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가을을 알리는 비라고 하던데. 여름에 내리는 비와 소리부터 다른 것 같다.
여름비는 늘 우는 모양으로 내린다. 학창 시절 반에서 늘 먼저 울고 울어도 티 나지 않는, 원래 울었던 그런 애처럼. 가을비는 여름비보다 무겁고 더 차갑다. 겨울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뼈까지 시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가을은 늘 온 적 없이 왔으니까. 꼭 며칠 안으로 떠나는 이모처럼 온다. 떠날 이모 코트 주머니에 편지를 구겨 넣고, 이모는 내 머리칼을 쓸어주다가 내가 잠든 틈을 타서 밤색 뾰족구두를 신고 기차를 타러 가겠지.
사랑하는 것들은 금방 사라진다. 그게 싫다. 먼저 떠나게 돼서 사랑하게 된 걸까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떠나게 되는 걸까.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엔 어쩐지 갈비뼈 부근이 시리다. 꼭 갈빗대 하나가 사라진 것 같다. 이브에게 늑골 하나 뽑아 건네주던 아담처럼 꼭 그렇다. 아담은 이브를 사랑했을까. 아담이 스스로를 경멸했다면 이브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꽤 만족스러웠던 거겠지? 이브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면 또 갈빗대를 뽑아냈을 테니까. 아닌가, 또 빼어내면 죽었으려나. 아담의 갈빗대 소동은 목숨을 건 기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 봤는데 아마 아담이 제 스스로 갈빗대를 뽑진 않았을 것이다. 외로움에 사무쳐 몸부림치던 그가 하느님을 찾아가서 종용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반려자를 만들어주지 않겠다면 갈빗대를 뽑아 자결하겠다는 심산으로. 그래서 하느님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이브를 만들어 준 것이다. 사실상 아담이 이브를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 목숨을 건 사랑이 대를 이어 내려간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갈비뼈 시린 날엔 소개팅이든 뭐든 해볼 요량이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외로움은 그런 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이런 구멍은 대체 왜 생겨난 것이며 왜 메꿔질 수 없는 것일까. 결혼을 하면 메꿔질 줄 알았다. 같은 공간에 똬리를 틀고 서로에게 속박돼 살아가면 채워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키우는 반려견이 외로워 보여서 한 마리를 더 데려왔는데 서로 핥아주고 장난치고 뛰노는 그런 모습은 없고 현실은 외로운 개 두 마리가 돼 버렸다고. 서글프지만 웃긴 그런 이야기. 난 이 얘기가 현실과 너무도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조금 낫겠다 싶은 건 외로운 두 존재 사이에 교집합이 많다면 순간순간의 외로움은 잊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외로우나 잘 맞는다면 공감하는 것 또한 많겠지. 그런 커플은 축복일 것이다. 물론 그것 또한 전부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나는 또다시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알기 때문에. 누군가를 옆에 붙여준들 결국 내 공간 밖으로 또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삐딱한 계절을 맞닥뜨릴 때 알아서 빠져준다면 모를까. 나는 주기적으로 계절을 만나게 되는 피곤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깨진 환상을 다시 붙이기란 불가능이다. 그건 마치 내게 깨진 백자를 테이프로 붙여달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나는 오로지 나와 결혼하여 남은 생을 살아갈 거라고 다짐한다.
오늘 내리는 가을비는 겉보기엔 결연하지만 어쩐지 궁상맞은 구석이 있다고. 내가 궁상맞은 건 절대 아니라고 부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