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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Apr 13. 2023

장 폴 사르트르의 "닫힌 방"


장 폴 사르트르의 “닫힌 방”을 읽고 . . .


80여 페이지의 짤막한 희곡이다.

1시간 동안 읽고 10시간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다.

최소한 2~3번은 읽어야 감이 잡히지 않을까싶다.

즉 처음에는 1시간 정도 소요되고, 두 번째는 약 30분 정도 그리고 세 번째는 15분 정도 걸리는 것 같다.

물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충분한 사람은 그 메시지를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기 때문에 무대 설정, 배경, 그리고 등장인물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대하게 되면 마치 격랑 속에 빠진 종이컵 신세가 되고 만다.

연극의 특성상 모든 소품이나 대화 하나하나가 복선을 깔고 있기에 반복해서 읽어볼 것을 권하고자 한다.


작품의 배경은 가르셍(男), 이네스(女) 그리고 에스텔(女)이라는 세 사람이 죽어 저승으로 간다. 저승사자로 나오는 급사의 안내로 호텔의 객실과 같은 곳으로 차례대로 인도되어 한 방에 묵게 된다.

세 사람은 공히 자신들은 이미 죽었고, 이승에서 행한 행위들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상생활과 비슷한 환경의 방으로 안내되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안내된 곳에는 지옥을 상징하는 불구덩이도 없고 신음 소리도 없는 일상과 다름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단 이승과 차이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먹지 않기에 칫솔도 필요 없고 밤이 없기에 잠을 들 수도 없고 침대도 당연히 필요 없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사형집행인(지옥의 고문기술자?)이 아닌가 의심하고 두려워 하지만, 이승에서 생각했던 쇠사슬 채찍도 없이 평온한 환경 속에서 세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어떤 사유로 이곳에 왔는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가르생은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출신의 전직 신문기자이자 작가였는데, 반전(反戰) 운동의 영웅 행세를 하다가 막상 전쟁이 개시되자 반전 운동을 지속한다는 명분으로 멕시코행 기차를 탔으나 탈영 죄로 잡혀 비겁한 인물로 낙인이 찍히는 것과 동시에 총살을 당한 인물이다. 반전 운동이라는 이상적인 외침과 그에 따른 영웅주의적 행세, 추종자들의 환대 속에 생활을 하였지만, 실상 그의 사생활은 아내에 대한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직장 동료인 고메즈와 연인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여성 편력으로 일관한 생활이었으며 심지어 혼혈 여성을 집으로 데려와 잠자리를 가지고 아침이면 그의 아내에게 아침 식사를 침대로 가져오게 하는 등 난봉꾼이자 망나니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당시 브라질은 제툴리오 바르가스 통치 시대로 2차 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한다.


이네스는 우체국 직원이었으며 극단적인 여성 동성애자로서 남자 사촌의 애인인 플로랑스를 꼬드겨서 사촌과 헤어지게 만들고 결국 자신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한다. 그 충격으로 사촌은 달리는 전차에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플로랑스는 이네스와 동침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스 밸브를 열어 동반 자살을 한다. 이네스로서는 가스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에스텔은 프랑스 파리 출신으로 금발의 여인이다.

16살 때 어려운 가정환경 탓으로 아버지 친구의 구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한다. 그리고 죽기 2년 전 로제라는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 본의 아니게 그의 아이를 임신하여 스위스에서 출산을 하게 된다. 호수가 바로 아래 보이는 발코니에서 갓난아이에게 무거운 돌을 채워 호수로 던지는 유아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그 충격으로 로제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린다. 에스텔은 다시 남편에게 돌아와 시치미를 뗀 채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그 와중에도 피에르라는 어린 남자와 육체적 향연을 지속하다가 폐렴으로 죽게 되어 이곳에 오게 된다.


세 사람은 같은 방에 머물게 된 것이 우연인지 누군가에 의하여 정해진 것인지 따져보다가 이것은 절대 우연이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상황이 조금씩 전개되면서, 이네스는 금발의 여인인 에스텔에게 집착을 하게 되고, 에스텔은 남성 편력과 남성으로부터 관심을 받아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여자이기에 가르생에게 사랑을 구애한다. 이네스는 에스텔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가르생이 심히 못마땅하고 그의 이중적인 행태(영웅행세와 도망자)를 경멸하며 비겁자라 비난한다. 가르생은 에스텔의 구애에 응답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상주의자적인 행위를 이네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가르생 : 난 그런 영웅주의를 꿈꾼 적 없소. 내가 그걸 선택한 거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법이오”

이네스 : 어디 증명해 봐요.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요. 오직 행위들만이 그가 바랐던 것을 결정하는 거예요“

가르생 : 난 너무 일찍 죽었소. 사람들이 내 행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안 줬단 말이오.

