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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Sep 30. 2024

마스터즈 오브 로마 5

제5부 카이사르(Caesar)

제5부 카이사르(Caesar)     

부제가 카이사르인 만큼 카이사르 인생의 절정기에 이르는 40대를 다루는 내용이다.

그는 집정관의 시기를 성공적으로 역임하고 갈리아 지역의 총독으로 파견되는데, 당시의 갈리아 지역의 구도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갈리아 지역이라 함은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누어 불렀는데, 이탈리아 반도 북부 즉 루비콘강 이북과 현재 스위스 지역을 ‘이탈리아 갈리아’라고 했고, 지중해 해안을 따라 남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프로빙키아’라고 칭했으며 현재의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독일 남부 지방 일부를 통칭하여 ‘장발의 갈리아’라고 명명했다.

갈리아 지역은 켈트 족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개중에는 로마와 우호동맹을 맺어 로마에 호의적인 부족이 있는 반면 대다수의 부족들은 자신들의 고유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고수하고자 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자 갈리아 지역 정복 사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는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문화의 융성을 위한 발전단계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제국주의적 식민사업이 본격적으로 닻을 올리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카이사르에 관한 몇몇 강의를 들어보면 갈리아인들의 ‘반란(反亂)’이란 용어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갈리아 거주 부족들의 ‘저항(抵抗)’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왜 정복사업을 약 8년간에 걸쳐 목숨을 담보로 감행해야만 했던가?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돈 때문이다.

전쟁만큼 수익이 많은 사업이 없다는 것이다.

수 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게 되면 뒷단에는 무수히 많은 장사치들이 뒤를 잇는다. 전쟁이 끝나고 수확하게 될 전리품(금은보화 등)을 매매하고, 특히 가장 값나가는 아이템은 사람이다. 그 부족의 여성과 아이들을 노예로 팔 수 있는데 인신매매에 따른 수익은 오롯이 총독의 몫이며 이를 병사들에게 선심을 쓰듯 나눠줌으로써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복지와 우호동맹 혹은 속주로서의 계약을 맺게 되면 이들은 속주 세를 로마에 바치게 된다. 이는 로마를 위한 공헌으로서 더 할 나위 없는 명예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돈과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바로 전쟁인 것이다.

제국주의를 팽창적 민족주의(expansive nationalism)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우월한 힘과 무력으로 상대로부터 탐나는 유무형의 자산을 갈취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아무튼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이 본격화되자 이에 반발하는 세력이 등장을 하게 된다. 그 주도적인 인물이 바로 베르킹게토릭스이다.

베르킹게토릭스는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킨 것으로 영웅시 되는 인물인데, 이는 카이사르의 로마 화를 목표로 삼는 정복사업에 제동을 걸고 사분오열 분열된 갈리아 내 여러 부족들에게 서로 힘을 합하여 카이사르에 대항하기를 호소한다. 그가 내세운 모토는 “자유로운 땅의 자유인”이었다.     

베르킹게토릭스는 로마군의 가장 큰 약점인 병참 조달을 공략하기 위하여 청야전술(淸野戰術: 방어군 측에서 식량, 가옥, 우물 등 군수물자를 모두 없애 적군이 보급의 한계를 느끼고 지쳐 퇴각하도록 만드는 전술)을 감행한다. 여러 부족이 모여 함께 대항하다보니 각 부족별로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비록 원하는바 모두는 아닐지라도 나름 전술이 성공하여 카이사르 군단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을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누구던가? 자칭 전쟁의 신 마르스(그리스 신화의 아레스)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그리스의 아프로디테)의 후손으로서 그는 크고 작은 위기를 극복해가며 갈리아 정복을 하나씩 해나간다.

그리고 그의 무용담을 하나씩 글로 적어 로마의 원로원에 보고 형식으로 전달하게 되는데 카이사르가 쓴 내용은 필사가 되어 로마 민중들에게도 폭넓게 읽혀진다. 카이사르는 빼어난 글 솜씨로 로마 장병들의 위대한 전투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장면이 주기적으로 연출되는데 . . . 요즘 월드컵 축구 국가대항전에서 이기기만 해도 전국적인 축제 분위기에 젖어드는 마당에, 국경을 마주한 갈리아의 야만족들을 무찌르는 모습에 어느 로마인인들 감동하지 않을 것인가? 그에 따른 카이사르에 대한 민중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처럼 전투의 전개 내용을 세세히 적어 보고한 것이 바로 후세에 [갈리아 전사(戰史)]라 부르는 것이다. 

