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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Nov 11. 2023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제 22 권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제 22 권  

[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 바람]


이이화 선생의 동 작품에 있어 한국사의 역사적 서술은 1945년 해방 시점까지 언급한 21권으로 끝나고, 동 22권은 일제 식민지 시대 동안 조선 혹은 대한민국이 겪었던 전반적인 사회문화, 교통, 의료, 인구, 여가 그리고 유행의 변화 등을 다루고 있다.

즉 근대화된 서구문물의 유입에 따른 생활의 변화, 그에 따른 의식의 개조와 신사조의 흐름 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인구의 증가라고 할 수 있다.

인구변동은 사회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구 증가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내며, 인구는 곧바로 노동력 공급의 원천이 된다. 식민지 초기 2천만이던 인구는 말기에는 3천만 명이 되었으며 조선 곳곳에 신흥 도시가 생겨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게 된다.

인구증가의 요인으로는 종두의 실시를 비롯하여 전염병 예방 같은 근대적 의료 혜택과 위생 관념의 확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인구증가에 따라 교통의 발달이 촉진되고 문화 영역의 확장은 대중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어, 1938년 ‘조선도로령’의 공포로 도로와 철도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민중들도 철도와 대중교통수단을 일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차가 지나가고, 인력거와 자전거가 그 옆을 달려가며, 마소가 끄는 짐수레가 인파속에 나아가며, 택시, 버스, 트럭, 오토바이가 달려가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대중교통의 발달은 이제 시간관념의 정착을 촉발한다. 시간을 모르면 자기만 손해인 것이다. 싼 값에 멀리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시간에 따라 여지없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간관념으로 도시 근로자에게 출퇴근시간이 생기고, 학교, 공장, 관공서 등에 시계가 등장한다.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새로운 문화가 일어나자 시계는 물질적 가치를 지니면서 문명을 상징하는 기계로 군림한다. 특히 손목시계는 모던 신사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아가고, 빠져서는 안 되는 혼수품으로 정착된다.   


시간의 개념은 또한 달력의 변화로 이어진다.

조선 세종 때부터 중국에서 배포한 시헌력(時憲曆)이 우리 사정에 맞지 않아 비밀스럽게 우리만의 달력을 가지고자 했었고, 구한말이 되면서 1896년 갑오경장 동안 근대적 시간개념을 채택하여 태양력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조선 민력(民曆)을 발행하였고, 일반 백성들도 차츰 태양력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향력(鄕曆)이라 부르는 음력을 사용하는 관습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설을 맞이할 때나 제사는 거의 음력으로 치렀다. 식민지 시기 관리들도 양력설을 쇠고는 다시 음력설을 쇠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이중과세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양력설을 왜놈 설이라 반감을 가지면서 마치 독립운동을 하듯 음력설을 쇠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은 의식주에 있어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근대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복에 있어,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이란 책에서 언급하기를,

“대개 조선민족은 옛날에 태양을 하느님으로 알고 자기네들은 이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믿었는데 태양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백의를 자랑삼아 입다가 나중에는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입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색옷을 만드는 것은 품이 많이 들고 물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흰옷을 즐겨 입는 풍속이 내려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특히 일제는 흑색의 좋은 점과 흑색으로 물들이는 방법 등을 교육시키며 색옷을 권장하였으나, 한편에서는 우리 고유의 풍습을 말살하려는 의도라 하여 민중들은 반발하기 일쑤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일(因山日)에 조선 8도에서 상경한 민중들은 상복인 백의를 입고 있었고, 이는 임금을 애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제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백의를 입은 것이다. 그리고 만세시위가 뒤따랐고 이때부터 백의 착용은 일제에 저항하는 무언의 표시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개화의 물결 속에서 양복과 양장이 시대사조를 타고 차츰 번지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친일파 또는 서양오랑캐라는 지탄을 받기도 했고, 척사파 계열의 유생들은 의관은 정신의 표상으로 이를 바꾸는 것은 정신을 파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의복의 개량과 동시에 기계로 짠 양말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더불어 러닝, 팬티 등 내복이 생산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들은 불편한 고쟁이를 벗고 내복을 입기 시작했다. 우리 전통복에는 팬티가 없었는데 팬티는 위생에도 좋았으며 양말과 함께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다.


