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제 21 권
해방 그날이 오면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제 21 권
[해방 그날이 오면]
“1910년대 결성된 독립운동 조직을 조망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당시 독립 지성인들은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분투하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들은 시대에 편승하여 호의호식했던 이완용을 비롯한 앞으로 무수히 쏟아져 나올 친일 지성인들과 그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다.
너라면 나라면 그리 할 수 있었겠는가?“
상기는 동 작품의 20권을 읽고 쓴 독후감의 마지막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동 21권은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 수립부터 해방까지 대일 항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항일단체는 혹자에 말에 의하면 5,000여개에 이른다고 하니 이를 거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우리 역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과 주요 인물에 대하여 정리함으로써 당시 시대상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3.1운동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한일합방이후 약 10년간에 걸친 조선 민중의 독립에 대한 투쟁과 염원이 분출된 함성이었다.
그해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상해이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국민의회, 서울에서는 한성정부가 각각 발족을 한다. 결론적으로 동 3개의 정부는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하기에 이르렀고 3권 분립과 민주공화정에 입각한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을 선포한다. 이는 일본제국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마련됨을 의미한다.
1920년 6월 북간도에서 있었던 봉오동전투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대규모 전투에서 처음으로 거둔 값진 승리였으며 이에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조작 기획한다. 훈춘사건은 당해년 9월 일본이 만주 지역 마적단과 협잡하여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빌미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자작극을 일컫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의하여 청산리에서 또 다시 대대적인 손실을 입게 되는데 이를 청산리대첩이라고 한다.
우세한 병력에도 참패를 기록하자 일제는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양민들이 독립군의 배후세력임을 간파하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다. 이를 경신참변(간도참변)이라 하는데 이때 희생된 양민의 수가 수 만 명에 이르고 한인 마을은 초토화가 되었다.
수개월에 걸친 학살은 독립군 세력의 기반을 무력화시키는데 충분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은 러시아 공산주의 세력의 도움을 받고자 러시아 스보보드니 지역으로 피신을 하여 집결하게 된다(스보보드니는 러시아어로 ‘자유로운’이라는 뜻이고 이를 자유시라고 부른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돌입한 레닌은 억압받는 소수 민족에 대한 지원을 공포하였고 이에 일본의 탄압을 받던 독립군은 러시아 붉은 군대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되었으며, 실제 러시아 백군(러시아 황제를 옹위하는 세력)을 지원하던 일제를 상대로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러시아 영토에 진입한 독립군에게 러시아 적군(赤軍)은 무장해제를 요구하게 되고, 독립군 진영 내에서도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간에 분쟁이 발생하고, 사회주의 세력 간에도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서로 통제권을 갖고자 반목하게 되는데, 무장해제에 반대한 독립군 중 많은 수가 사살된 사건을 자유시참변이라고 부른다.
대한독립군단(봉오동과 청산리전투 이후 연합된 독립세력)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무장 항쟁 동력이 손실을 입은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홍범도 장군에 대한 평가가 매우 시끄러운데,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민족적 영웅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싶다. 정치적 문제를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두 가지 사항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먼저 자유시에서 희생된 독립군이 모두 민족주의 계열이 아니고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의 갈등이 더 심했다는 점이다. 마치 자유시에서 희생당한 분들이 모두 민족주의자인양 호도하는 것은 정치적 목적으로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당시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한 행위는 나라를 잃은 시국에서 지금의 보안법을 적용하듯이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해야하는 상황을 작금의 잣대로 처단코자 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나라는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빼앗기고 회복을 위한 수난은 고스란히 민중의 몫이 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하나로 자유시참변을 이해해야할 것이다.
비록 자유시참변에 따른 군력의 손실이 있었지만, 독립운동 단체들은 조직을 재정비하여 참의부(1923, 압록강 인근 통합, 임시 정부의 직할 부대), 정의부(1925, 지린 성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 일대), 신민부(1924, 북만주 일대)라는 정부조직을 수립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간다.
만주 일대에 진을 치고 끊임없이 도발해오는 독립군 세력은 만주를 통한 중국 진출을 꾀하는 일제에게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고, 급기야 일제는 만주군벌인 장작림과 미쓰야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미쓰야협정이란 1925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가 만주 동삼성 군벌 세력의 장작림과 비밀리에 체결한 협약으로 '한국 독립 운동가를 체포하면 반드시 일본 영사관에 인계할 것과 인계받은 대가로 포상금을 지불하되 그 일부는 체포한 관리에게 줄 것'을 규정한 밀약을 일컫는 것이다. 이에 만주군벌 세력들 및 관리들은 한국독립군에 대한 탄압을 하였으며, 이때 군벌들에 의해 독립군이 아닌 한국인 거주민들도 많이 잡혀가 죽었다.
