 후에 그는 도시산업선교회의 주동 인물로 노동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고 정부로부터 주요 인물로 수배되는 고초를 겪는다. 노동자들의 희생과 유입되는 자본에 힘입어 박정희의 경제 발전 정책이 가시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전보다 넓어진 중산 계급이 형성되게 되자 노동 운동은 시민들의 성원을 받기가 힘든 상황이었고, 이에 더욱 기세가 오른 군경은 노동 운동을 반민족적인 행위로 낙인찍고 노조 탄압에 매우 적극적인 환경이었다. 유일표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을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자 다짐하지만, 월북자 가족의 신분으로 체포되게 되면 형 유일민에게 해가 될까 필사적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비구니가 된 여동생 유선희를 찾아가 다른 탁발승과 함께 전국을 떠돌며 삶에 대한 명상과 수양으로 시간을 보내다 5.18 광주사태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광주의 참혹상을 귀동냥으로만 듣다가 비상 상황이 일상으로 돌아가자 해직 기자인 이상재, 원병균과 함께 광주행 첫 기차에 몸을 싣는 것으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소설 한강의 스토리 전개 중 약 90%는 박정희 정권 시절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고로, 박정희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판단에 따라 소설의 감흥이 좌우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전언한 바와 같이 박정희에 대한 논문을 써본 사람으로서 글을 읽는 내내 여러 심경이 교차되곤 했다.

내가 쓴 논문은 “중남미와 한국 포퓰리스트의 비교: 라사로 까르데나스(멕시코), 후안 도밍고 뻬론(아르헨티나), 젤뚤리오 바르가스(브라질) 그리고 박정희(한국)를 중심으로”가 제목이었다.

 

한국에 와서 포퓰리즘이란 용어를 신문지상에서 접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포퓰리즘을 대중인기영합주의라고 번역해서 통용되기 시작했고 주로 좌파적 인사들이 국민복지 정책을 주장할 때면 이를 포퓰리스트라고 몰아 부치기 시작했다. 좌익에 대해서는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많은 국민을 겨냥한 정치적 언어유희이자 비난의 화살촉으로 포퓰리즘을 이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포퓰리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아래를 참조하고,

 


좌파적 포퓰리즘은 오바마의 연설이 도움이 된다.



난 박정희를 우익 포퓰리스트(right-wing populist)라고 부르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다. 각론하고, 포퓰리스트가 공통적으로 갖는 요소 4가지를 언급하고 포퓰리즘에 대한 얘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1. 포퓰리즘은 이념이라기보다는 정치 현상이다 (박정희의 반공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른 정치적 현상이자 수단이었다).

2. 포퓰리즘은 사회적 힘의 공백기에 나타난다(이승만 정권 타도후 장면의 무능함은 국가 리더쉽의 부재를 의미한다)

3.민족적 정서를 자극한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잘 살아 보세~).

4.카리스마적 리더쉽(육군 대장 출신, 썬글라스 등)과 선동적 언어 (한국적 민주주의, 새마을 운동, 사회 정화 운동).


내가 이렇게 박정희에 관하여 그의 실체를 거듭 언급하는 이유는 ‘이제 우리는 박정희를 놓아 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담담히 평가할 수 있을 때 우린 비로소 박정희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박정희 역시 우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강이라는 장편 소설 내내 이런 객관적 자세를 견지한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바로 박정희를 역사 속 인물로 덮어둘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 나에게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굳이 강요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피와 살을 준 구세주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의 허리를 부러뜨렸다”.

______끝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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