두발 즉 머리모양 또한 새로운 변화를 거듭하기 시작한다.

1895년 단발령은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심지어 온건개화파의 김홍집은 단발령에 반대하는 민중들을 스스로 설득하겠다고 나섰다가 돌에 맞아 죽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1910년대 이발소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20년대가 되자 상투는 돌아오지 못할 과거가 되어 버렸다. 또한 면도하는 문화가 파급되었고, 수염을 깎는 일이 이발소에서 이루어진다. 수염 중에서 카이저 수염은 난발식 수염을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였고, 신채호와 김좌진 등 독립지사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여성의 머리모양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는데, 복식이 달라지자 머리모양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개화 초기 댕기머리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해 어깨의 중간쯤 내려오게 되었고, 부녀자들은 비녀를 사용하는 대신 망을 씌우거나 핀을 꽂았다. 조선여성에게 충격을 안긴 것은 앞머리를 뒤로 둥글게 말아 올리고 양 옆머리는 위로 빗어 올리는 퐁파두르(pompadour) 같은 서양식 머리모양이었다.

1929년 무용가 최승희의 보브스타일의 단발머리는 파격적이었으며 단발과 파마는 여성해방의 상징이기도 했다.


건축 또한 총독부와 관련된 공공건물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은행, 학교, 회사, 종교단체, 백화점 등은 거의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주거공간인 주택도 영향을 받아 전통한옥을 변형시킨 여러 형태의 주택이 등장했다. 서양식, 일본식 주택이 도입되고 때로는 절충식 주택도 나타났다. 특히 부엌에 수도를 끌어들인다든지, 음식물을 보관하는 찬장을 둔다든지, 대청을 여러 가지로 활용하는 등 개량주택은 여러 모로 편리한 구조로 지어졌다. 특히, 측간을 개량하여 집안에 둔다든지, 좌식보다 입식을 장려한다든지, 초가지붕을 개량하여 양철이나 슬레이트를 올린다든지 등등과 같이 무엇보다 위생과 관련되는 것들을 개선, 개량하자는 민간차원의 운동이 전개되어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농촌의 재래식 주택은 전통적 관습과 경제적 여건으로 쉽게 바뀌지 않았다.


새로운 주택이 연달아 들어섰지만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교육시설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어 도시에 집을 마련하거나 세를 얻는 지방 유학생의 수요도 많았다.

재밌는 것은 이때부터 전세와 월세 등 셋집의 관행이 시작되었고, 1912년 무렵부터 법으로 보장했으니 그 역사가 매우 긴 셈이다. 전세의 계약기간은 일 년이었으나 계약을 하지 않고 입주했을 경우에는 100일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지방에서는 전세금을 선불로 치러야 전세문서를 교부해 주었지만 경성에서는 부청에서 인정서를 받으면 되었다. 임대인이 해약을 하는 경우 기와집은 15일, 초가는 10일의 유예기간을 두었다고 한다.


양반과 상놈을 나누던 전통적 신분제는 법적으로 철폐되었고, 생활수준에 따라 소작농민과 공장노동자, 도시빈민이 하층민을 이루었다. 하층민들은 식민지 초기에는 소작료에 시달리고 말기에는 전시통제 아래에서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신음했다. 이들은 한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생활조건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주와 마름의 등살에 도시로 상경한 농민들은 도시 노동자가 되거나 광산노동자, 부두노동자, 정미소의 일꾼으로 전락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갔다. 이 같은 떠돌이 노동자들은 공사판이 있는 막노동꾼이 되었고, 그 또한 인부가 떼 지어 몰려들어 일표를 받기가 쉽지 않았고 공사장 주변에서 밤을 지샌 뒤 다음날 일표를 받곤 했다. 채용된 인부는 공사장의 함바(飯場: 반장, 일시로 지은 건물의 일본어)에서 밥을 사먹고 잠을 잤다. 이곳을 관리하는 반장두(飯場頭)는 대개 공사판의 십장이 맡았고 밥장사를 했다. 가족을 거느린 인부는 공사장 근처에 움막을 짓고 살아 하나의 빈민촌을 이루었다. 이들은 공사가 끝나면 다른 공사장을 찾아 헤맸다.

