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가기
사랑하는 규담아,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지금 너는
스물네 살의 봄을 지나고 있겠지.
어쩌면 책장 한편에 꽂혀 있던 작은 노트나,
브런치 어딘가에 조용히 남겨진
아빠의 흔적을 우연히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네.
언제부턴가 ‘청년’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책임도, 선택도, 기대도 너에게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나이가 되었어.
아빠는 네가 이 나이를 살아내고 있을 너의 하루하루가
어떤 모습일지 자주 상상해 본단다.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는
‘현실’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빠르게, 삶에 스며드는 시간이야.
취업, 일, 연애, 인간관계, 경제적 독립...
세상이 던지는 질문들이 너의 마음을 여러 번 흔들기도 하겠지.
아빠도 이즈음의 나이에,
삶이라는 무대에 막 올라선 배우처럼
설레면서도 두려웠단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기도 하고,
괜찮은 척, 어른인 척, 강한 척하기도 했지.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들 하나하나가 다 값진 훈련이었어.
인생은 ‘정답’을 찾아가는 시험이 아니라
‘방향’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거든.
그래서 이 시기의 너에게 아빠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다른 사람의 속도에 휘둘리지 말자’는 거야.
누군가가 빨리 자리를 잡고,
누군가는 좋은 회사를 다니고,
또 어떤 친구는 결혼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겠지.
그건 그들의 시간표일 뿐이야.
너의 시간표는 너만의 것이고,
그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거란다.
살아간다는 건 ‘잘 사는 법’을 익히는 게 아니라,
‘잘 버티는 법’과 ‘내 마음을 듣는 법’을 배우는 거야.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하고,
사람에게 실망도 하고, 애써 준비했지만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날도 있겠지.
그럴 때마다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해.
우리가 진짜로 배워야 할 것은
넘어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방법이야.
규담아,
네 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빠의 아버지는 농협에서 일하셨단다.
정년을 앞두고 계실 무렵, 자식들 중 한 명은 농협에 다니기를 바라셨지.
그래서 아빠는 고등학교 방교 때마다 농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단다.
세 번은 했던 것 같아.
아빠만 그랬던 건 아니야.
큰고모와 둘째 고모도 일을 해봤어.
농협에 오신 어르신분들 짐을 들어드리거나,
어떤 업무를 하러 오셨는지 물어보거나,
경제사업소에 가서는 꿀이나 산나물 같은 특산품을 포장하기도 했었지.
점심시간에는 직원들과 밥을 함께 먹으며 그 세계를 조금씩 느껴봤어.
그땐 굳이 정규직 시험에 붙지 않아도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길도 있었지.
하지만 아빠는 그러고 싶지 않았단다.
정식으로 시험을 치르고, 정면으로 들어가고 싶었어.
그렇게 해야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또 하나, 엄마가 자꾸 생각났단다.
엄마는 아빠보다 더 일찍 어른이 되었던 사람이었어.
고등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평일 저녁엔 중국집에서, 주말엔 빵집에서 일했단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을 사고,
공부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 해결했지.
늘 웃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는 강인함과 단단함이 있었어.
아빠는 그런 엄마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그 사랑은 가볍지 않았기에 책임지고 싶었단다.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쉽게 들어가는 그 자리에
또 다른 엄마처럼 열심히 사는 누군가가 밀려나면 안 되겠다고.
엄마를 닮은 누군가에게 양보할 수 없는 자리라면,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자고 결심했어.
규담아,
너도 느꼈겠지만,
네 나이가 되면 선택은 점점 더 무거워진단다.
누군가의 기대를 거스르는 일도 생기고,
스스로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겠지.
하지만 꼭 기억하렴.
너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해.
그게 어떤 길이든,
그렇게 걸어간 발자국들은 결국 너를 너답게 만들어줄 거야.
아빠는 너를 위해 네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 남기는 편지들이
너의 어딘가에서 문득 길을 잃었을 때
잠깐 마음을 기대고, 다시 걸어갈 수 있는
작은 열쇠가 되었으면 해.
아빠가 없는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너는 여전히 걷고, 느끼고, 웃으며
너답게 살아가고 있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니, 그것만으로 아빠는 충분히 행복하단다.
그것 이상은 너무 욕심이 되겠다 싶어.
그러니 규담아,
이 편지를 다 읽고 나면
조용히 책장을 덮고,
네 삶을 살아가렴.
아빠가 네 옆에 없다는 그 사실이 너에게 너무 무겁지 않기를 바라.
아빠는,
너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참 많이 고마웠고,
무한히 자랑스럽단다.
그러니 나아가렴,
무쇠의 뿔처럼.
너의 모든 계절을 진심으로 사랑한단다.
봄에,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