    

베르킹게토릭스 또한 때로는 카이사르를 곤경에 빠트리기도 하고 패배를 기록하기도 하는데, 로마군과 갈리아 연합군은 알레시아 성을 두고 대접전을 벌이게 된다. 알레시아 성에서 농성을 하는 갈리아군 8만을 로마군 6만 명이 에워싸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알레시아 성에 합류하고자 성 밖에서 몰려드는 갈리아 지원군은 자그마치 25만 명에 이르렀다. 즉 카이사르의 6만 로마군단은 안팎으로 33만 명의 갈리아 군을 대적하게 되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하는데, 그는 알레시아 성 안에 있는 갈리아 8만 명을 고립하고자 성 주위에 방벽을 친다. 그리고 외부에서 밀려드는 갈리아 지원군에 대항코자 1차 방벽과 거리를 두고 외벽을 쌓는다. 즉 알레시아 성을 중심으로 2개의 방벽을 쌓는 도넛 형태의 방벽을 구축한다. 이는 자칫하면 안팎으로 적을 상대하게 되어 전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전술이었다.

산술적으로 보면 3만의 로마 병사가 성 안에 있는 8만의 적을 상대해야 하고 나머지 3만의 병사가 외벽에서 다가오는 25만을 상대하게 되는 것이다.     

막상 전투가 개시되자 수적 우세를 믿은 갈리아 군이 우세하게 전세를 끌어가는 듯이 보였지만 노련한 로마 병사들과 숙련된 지휘관들은 적재적소에 인력을 기민하게 배치하는 등 군사적 기지를 최대한 발휘하여 형국을 대등하게 이끌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숨겨 두었던 게르만 용병으로 이루어진 기마대 4,000명으로 성벽 외부의 갈리아 군 후방을 급습하게 되고 진영이 무너진 갈리아 군은 뿔뿔이 흩어지며 대열을 이탈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이제 남은 것은 알레시아 성 안의 8만 명인데 고립된 상태에서 식수와 식량 조달이 어렵게 되고 지원 세력도 기대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베르킹게토릭스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이로써 갈리아 정복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나는 3가지로 추리고자 한다.

1. 조직력

로마 병사들은 카푸아에서 체계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은 정식 군대가 대다수였다. 게다가 다년간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장에서 조직력을 발휘함으로써 일당백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2. 사령관과 지휘관의 지도력

카이사르를 비롯한 지휘관들의 전략 전술에 대한 이해능력과 수행력이다. 그들은 기후 날씨를 포함하여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법 등으로 이기는 싸움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백인대장들을 가장 아끼고 위하는데 한 마디로 사람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이다. 

3. 우수한 공병(工兵)

실전에 있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요소는 바로 뛰어난 공병의 능력이었다. 축성, 가교 건설, 진지 구축 등 대규모 공사라 할지라도 우수한 기술로 전략적 방비와 공성을 위한 진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갈리아 정복을 마친 카이사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리품을 손에 쥐게 되고 이를 아낌없이 자신의 장병들에게 배당함으로써 그는 일약 로마 최고 갑부의 반열에 우뚝 서게 됨과 동시에 가장 든든하고 충성스런 군단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때 크라수스가 빚보증까지 서야 했던 빚쟁이에서 이제 로마 최고의 유명인사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카이사르의 인생에 과연 주홍빛 꽃길만 열릴 것인가?      

그가 대적해야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보니파라 불리는 원로원 귀족들의 질투와 견제였다. 그가 민중의 지지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를 질시하고 미워하는 수구세력들은 어떻게든 카이사르를 끌어내려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정관급 총독의 지위에 있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임기 연장을 위하여 집정관 선거에 나가고자 한다. 집정관 후보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임페리움(직급에 따라 주어지는 권위와 군사력 동원을 위한 권한)을 내려놓고 군사의 대동 없이 본인이 직접 후보 등록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페리움과 군사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 보니파에서는 어떤 구실과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카이사르를 기소하여 재판에 세우려 들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다년간의 전쟁으로 원로원에 사후 보고를 한 적도 많을 것이고, 전리품 취득과 정산에 있어 횡령 혐의로 시비를 걸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였기에 원로원은 한사코 그의 집정관 부재 등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부재 등록은 카이사르의 요청이 첫 사례가 아니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등 이를 허락한 선례가 많았기에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의도를 더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게다가 원로원을 좌지우지하는 세력은 바로 자신의 정적들인 비불루스, 카토가 속해 있는 보니파였기에 그는 자신의 군단을 루비콘 강 이북에 두고 대치 상황으로 접어든다.    

 

다른 한 편으로, 카이사르가 8년간 갈리아 전쟁을 치르는 동안 로마 내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두체제의 축이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먼저 크라수스의 경우, 그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5년간의 집정관급 총독으로 임명되어 동방으로 떠나게 되고,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지만 그는 로마 시민의 곡물 보급상의 업무를 핑계로 로마에 잔류하게 된다.