상대적으로 공장노동자들은 비록 하루 15시간의 착취에 시달렸으나 고정수입이 있기에 그나마 나은 형편이었지만, 다들 굶주리긴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물가가 뛰어 1909년을 100으로 했을 때, 1940년에는 344를 가리켰으며 결국 임금과 품삯의 실질가치가 절반 이상 줄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경성 안의 조선인의 거대한 가옥은 대개 지방에서 새로 이주한 부호와 기생들이 점령했다.

“기생은 부랑 부호의 재산을 자꾸 빨아들임으로써 가산이 해마다 늘어나나 소위 부호들은 경성에 와서 아무 직업이 없고 기생 첩질하기와 요릿집 출입, 양복치레뿐이니 해마다 가산이 축소된다. 근일에도 현중호 군은 김옥향, 김기동 군은 최가패, 김연수 군은 김소옥, 김준희 군은 변옥도, 정읍 박아무개는 홍채봉, 백인기 군은 김소홍, 전성욱 군은 김금수를 기생 명부에서 빼냈는데 통계로 보면 매화랑(買花郞: 여자를 사는 사내)은 전성욱 이외 전부 전라도 부호요, 기생은 김옥향과 김소옥 이외 전부 평양미인이다(경성잡화, 개벽 1924년 10월호)”

세상 요지경이요, 어찌 보면 세상사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가 보다.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면서 혼인에 대한 관념도 변하기  시작했고 청춘남녀는 자유연애를 부르짖으며 결혼식장에서 신식결혼을 올리게 되었다.

남녀칠세부동서과 남녀내외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외쳤고 이 사조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특히 일본이나 구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여성들이 이 운동에 앞장섰는데 화가인 나혜석, 시인인 김원주, 사회운동가 허정숙 등이었다. 이 같은 주장은 여성해방운동과 맞물려 돌아갔고, 특히 나혜석은 성(性)은 취미라고 주장하여 화제를 낳았다.

일제는 '조선민사령'으로 규제하여 남자 17세, 여자 15세는 친권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남자 30세, 여자 25세 이상이면 친권자의 동의를 얻을 필요가 없다고 정했다. 또 중혼을 금지하고 첩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성들은 아랑곳않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저명한 인사는 거의 다 첩을 두었다. 일단 첩이 된 신여성은 자신의 지식과 사회활동 경험을 무기 삼아 남성을 압박하거나 시가의 부모를 설득하여 끝내 이혼을 시킨 뒤 정실아내로서 법적 지위를 확보했는데 시인 모윤숙은 안호상의 본처를 제치고 정식결혼을 했으며 기자이자 소설가인 김말봉도 똑같은 과정을 밟았다.

물론 과부의 재가 금지 관습도 없어졌으며 비록 소수이기는 해도 당사자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었다.


조상숭배 사상과 함께 풍수설에 따라 좋은 묫자리를 잡아야 자손들이 발복(發福)한다고 믿던 장례문화 또한 새로운 변화를 겪어야 했다.

총독부는 묘지규칙을 만들어 묘지를 신설, 변경할 때에는 경찰관서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고 이에 매장보다는 화장을 권고하였고 매장을 하더라도 공동묘지를 이용하도록 했다. 서울 변두리인 미아리, 이태원, 신당리, 아현리, 이문동 등에 공동묘지를 지정하고 거주지에 따라 사용하도록 했다.  서울의 확대로 망우리와 미아리에 대형 공동묘지가 생겨났고 1940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화장하는 풍습이 늘어났다. 이렇게 전통적 풍수사상과 발복설이 완만하게나마 퇴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례문화는 가장 완고하게 고수된 전통관념으로 오늘날에도 잔존하고 있다. 일제는 1934년 의례준칙을 공포하여 장사지내는 기간을 5~14일, 상복착의 기간은 30일~일년으로 규정했다. 또한 당산제와 산신제 등 마을 공동체 행사도 미신행위라 하여 금하였다.


1930년대말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일본과 조선을 전시체제로 개편했다.

