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정이 Aug 29. 2024

귀여니 소설

10대 이야기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 시절 나는 순정만화에 푹 빠져있는 여학생들이 대개 그렇듯 남자친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귀여니’라는 작가의 소설을 돌려가며 읽고 입술은 무조건 빨간 틴트를 발랐으며 개눈깔(?)이라고 불렸던 써클렌즈를 꼈었다. 교복 상의는 최대한 줄여 입고 머리는 솜사탕 혹은 사자를 방불케 할 만큼 화려했었다. 갓 미용을 마치고 나온 푸들이나 포메라니안을 보는 느낌이랄까. 부모님 몰래 써클렌즈를 끼고 문을 걸어 잠그고 했던 고데기 질은 얼마나 재밌던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귀여니 소설처럼 잘생긴 어떤 노는 남자애가 교문에서 벽을 등진 채로 내 이름을 부르고,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나와 그 애에게 내리꽂히는 그런 상상. 안타깝게도 나는 일명 노는(?) 무리의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잘 놀 수 있는, 어른들이 말하는 발랑 까진 여자애 중의 하나였다. 노는 아이들은 거의 남자친구가 있었다. 전날 남자친구와 밤새워 놀고 수업 시간에 솜사탕 머리로 엎드려 자다가 선생님께 혼이 나고 남자친구에게 선물로 줄 거라며 꾸민 러브장(여러 테마로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형식의 일기장)이 수업 시간에 발각되어 박박 찢겨 창문 밖으로 내던져지는 슬픈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시엔 그랬다.      


내게도 남자친구라고 부를 만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애는 전학을 온 아이였는데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새롭고 잘생긴 애,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지역이 읍 단위의 학교여서 좀체 누가 전학을 올 일이란 극히 드물었기에 그 애가 달리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그 애는 전교생 중에 키가 제일 컸다. 귀여니 소설에서 등장하는 남자친구들은 다 키가 컸으므로 그 애는 나타나자마자 합격이었던 것이다. 그 애와 사귀면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애는 남자친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내게 다정하게 굴었다는 건 기억한다. 그 애의 누나 K는 나와 동갑이었는데 자기 동생이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내게 축하한다며 자기 동생과 잘해보라고 웃어줬다. 묘하게 불편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 불안한 감정은 지금 생각해보면 예견된 거였다.   


긴 겨울 방학이 끝나갈 무렵 개학을 며칠 앞두고 K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 몇이 놀 겸 1박 2일로 병문안을 간다고 했다. 나도 K에게 문자를 보내서 가겠다고 했다. 그 애는 기뻐했다. 생각해보면 그 애가 그때 왜 그렇게 필요 이상 기뻐했는지 이상했다. 난 그 애와 그렇게 요란법석을 떨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가 그 병원에 가고 싶었던 건 사실 입원한 K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애의 남동생을 만나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      


 K는 손목에 링거를 꽂은 채로 침대에 앉아 우리를 반겼다. 시시껄렁한 이야길 나누고 나가서 나는 새벽까지 남자친구와 놀았다. K와 몇 마디 떠든 시간의 곱의 곱을 그 애의 동생과 나눴다. 아무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입원한 K와 나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으니까 나와 친한 건 걔의 남동생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K를 더 살펴봤어야 했다.      


병문안을 다녀온 뒤, 그러니까 개학하자마자 나는 학교에서 이유 없는 괴롭힘을 당했다. 같은 반이 아닌 익명의 다른 애들에게도. 이유는 내가 K를 갑자기 째려봤다는 것. 난 그런 적이 없었는데. 억울했다. 무슨 봉변인가 싶었다. K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난데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 화를 내기도 했다. 무서웠다. K는 그 뒤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다. 부모님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핸드폰을 압수당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켜 본 핸드폰에는 수십 통의 욕 문자가 쏟아져 내렸다. 작정했다는 듯이. 나는 트라우마와 함께 K와 K의 남동생 모두와 헤어졌다.      


나중에 시간이 한참 흘러 알고 보니 K는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었다고 전해 들었다. 나와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내가 그런 자신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기 남동생을 꼬시는데 썼다는 이야기. 기억을 더듬어보니 K가 내 앞에서 보여줬던 행동들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예쁘다고 해줬던 말, 어떤 쪽지, 눈이 자주 마주쳤던 것. K는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던 것이 맞았다. 그 애의 마음은 그때 그 병원에서 완전히 무너져내렸으리라. 병문안을 온다는 것이 핑계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애는 얼마나 내가 미웠을까. 그날 K는 나와 밤새 떠들면서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는 걸 상상하고 또 상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K 입장에서는 자신을 시소 맞은편에 앉혀두고 동생과 내가 같은 편에 앉아서 자신을 공중으로 날려 보낸 것 같은 기분이었으려나. K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K에게 미안했지만 미안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K가 나와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는 걸 몰랐다. K는 나 말고 다른 애들이랑 놀고 있었으니까 그걸로 충분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것은 오해였지만 K에게는 오해보다 더 큰 무엇의 상실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미리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세상 일이란 게 어디 그렇게 쉽게 실마리를 내어 주었던가.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그 비슷한 무언가로. 굳이 그 애의 남동생과 사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귀여니의 소설처럼 멋진 로맨스를 상상해왔지만 현실은 이토록 참혹하다. 그 시절 남자친구와 더 깊어지지도 못하고 물어뜯겨 내던져진 꼴이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그런 일이 있고 한참 뒤, 성인이 된 후 나는 어떤 남자가 내가 좋다고 달려들면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지 먼저 살피게 되었다.     


“좋아해 나랑 사귈래?”

“근데 있지 혹시 누나 있어?”

“... ...”     


그러니까 그 시절의 모든 일은 귀여니 소설이 너무 재밌어서 시작된 헤프닝이라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전 02화 가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