동방으로 떠난 크라수스는 자신의 라이벌 폼페이우스 대비 전공(戰功)이 부족하다는 점에 항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예전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할 때도 자신의 역할이 지대했음에도 반란군의 잔존 세력을 폼페이우스가 정리함으로써 자신의 공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번 동방 진출을 계기로 그는 큰 전과를 세울 요량으로 있었다. 그는 동방 아시아 속주를 넘어 그간 로마가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던 파르티아까지 진출하고자 욕심을 부리는데, 전술적 경험과 자질이 부족한 그는 참모들의 어리석은 조언에 따라 무리수를 두다가 전쟁 중 전사를 하고 만다. 로마 최대 갑부의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심복들을 히스파니아로 보내고 자신은 로마에 머물러 있었던 속사정은 바로 카이사르의 딸이자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어린 부인 율리아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의 후세를 잉태한 이래로 시름시름 앓던 율리아는 출산 도중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모두 슬픔에 잠기지만, 이는 두 사람간의 유대가 끊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사(戰史)를 통하여 민중의 영웅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자, 군사적 명성에 있어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던 그에게 카이사르에 대한 질투가 용솟음치기 시작한다. 질투만큼 눈을 가리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폼페이우스는 겉으로는 카이사르를 예전처럼 대하지만 속으로는 그의 낙오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카이사르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불사할 보니파들은 대중적 인지도와 군사적 명망에 있어 카이사르에 대적할 인물로 폼페이우스를 점찍어 그에 접근을 시도한다. 보니파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일원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을 폼페이우스에게 주면서까지 그를 자신들의 세력권 내로 영입하고자 한다.

폼페이우스의 질투와 보니파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피케눔 출신으로 귀족도 아닌 폼페이우스가 보니파의 거두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혼란한 공화정을 정리할 인물로 폼페이우스에게 독재 집정관의 지위를 허락한다.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 재등극하는 상황을 막고 또한 카이사르의 군사적 행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폼페이우스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었다.     

 

루비콘 강 이북에서 대치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깊은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를 위하여 전력을 다 한 결과가 이런 예우를 받기 위함이었던가? 폼페이우스의 변심은 인간적 실망을 넘어 그를 둘러싼 일련의 집단에 대한 증오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다가오는 미래는 군사적 지휘권을 내려놓고 로마를 떠나 망명의 길을 나서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지경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총독의 임기가 연장되지 않을뿐더러 집정관 후보 부재 등록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후보 등록만이라도 되면 집정관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인데 . . . 

군사를 대동하여 루비콘 강을 건널 것인가 아니면 망명의 길을 떠나 초야에 묻혀 살 것인가?

20년전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루비콘 강을 경계로 하여 군사 진입을 금지하였고 루비콘 강 이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로마에 대한 쿠데타로 정의하였기에 카이사르의 고뇌는 깊어만 간다. 결국 그는 최후의 결단을 내린다.

“루비콘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파멸한다. 전우들이여, 주사위를 던져라!”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 것인지 말지 반신반의하던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의원들은 혼비백산하여 로마를 떠나 각자 피신을 한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의 일전이 불가피함을 알고 격전지를 마케도니아로 정한다. 이는 자신의 군사 기반이 동방에 위치하고 있었고 자신이 총독의 지위에 있는 히스파니아의 우군이 도착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민중들의 환호 속에 로마에 무혈입성을 한 카이사르는 가는 곳마다 시민들의 환대를 받아 이탈리아 전체를 무혈로 접수를 하기에 이른다. 그는 민심을 달래고자 원로원을 구성하여 지휘 체제를 새롭게 꾸리고 자신은 독재관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마케도니아로 피신한 폼페이우스와 원로 의원 또한 자체적인 원로원 구성을 하기에 이르며 이른 바 로마의 정부가 두 개로 나뉘어 운영이 되기 시작한다.

폼페이우스 정벌에 나선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을 마케도니아로 이동을 하게 되고 폼페이우스 또한 동방과 히스파니아에서 도착한 병사들로 진용을 짠다.

