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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양 Feb 27. 2024

의기소침해지네

내 처지에 대해 생각하니 문득 그랬다.


등록금 납부의 시간이 왔다. 지난 학기는 한 과목 최고점을 못 받았더니, 장학금을 못 받았다. 석사 마지막 학기인데, 스스로 학비를 낼 형편이 못 된다. 염치없지만 애초에 부모님께서 박사까지 지원해 줄 테니 열심히 하라고 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기 마련이다. 등록금은 올랐고, 아버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박사과정 꼭 해야 하는 거냐? 나는 괜찮은데 네 어미가 난리다. 그냥 학위만 따고 말 거면 하지 말라고, 돈/시간 낭비라고..."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다. 어머니께선 편찮으시다 보니 생각이 많이 바뀌셨다. 노후 자금도 걱정이실 테고, 스트레스받아가며 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냐고 여기시는 듯하다. 다 의미 없다고... 나이 먹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으면서 아직 제대로 자립하지 못한 못난 자식이라 송구스럽고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게 맞는 건가? 싶고, 후회는 없지만 기존의 삶에서 완전히 전향해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려니 모든 게 부담스럽다.  

이탈리아에서 같이 공부하던 선배는 얼마 전 귀국해서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원 학과장으로 임면 됐다. 회사에서 점심 식사 후 산책을 하다 겸사겸사 인사드릴 겸 형한테 연락을 했다. 좀 뜬금없긴 했는데, 형은 반갑게 맞아주면서 내 근황을 물었다.

"그냥 회사 다니고 애 보고 있죠."

그러다가 나는 박사과정에 관해 물었다.

"아는 교수님께서 타 대학 교수님 연결시켜 주신다고 하는데, 형 있는 학교도 한 번 알아보라고 하셔서, 제가 알아봐도 되는데, 한 번 여쭤봐요."


흔쾌히 알아봐 주겠다고 했는데, 통화 종료 후 괜히 뭔가 부탁하는 거 같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내 위치가 애매한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


올해 회사 임금 인상이 기대치에 못 미쳐, 이에 관해 사장님께 얘기를 하려고 하니, 돈 몇 푼에 아쉬운 소리 해야 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후에 학업 때문에 또 아쉬운 소리 할지 모르는데, 지금 급여 문제를 논하는 여러모로 좋지 않을 거 같아 와이프와 상의 후 마음을 접었다.


이것 외에도 신경 쓰이는 몇 가지 일이 겹치다 보니 왠지 모르게 가라앉았다.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감정에 대해 얘기하니, 유쾌하게 응원해 줬다.


"여보, 여보에겐 내가 있고 루아(아들)가 있잖아요. 그리고 우린 애초에 돈이 없었으니까, 그런 거에 의기소침해지지 말아요. 어깨 쫙 펴고,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요."


불쾌한 일이 몇 건 있었는데 그때도 와이프는 적극적으로 더 화를 내주며 내편을 들어줬다. 참 고맙고 고마웠다. 그래, 천천히 가자, 세상에 확실한 게 어디 있겠냐, 그저 지금 주어진 것들을 하나씩 쳐 내가면서 살아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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