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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Aug 07. 2024

취향

유화와 덧칠

작년 초봄 퇴직을 하고 바로 브런치스토리와 티스토리를 시작했다. 처음엔 둘의 특성도 모르고 덤빈 일이지만, 일 년 반이 지나는 사이 티스토리에 320편 정도의 글을 쓰며 애드센스 수입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었다. 브런치 스토리보다 티스토리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티스토리를 통해서 알거나, 알고 싶은 상식을 정리하기에 도움이 되고 그 대가로 달러가 들어오는 재미도 있다. 처음 우리 돈 이십만 원가량의 달러가 들어왔을 땐 환호성을 질렀다. 구글의 달러 지급 메일을 받았을 땐 마치 구글의 일원이 된 것인 양 호들갑을 떨었다. 그 결과가 탐탁지 않을 땐 "이것이야 말로 디지털 폐지 줍는 노인인 건가?" 하며 자조적인 소리를 냈다.


사진을 작품으로 만드는 굿즈사이트도 개설해 보는 일까지(물론! 아무런 수익이 없이 그저 재미!)하는 나를 두고 너무 부지런하게 산다거나 너무 열정적이라고들 한다.


타인의 그런 말들을 들으면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지 가끔 궁금해하게 된다.

열정적이라!

나에 대해 생각한다.


가까운 친구에 의하면 내가 의외의 면모를 지녔는데 그건 문학을 좋아하는 듯하면서도 아닌 듯하다는 거다. 과학과 SF관련 정보나 글을 더 찾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잔잔한 감성류의 영화보다는 범죄스릴러를 즐겨하는 것을 두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 미루어 짐작한다.

"어, 아닌데? 잔잔한 영화 '앙: 단팥 인생이야기'나 '퍼펙트 데이즈' 그런 부류도 좋아하잖아!"라고 대꾸를 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실이기도 하다. 같은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영화를 그녀가 즐겨하지 않아서 인것도 같다. 미국 드라마 시리즈 '브레이킹 배드'를 최애 드라마로 꼽는 걸 보면 친구의 해석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녀에 의하면 그건 내 또래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드라마라고 한다. 안 봐서 그럴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친구는 그러한 경향을 딱 잘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좀, 뭔가 좀 진한 거?"라고 표현했다.

최근, 인상적인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를 다시 보다가 좀 진한 거?라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좀 진한 것'은 나를 설명하는 수사일까?


자. 그럼 타인들로 들은 나의 특성표현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 진한 것을 좋아하는 취향!(강렬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까?)

녹터널 애니멀스 같은 영화가 끌리는 걸 보면 그렇다는 생각도 든다.


대학시절 조각을 전공하던 친구가 작업실에서 스툴을 끌어다 앉으며 내게 한 짧은 말이 종종 떠오르고 잊히지 않는다. 그 말은 나를 규정하는 많은 특성 중에 하나가 되었다. 되새김질을 통해 나의 일부가 되어간 느낌이다.

" 너 그거 알어? 너는 모든 말을 독백하듯 한다."

"그래? 잘 몰랐는데."하고 다른 말로 화제가 바뀌긴 했지만 그 말은 어찌 됐던 타인이 나를 규정한 특성 중 하나였으며 가장 처음이자 오랜 표현이다.

둘째, 말을 독백적으로 한다. 독백!


티스토리에 글을 쓰다가 발견한 나의 특성이 한 가지 있다. 항상  일정한 문체를 사용하지 않고 두 가지 방법을 쓴다. 어느 땐 일기처럼 독백체로 쓰고 어느 땐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듯 존댓말을 사용하여 글을 쓴다. 그 둘이 일정하지 않고 번갈아 사용되는데 반말과 존댓말은 크게 다른 형태를 하고 있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느낌, 누군가를 앞에 둔 상상으로 말을 건다는 느낌은 여전히 같다. 그렇다면

셋째, 말 걸기 혹은 대화를 좋아함!


그에 비해 브런치에 쓰는 글은 일정한 편이다. 독백이며 현재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다. 여행을 다니며 기록하는 글도 늘 현재형이다. 늦은 밤 호텔에서 그날의 여정을 정리할 때 몇 시간 전 아침 발걸음도 '갔었다' 보다 '간다'로 서술하기를 좋아한다. 현재형이라야 더 생생한 묘사가 가능해서일까? 마치 그곳을 서성이는 나를 그림으로 그려내듯 기억을 현실로 치환하여 서술하는 버릇이 있다. 그렇다면

넷째, 현재형!


사람의 취향은 스무 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으며 팔십까지 간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유화로 작품을 완성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수정하거나 덧입히는 과정은 수 없이 일어나도 같은 도구를 꾸준히 사용하는 한계가 매우 유사한 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작품 속 대상, 주색이 갖는 톤이나 붓터치까지 결정되면 앞에 있는 캔버스가 담고있는 느낌이 쉬이 바뀌지 않는다. 자신을 설명하고 규정하는 많은 수사들은 결국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단어 하나하나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잇는 이 느낌! 내가 특정 단어에 갇힌 느낌도 그래서 생긴다.


친구의 말에 느닷없이 나를 규정하는 특성들 혹은 표현들의 공통점을 추려보았다.

며칠 후에 나는 다시 덧칠로 몇몇 특성들을 바꾸거나 더하거나 또는 일체를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캔버스 위에서처럼 말이다.


열정적 혹은 진한 것(혹은 강렬한 것), 독백과 수줍은 말 걸기, 현재형이란 단어들은 나라는 사람 안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그것들을 구속하는 건지 내가 구속되어 있는 건지 늘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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