1931년 만보산사건이 일어나는데 만주로 대거 이주하여 정착한 조선인과 이를 시기하는 중국인 간의 충돌이 발생하자 이를 기화로 일본 군대가 출동하여 중국 농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사건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는 곧바로 만주사변으로 이어진다.
1932년 만주 전역을 점령한 일본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수립하게 되는데 동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의 시발점으로 봐야 하고, 1937년 중일전쟁에서 1945년까지 중국 본토는 전시 상황으로 접어들게 된다.
중일전쟁이 개전되자 중국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게 되고,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눠진 중국은 좌우합작과 분열을 거듭하며 일본과 교전을 지속한다.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양대 정부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단체들의 향방도 그들의 명운에 따라 같이 휘둘릴 수밖에 없었으며, 김구의 임시정부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등도 중국 정부의 이동 경로에 맞추어 남경에서 중경으로 방랑의 길에 나서게 된다. 조선의용대에서 분리된 김두봉의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이 이동하는 연안으로 행적을 옮겨가며 항일 투쟁을 이어간다.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로 분열되어 있던 독립군은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되었으며, 일제라는 공공의 적을 대상으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공히 지원을 받았다.
특히 만주 지역에서는 중국과 연합한 동북항일연군이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일본 관동군의 토벌 작전에 밀려 연해주로 피신을 하고, 김일성을 비롯한 좌익 세력의 독립군들은 후에 러시아 세력을 배후에 두고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 주도적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여기에서 관동군과 한국광복군에 대한 언급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관동군은 소위 간도특설대라는 주로 조선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별도로 조직하여 독립군 색출과 소탕에 전념토록 한다. 동 부대의 장교로는 뒷날 한국군의 지도자가 된 백선엽, 정일권, 김백일, 신현준, 김석범 등이 있었고, 박정희 또한 관동군내 철석부대 소속으로 항일 세력 섬멸에 참여했다. 그들은 봉천과 신경을 중심으로 한 요령성과 길림성 주변까지 치안을 완전 확보하고 동북항일연군의 유격대를 몰아냈다.
한편 한국광복군의 주요 활동은 3가지로 추릴 수 있는데,
1)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항일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고,
2) 영국군과 연합 작전을 펼쳐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배치되기도 했으며,
3) 미국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을 계획하여 45년 8월 18일을 D-Day로 잡았으나 일제가 8월 15일 항복 선언을 하는 바람에 진공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국토 회복을 이룰 수 있는 명분 있는 투쟁의 기회였으나, 마치 외부 환경에 의한 독립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불운한 환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1932년 관동군에 의한 만주사변=>1937년 중일전쟁=>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시 상황은 조선반도를 일제를 위한 후방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게 금 만들고, 일제는 일본군 지원을 위한 강압적이고 물리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동화정책의 숨은 의도는 조선인에게 정신적 교화를 통하여 조선을 버리고 일본의 혼을 심어줌으로써 일제의 군국주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조선을 전시체제로 개편하여 사회 경제를 완전히 통제했으며 민족말살정책 아래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궁성요배와 창씨개명을 실시했으며, 국가총동원법이라는 법령을 제정하여 학생과 부녀자를 동원하는 근로보국대를 조직하고 청년과 노동자들을 강제 징발하는 토대로 삼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무엇보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식민지 지배를 받은 민족 중에서 자신의 고유 언어를 지켜낸 유일한 나라가 아마 우리나라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로는 엄유나 감독의 “말모이”라는 작품이 당시의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다. 말모이는 우리의 말을 모은다는 뜻으로 1910년부터 주시경이 만들고자 했던 우리말 사전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의식 있는 식자들은 온갖 탄압과 회유 속에서도 우리말을 지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말이란 그 민족의 혼과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 事件)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일본 제국이 조선어학회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판단해 관련 인사들을 집단으로 체포 및 투옥했던 사건이다. '한글학회 사건' 또는 '한글학자 집단 체포사건' 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어학회가 해방 후 이름을 바꾼 한글학회에서는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지칭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과 함께 투옥됐던 한글학자들은 석방되었다. 당시 수감생활이 대단히 혹독했기 때문에 석방될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고 한다.