총독부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먹을거리와 의복을 비롯한 물리적 행동규범까지 제약했다. 말단의 행정단위까지 조직화하여 구성원 10~20호를 단위로 만들어 행동에 통제를 했다. 즉 백의를 입지 말고 색옷을 입으라거나 국민복이나 몸빼를 입도록 하고 음력 대신 양력의 사용을 지시하고, 정기적 회의를 반상회라 부르며 국가의례에 대해서 모든 가족은 매일 이른 아침 천황을 요배하여 황실의 안태를 기원할 것, 신사를 참배할 것, 황국신민의 서사를 기회 있을 때마다 낭독할 것 등을 주문했다.

매월 7일에 열린 반상회는 궁성요배와 묵도를 시작으로 주지 사항을 듣고 그때그때 제시된 주제의 강화(講話)를 들었다. 태평양전쟁이후 도시 사람들은 배급표가 있어야 식량을 살 수 있었는데 배급매출표에 반상회에 참석하여 받은 반장의 도장이 있어야 식량을 살 수 있게 했다.

일제는 반장의 임명에 특별히 신경을 썼고, 친일적 성향을 가진 지식인이나 지성여성으로 집안일만 하는 부인을 골라 임명했다. 이들은 반상회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반원을 모아 견장을 차고 국기를 들고 집회에 나가거나 출정 군인의 환송식에 나갔다.

총독부는 총력전을 펼쳐야하는 전시체제 아래에서 열등시민인 조선인에게 보다 강제적인 수단을 쓸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국민개로운동(國民皆勞運動: 모든 국민은 노동 활동을 해야한다는 구호)을 벌여 모든 조선인을 노는 자 하나 없이 자신들이 짜놓은 판으로 내몰고자 했다.

이렇듯 마지막 4년 동안의 전시체제 아래에서 조선의 국민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생지옥 속에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P/S

동 22 권은 일제의 통치기간 동안 변모된 조선의 모습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사회정신 문화 모든 면에서 메이지유신 버금가는 변화를 겪게된 것이다.

그리고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현재 우리 삶의 패턴의 근간을 이루는 많은 점이 당시에 형성된 것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진정한 개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에는 사관(史觀)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어느 관점에서 보는냐가 정말 중요하고 여러 사관을 포용해서 자신의 사관을 다듬는 작업은 더욱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일제 통치 기간 동안 이루어진 조선 개화의 의미를 굳이 축소하려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함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얼을 지키고자 독립을 위해 투쟁한 순국선열의 의지가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20권과 21권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립지성인과 친일지성인이란 용어를 쓰고자 했다.

독립 운동에 전념한 위인들은 결코 무식하거나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비루한 계층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대의 사고와 흐름을 충분히 이해했고 누구  못지않은 지성을 자랑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누구일까?

이상설을 비롯하여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신채호 등 독립지사라 해서 조류에 뒤떨어진 인물들이 아닌 것이다. 누구보다 앞선 사상가들이었다.

그렇기에 일제시대 조선의 변화에 대하여 우린 담담히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친일지성인과의 구별을 견지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독립지사에 대한 진정한 예우라고 생각한다.

친일지성인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피식민국으로서의 자격지심을 극복하는 것이다.

과연 지금 우리나라는 그런 길을 가고 있는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일제의 지배를 두고 존재하는 두 개의 용어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일본의 지배가 "침략"인가, "진출"인가?

침략이라 함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억압하여 강제적으로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진출이란 무주공산같은 지역으로 확대 발전하는 뉘앙스가 강하다.

예를 들어, 1492년 신대륙 발견이후 1520년대 이루어진 스페인 군단의 아메리카 진군은 진출에 가깝다할지라도 그 과정의 윤리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아즈테카, 마야, 잉카 문명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규정되는 바 크다.

하물며 한자권 문명에서 압도적 우월함을 자랑하던 한 나라를 강제 점령한 사실을 두고 진출이라 한다면 이 같은 언어도단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기존에 국가가 성립되어 있고 고유 언어와 문화가 있는 나라를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지배하는 것을 진출이라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기술로는 이해불가인 UFO를 앞세워 외계인이 지구 공략을 할 때 이를 침략이라 할 것인가, 진출이라 할텐가?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제 22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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