급기야 이 둘은 마케도니아에 있는 파르살로스에서 회전(會戰)을 갖게 되는데, 그간 폼페이우스가 쌓았던 군사적 명망이 얼마나 허상이었는지, 실제 전쟁의 천재가 누구인지 카이사르는 여실히 보여주며 회전을 일방적 승리로 장식을 하게 된다(실제로 폼페이우스는 젊은 시절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의 패전이후 그는 상대와 병력의 차이가 날 경우 절대 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반면에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전투의 경우처럼 어떠한 위기에서도 방도를 찾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을 발휘해왔다).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대패한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피호민이 많은 이집트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제 이집트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당시 이집트는 여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가 그녀의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13세와 함께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었으며 여왕과 왕은 서로를 견제하며 권력을 독점코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참고로, 이집트는 나일 강의 강수량에 따라 한 해의 곡물 수확을 예상하는 주술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과학적이라 할 만한 척도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년 여름이 시작되면 나일 강이 범람하여 주변 토양을 기름지게 하였다. 범람의 종류는 세 가지로서 이른바 과다 수위와 풍요 수위, 그리고 죽음 수위였다. 그들은 나일 강 주변 엘레판티네라는 섬의 한 편에 우물을 파고 눈금을 새긴 나일 수위계에서 측정되었다. 측정계가 10미터를 넘으면 재앙적인 홍수를 의미했고 5~9.6미터는 풍요 수위로 양호한 범람을 의미했는데, 5미터 미만은 반드시 기근이 찾아온다는 의미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왕위에 오른 첫해에는 풍요 수위로 상서로운 징조였으나 둘째 셋째 해부터 수위가 낮게 기록이 되었다. 특히 셋째 해에는 수위가 2.5미터 수준이었는데 이는 죽음 수위 중에서도 최저 기록이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사재기로 인해 물가가 비등하기 시작했다. 이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보좌하는 측근들은 클레오파트라를 축출하기 위해 군중의 심리를 더욱 자극하고 온갖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군중의 반란을 부추긴다.     

클레오파트라는 하는 수없이 멤피스로 도피하여 사제들의 도움으로 온갖 보물들을 챙겨 시리아로 건너간다. 그녀는 시리아 용병들을 모집하여 이집트로 출병하기에 이르고 이로써 이집트는 왕과 여왕사이에, 남편과 아내사이에, 누나와 동생 남매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시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할 즈음,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 일당은 폼페이우스 방문을 두고 심각한 고민을 한다. 그들은 이미 파르살로스 전투의 소식을 전해들은 바였고 이빨 빠진 호랑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는 것이다. 앞으로 실세로 등장하게될 카이사르 편에 붙어야 이집트의 앞날이 편해진다는 판단하에, 폼페이우스를 맞이할 영접 단 중에 고용된 자객을 섞어 넣어 폼페이우스가 해안가에 도착하자마자 주살하도록 한다. 그들은 이렇게 죽은 폼페이우스의 두골을 카이사르를 위해 바칠 선물로 고이 보관하기로 한다.     

폼페이우스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피케눔 출신으로 집정관을 지낸 바 있는 아버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금수저 아들로 태어나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평생을 승승장구해온 그였지만, 하늘 아래 가장 패기만만했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던, 심지어 자신의 코그노멘을  '위대한'의 뜻을 가진 '마그누스'로 스스로 부여했던 당대의 영웅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갔다.

이때 카이사르 나이 52세였다.          



*P/S

1.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 때 남긴 명언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은 그리스 작가 메난드로스의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원전은 '주사위를 던져라'라는 의미인데 이 두 문장의 차이라면 전자는 숙명적인 어감이 강하고 후자는 모험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당시의 카이사르라면 후자의 의미로 썼을 성싶다.      

주사위를 던져라와 주사위는 던져졌다.

마치 손자병법의 원문은 지피지기 백전불태(百戰不殆: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이지만 이를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하는 것처럼 잘못 전해진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2. 코그노멘

코그노멘은 로마 성씨와 이름에 있어 독특한 호칭인데 주로 집안의 외모상의 특징을 잡아 부르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성씨가 아니라 머리숱이 많다는 뜻에서 부른 별명 같은 것이다. 루푸스는 빨강머리, 브루투스는 멍청이라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카이사르는 빈곤한 머리숱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안고 살았다. 후에 카이사르란 말이 카이저, 짜르 등 황제의 뜻으로 발전하게 되고 심지어 성경에도 등장하는데(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시작은 단순히 한 가문의 코그노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위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원로원에서 인정하는 코그노멘도 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경우 한니발을 격퇴하고 아프리카를 정복한 것을 기리기 위해 아프리카의 정복자라는 뜻의 아프리카누스라는 코그노멘을 쓴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위대한 폼페이우스라는 뜻으로 스스로 자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타인들이 불러줌으로써 코그노멘으로 자리잡게 되는 경우도 있다.     

3. 카이사르 최대의 정적으로 카토를 들 수가 있는데 카토는 카이사르의 연인 세르빌리아의 이부(異父)동생으로서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신봉하는 원칙주의자이자 절제, 금욕, 윤리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보수적 성향을 가지는 그는, 주사위를 던지듯 모험적 삶을 추구하고 정치적 개혁으로 새로운 변화를 꾀하는 카이사르와는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수 없는 운명으로 살아가게 된다.     

                  ------- 마스터즈 오브 로마 5. 카이사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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