이들은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국어사전 출간을 재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사건 당시 압수된 후 행방불명이었던 초고 26,500여 장의 원고를 경성역(서울역) 조선운송 창고에서 찾아냈다. 경성고등법원에 항소를 내면서 증거물로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광복 3일 전인 8월 12일에 상고 기각 판결이 나면서 보관된 것을 우연히 찾게 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 [조선말 큰 사전]의 머리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 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이 처럼 목숨 던져 지켜온 우리말임에도 한글날은 한 때 경제발전 논리에 눌려 기념일에서도 제외되는 홀대(1990년)를 당하다가 2012년 23년만에 국경일로 지정되는 서글픈 해프닝을 겪기도 한다.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일제 군국주의는 징병제 등을 실시하여 청년과 학생을 전선으로 끌고 갔으며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선으로 데려가 위안부로 만들었다. 일제는 군 위안부들에게 '물자' 라는 꼬리표를 붙여 군함에 태웠다. 군함에는 민간인을 태울 수가 없기 때문에 편법을 쓴 것이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문제는 엄연한 사실이고 위정자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마련해야 할 것이지 선심 쓰듯 뚝 잘라 처리할 성격은 아니라고 본다.
징용, 징발, 징병이란 명목으로 인력과 물자를 공출하고 배급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국민은 역사상 가장 극심한 기아상태에 빠졌다.
여기에 친일파들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극성을 부렸다. 친일인사들은 대부분 강압에 못 이겨 친일활동을 했으나 일부 자발적 친일파는 온갖 행태를 보이며 민족의 수치를 드러냈다. 친일파는 관료적 친일파, 매판자본가형 친일분자 그리고 명사형 친일분자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매판자본가형으로는 박춘금을 꼽을 수 있고 명사로서는 이광수, 최남선, 최린, 김동환, 김활란, 모윤숙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의 행위 중에서 임효정의 "미몽에서 깨자'' 라는 강연을 옮겨본다.
"왜 아들을 지원병으로 내놓지 않는가? 이제 우리들은 우리의 피까지 우리의 몸까지 이 전쟁의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서자 행위로 민적에 올리고 있었다. 이 서자 생활을 완전히 버리고 천황폐하의 적자로 나가자. 우리에게 칼이나 총의 차례가 못 온다하면 주방에 있는 식도나 부지깽이라도 들고 이 전쟁에 나서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1941년 일본은 러시아와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한다. 독일과 전쟁을 하는 상황이라 일본의 협공을 두려워한 소련은 이를 받아들이고, 이를 기화로 일본은 미국에 대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일본이 전쟁을 도발한 원인은 1929년 세계경제대공황에 기인한다. 경제대공황은 제국 열강들이 블록 경제를 형성하여 자국의 이익을 찾고자 하며 식민지와 경제자원이 부족한 다른 열강들은 자신의 식민지를 확대하고자 한다. 이같은 원인으로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도발하였으며 인도차이나반도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일본의 팽창에 제동을 건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일본이 야욕을 키워가자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내리고 미국 내 일본의 자산을 동결한다. 이를 타개하고자 일본은 진주만공습을 감행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일본의 패전은 이미 예견된 것이라 볼 수 있으나 청일전쟁부터 연전연승의 가도를 달려온 일본으로서는 자신의 기세만을 믿고 위기 탈출을 도모한 시도였다.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지고 독일과의 전쟁도 끝나가는 시기에, 러시아는 일소중립조약을 파기함과 동시에 조선반도로 진출한다. 애당초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내용이었고 한반도의 38도선 역시 짜여 진 각본에 따라 그려지게 된다. 그리고 소련은 연해주로 들어온 김일성을 비롯한 최용건, 김책, 김일, 최현 등으로 항일연군에서 조선공작단을 결성토록 하고 미래의 조선을 이끌 지도자감을 저울질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미국에서 임시정부 구미위원회를 꾸며 활동하던 이승만의 경우이다. 그의 노선은 미국 민주주의를 모델로 하고 기독교정신을 이상으로 삼는 국가체제이며, 철저히 사회주의를 배격하는 반공노선이었기에 미국 또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치인으로 점지코자 한다.
민족주의자인 김구는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손쉬운 인물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해방 후 미군정은 그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다가 이승만 입국(45년 10월 12일)후 40일이 지난 다음에야 그것도 임시정부의 주석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그의 입국(45년 11월 23일) 을 허락한다.