이네스 : 우리는 언제나 너무 일찍 죽죠, 혹은 너무 늦게 죽거나. 하지만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거예요. 줄은 그어졌고, 이제 결산을 해야 해요. 당신은 당신 인생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네스는 한사코 가르생이 비겁자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그를 비난한다.

“이네스 : 그런데 봐, 내가 얼마나 약한지, 하나의 숨결일 뿐이지. 당신을 쳐다보는 시선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을 생각하는 이 무색의 사유일 뿐이지. 손으로는 생각들을 잡지 못해. 자,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날 설득해야 돼. 내가 당신을 잡고 있는 거지.”


이 같은 삼각관계는 끝이 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그들은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사형집행인의 역할을 하게 되는 갈등 구조라는 것을 깨닫는다.

즉 가르생은 이네스로부터 자신이 비겁자가 아니라고 설득해야만 구원을 받는 관계이고, 에스텔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기에 이네스를 배척하기에 이른다. 에스텔은 가르생이라는 남성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비굴한 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그녀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공간에서 이네스가 에스텔의 사랑을 쟁취하는데 있어 가르생이 절대적인 방해요인이기에, 그녀는 에스텔에게 가르생은 남성다운 남성이 아니라 비겁자일 뿐이라고 설득을 거듭한다. 마치 이승에서 그녀가 플로랑스에게 했던 것처럼...


뫼비우스의 띠마냥 끝이 없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해도 해답이 없는 삼각구도 속에서 그들은 닫힌 문을 열고 탈출을 하려 하지만 결국 가르생은 이네스로부터의 구원이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방을 나서기를 주저한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가르생 : 이런! 당신 둘밖에 안돼? 난 당신들이 훨씬 많은 줄 알았지 뭐야. (그가 웃는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 .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급기야 에스텔은 가르생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이네스를 종이칼로 마구 찌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은 상태이기에 또 다른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에스텔이 칼을 떨어 뜨린다. 사이. 이네스가 칼을 집어서 자신을 마구 찌른다.)

이네스 : 죽었다고! 죽었어! 죽었어! 칼도, 독약도, 밧줄도 안돼. 이미 끝난 일이야, 알아들어? 그리고 우린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 거야. (그녀가 웃는다.)


(막)


끝이 없는 길

돌고 도는 길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

이렇게 해답 없는 갈등 구조 속에서 한 순간도 평안함을 느낄 여유도 없이 심지어 죽음도 없이 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지옥은 타인이고, 타인이 지옥이다(hell is other people)’


**P/S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은 실존과 본질에 관한 해석이다.

그는 기독교적 운명예정론을 전적으로 거부하면서 자유의지를 가진 실존적 객체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에 관한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동 희곡에 깔려 있는 그의 철학은 즉자(卽自being- in-itself)와 대자(對自 being-for-itself)에 관한 사상이다.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동 희곡을 번역한 지영래 교수의 작품 해설집에 나오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발췌한다.

“대자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식은 바라보는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식으로서의 나는 내가 아닌 것들을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대상화하기 때문에, 대자의 상징은 바로 ‘시선’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타인’이란 바로 그 시선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자’로 정의된다. 이러한 타자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수치심’을 예로 든다.

가령 내가 질투에 불타서 혹은 못된 버릇 때문에 문에 귀를 대로 열쇠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자. 혼자 있을 때는 들여다보는 주체적 의식으로서 아무런 거북함을 못 느끼다가 갑자기 뒤에서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라도 느껴지면 훔쳐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수치심을 느낀다. 이는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바라보임으로써 주체성을 잃고 객체(사물)의 자격으로 전락하고 만 까닭이다. 이처럼 누군가에 의해 바라보이고 나면 나의 존재 내부에서는 일종의 존재론적 ‘내출혈’이 일어난다. 즉 대자로서의 나를 즉자로 객체화해 버린 타인의 시선은, 내가 중심이 되어 있던 세계에서 그 중심점을 ‘훔쳐 가는’ 어떤 것이고, 그 중심점과 함께 나의 세계를 구성하던 모든 존재들을 자기 쪽으로 빨아들여 와해하는 ‘구멍’을 만드는 어떤 것이다. 더구나 그의 눈에 보이는 나의 모습이란, 내가 그의 의식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도리도 없고 그것에 대해 강제로 권리를 행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닫힌 방]에서는 바로 이 타자의 시선이 지옥의 형벌 도구이다 (이네스 : 당신을 쳐다보는 시선일 뿐 그 외엔 아무 것도 아니야. 당신을 생각하는 이 무색의 사유일 뿐이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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