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기 싫어서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유튜브 영상을 뒤지다 눈이 번쩍 띄었다. 그래도 돼. 조용필 이름보다 영화 ‘괴물’의 한 장면이 삽입된 뮤직비디오에 흥미를 느껴서 보게 됐다. 가왕 조용필은 이제 믿어보라고. 자신을 믿어 보라고. 지금이라고 그때가.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이쯤에서 쉬어가도 되지 않냐고. 그래도 된다고. 늦어도 된다고 새로운 시작 비바람에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노랫말에 이끌려 몇 번이고 보고 또 보고 조용필의 20집의 전곡을 다 들었다.
그의 진한 삶은 신문으로 방송으로 떠들썩하게 알려졌었다. 그 삶의 아픔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노래가 대신 얘기해 줬다. 왜라는 가사는 그의 깊은 사랑과 그 사랑을 잃은 절규 같았다. 한평생 이렇게 뜨거운 사랑이 남아있다면 그런 감정을 선물해 준 인생이 축복일 거 같다. 내 삶에는 아직 그런 깊고 애절한 사랑이 남아 있지 않다.
온몸으로 노래한다고 할까? 당신의 한평생을 담은 거 같다. 그 노래를 듣던 날은 75세의 김수미 씨가 영면한 날이었다. 75세의 조용필 씨는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로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얘기했다. 어떻게 이런 감성과 이런 목소리로 여전히 노래할 수 있는지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진다. 그 목소리 앞에 내가 어린아이가 된다. 나이 들었다고 몸이 어제와 다르다고 늘어지기만 하던 마음과 몸이 부끄럽다.
십 년 만에 낸다는데 그분의 노래는 더 젊어있었다. 바운스에서 받았던 충격보다 크다. 가사말이 내 전체를 흔들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75세가 전하는 '그래도 돼'는 진짜 그래도 된다는 울림이 있다. 진짜 나를 토닥이면서 위로하는 거 같다. 이삼십 대가 전하는 위로가 얄팍하게 느껴진다. 삶의 고통을 노래로 이기고 버텨온 인생이 전하는 위로는 백 년 이상 묵은 위스키처럼 진하다. 묵직하지만 무겁지 않고 경쾌한 리듬이지만 가볍지 않다.
드럼을 취미로 배우는 아들에게 노래 영상을 공유했다. 아들은 듣지 않았다고 했다. 정말 좋아.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는 가수라고 이번 노래 너무 좋다고 들어보라고 했더니 아들이 나보고 늙어서 좋아진 거란다. 나는 조용필이라는 가수에 취했던 적이 없었다. 겉멋 들린 사춘기에 팝송에 흠뻑 빠져서는 에어 서플라이와 스웨덴 그룹인 ABBA에 빠져서 헤드폰을 귀에 꽂고 살았다. 요즘 애들이 귀에 에어팟을 늘 꽂고 있듯 나도 중고등학생 때는 헤드폰을 끼고 뒷 주머니에 워크맨을 꽂고 한 몸이 돼 살았다. 라붐이라는 영화에서 80년대 청순의 대명사였던 소피마르소에게 남자친구가 씌워준 그런 헤드폰을 늘 머리에 차고 있었다. 헤드폰의 주황색 스펀지가 닳아서 삭고 헤드폰에서 귀에 쏙 들어가는 이어폰으로 바뀌었어도 노래는 늘 변함없이 팝송만을 들었다. 위대한 탄생의 조용필에 세상이 온통 들썩일 때도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공감하지 못했다.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전국을 강타하고 영화를 찍을 때 나는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관을 하시는 중학 동창의 아버지 덕분에 그 친구와 종종 잘 안 팔리는 영화를 보러 갔고 그중의 하나가 조용필의 영화였다.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주연배우가 조용필이었다. '단발머리'라는 노래에 흠뻑 빠졌던 아버지는 조용필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오래도록 얘기했다. 당시 노래와는 다른 음색과 리듬에 흥미를 느끼셨다. 친한 친구들이 조용필에 열광할 때 한 번도 그의 노래를 귀담아들은 적이 없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 제목에 희한하다는 생각만 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린다며 읊조리는 그이의 말에 별반 감흥이 따르지 않았다. 내가 나이가 들어 그이를 이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킬리만자로에서 세렝게티까지 그는 노래했고 20집을 발표한 자리에서 그는 힘이 닿는 한 부르겠다고 봐 달라고 했다. 조용필은 가왕이라는 대명사다. 가왕은 힘이 세다. 그의 노랫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것은 그가 가진 힘이다. 쉽게 부르지 않았고 끝없이 노래하고 새로운 도전을 향해 쉬지 않고 연습하고 달려온 인생이어서 힘이 센 노랫말이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길이 어딜 찾아가고 있는지.
까마득히 멀어지는 날들 행여 낯선 곳은 아닐지.
어느새 차가운 시선에 간직한 다짐을 놓쳐!
그래도 내 마음은 떠나지 못한 채 아쉬워.
이 길에 힘이 겨워도 또 안 된다고 말해도
이제는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차오르는 숨을 쏟아내도 떠밀려서 가진 않았지.
내 어깨 위를 누른 삶의 무게 그 또한 나의 선택이었어.
어느새 차가운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외침!
처음에 가졌던 마음은 그대로 일렁이는데 두 팔을 크게 펼쳐. 더 망설이지 않게.
...............
이제는 믿어. 믿어 믿어봐. 자신을 믿어 믿어봐.
지금이야, 그때.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이쯤에서 쉬어가도 되잖아.
그래도 돼, 늦어도 돼.
새로운 시작 비바람에,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