이렇다보니 누가 누굴 보고 괴뢰정부라 비난하는 것인지, 이 또한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차이가 있다면 소련은 공산당 일당독재의 방식으로 김일성을 수뇌로 하는 조선공작단이 38선 이북을 장악한 것이며, 미국은 민심을 유도하는 정치 공학적 여론전을 펼쳐 38선 이남을 차지한 것이다. 애당초 얄타 회담에서 미소 간에 이미 합의된 사항이었고, 애꿎게도 민족주의자 김구만 살해당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조선왕조 말년의 안이하게 지낸 세월의 후폭풍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그 여파는 지속된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공적(功績)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굳건히 다졌다는 것이다. 그런 토대위에서 남북 간의 체제경쟁 75년이 지난 후 이미 승부가 결정 난 현재에 우린 살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그가 많은 국민의 추앙의 대상이 되는 것인지 난 흔쾌히 동의할 수 없다. 그 이유로는,
1. 1908년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재판 시에 그가 보인 의리 없는 처신,
2. 하와이에서 야기한 박용만과의 끊임없는 갈등,
3. 임시정부 독립자금의 해명 없는 용처들로 인하여 탄핵까지 당한 사실,
4. 6.25동란 중 행한 그의 일련의 처신(부산정치파동 포함),
5.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만연했음에도 눈감고 용인했거나 무관심했던 사실,
6. 부정선거로 인한 4.19 야기 그리고 탄핵에 버금가는 하야.
이외에 일본의 지배를 찬양하거나 조선의 자치제를 요구한 행위 등은 불문에 부친다 해도 그의 인격과 기회주의적 처신은 존경이란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자의 판단이자 선택의 문제이지 비약적으로 과대 포장함으로써 존경을 강요할 성격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점은 박정희의 경우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그의 공과(功過)를 평가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자신의 잣대로 옳은 것은 옳은 대로 그른 것은 그른 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역사적 인물을 두고 이념적 논쟁의 화두로 올려 정치적 이득을 꾀하는 것 자체가 매우 유치한 일인데 작금의 현실은 그런 퇴보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개탄스럽다.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건국동맹(建國同盟)이 결성되었다. 이는 지하에서 해방 조국의 새 기조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해방직전 8월에 조직이 발각되어 간부들이 체포되었으나 곧바로 해방을 맞게 되었다.
종전을 앞두고 아베 노부유키 총독(*아베 전 일본수상과는 인척 관계가 없음)은 합리적 사고를 지녔다고 생각한 여운형과 안재홍에게 정권인수를 종용하고 일본군이 안전하게 물러갈 퇴로 보장과 동시에 지원을 약속했다.
8월 15일 해방의 날,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기본 구성원은 거의 건국동맹에 참여한 인사들이었다.
동시에 휘문중학교에서는 운동선수와 전문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건국치안대가 발족되었고, 치안대는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서울의 치안을 확보하고 폭동 방지, 상수도의 경비를 맡았다.
여운형은 좌파 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송진우와 김성수 등의 우파들은 9월 6일 뒤늦게 한국민주당을 발기하고 임시정부와 연합군의 환영준비를 서둘렀다.
9월8일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자격으로 인천을 통해 상륙하여 군정청을 설치한다.
해방을 맞은 조선반도는 또 다른 격랑의 물결 속에 휘말리게 된다. 바로 지긋지긋한 이념 전쟁이다.
* P/S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일은 1919년 4월 11일이다.
독립을 선포한 날을 통상 건국일로 삼는다.
미국도 1776년 독립을 선언해서 8년간 전쟁을 치르지만 그 해를 건국으로 기념한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수많은 나라들도 독립선언 이후 오랜 전쟁의 기간 후에 독립을 쟁취했지만 선언일을 건국시점으로 삼는다. 멕시코의 경우 1810년 독립을 선언하고 실제 스페인 지배자를 몰아낸 것은 1821년이다. 그러나 그들은 1810년을 건국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독립의 의지 표출이자 행동의 개시를 그 기원으로 삼는 것이기에 전혀 문제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언론지상에 건국일에 대한 논란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헌법에 명시된 건국을 굳이 1948년 정부 수립일로 해야 할 까닭이 궁금하다.
대민민국 임시정부의 존재와 역할을 애써 무시하는 것은 북한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1919년에서 1948년까지 30년의 시간을 그저 과도기적 혼란의 시간으로 묻어버리고 싶은 것인가? 돈벼락을 맞은 졸부가 조상의 묘를 호화롭게 치장하는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비단 나만의 예민함 때문일까?
역사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 같아서 겉으로는 쉽게 물줄기를 바꿀 수 있을 듯 보여도 막상 그리 되지 않는 법이다.
사초(史草)에 손을 대고자 했던 연산군을 따르려는가?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제 21 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