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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 Apr 20. 2023

8. 정신 차리고 보니 활동가

얼레벌레 어리바리 인턴청년 활동가가 되었다


광주광역시 공식 로고.


  광주광역시에는 청년 정책으로 꽤나 좋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고 3N년을 살아온 덕분에 혜택을 하나 보고 있는 중이다. 소위 '일경험드림+' 청년정책이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광주광역시의 주최로 기업/단체에 청년인턴을 파견을 보낸다. 물론 인건비는 광주광역시가 대부분 부담한다. 기업/단체로서는 무료 노동력을 하나 얻을 수 있고, 청년으로서는 돈과 경력이 필요하니까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건너건너 듣기로는 청년보다 기업이 더 선호하는 정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백수가 된 이후로 해당 정책을 기웃대던 중이었다. 시급 1만 1천원, 주 25시간, 세전 150의 월급.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일하기에 적당한 곳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여차저차, 얼레벌레, 이래저래, 좋게 봐주신 단체에서 나와 일을 해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광주인권지기활짝'이라는 단체였는데, 이전에도 으로 종종 연이 닿았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고백컨데, 이 단체에서 '내가'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간단하다.

  시민단체 자금사정이야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내가 일하고 싶다고 해도 단체 여건상 상근직을 뽑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닐 것 같았다. 비영리로 인권운동을 한다는 건 대체로 팍팍하기 그지 없었으므로. 헌데 그 단체가 일경험드림+로 사람을 뽑는다니? 이건 당장 해야 했다. 광주광역시의 돈으로 시청을 규탄하는 인권운동을 하기 딱 좋은 구조였다. 






  아무튼 일하게 된지 1달 반이 지났다. 내 계약은 5개월이기 때문에, 아마도 올해 7월까지만 확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 그 이후는? 나도 모르겠다. 광주시 정책의 은총을 더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야 하다지만,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갈 확률이라고 들었으므로, 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닥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활동가가 되려고 그 방법을 궁금해 하는 이들도 이 글을 읽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다.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의 인권이라던지.


  물론 지금 일하고 있는 광주인권지기활짝은 굉장한 예외 집단이라는 것을 미리 말하고 싶다. 구성원은 4명, 비장애와 장애, 앨라이와 퀴어, 여성과 남성, 중년과 청년이 한데 어우러져 교차되는 특이한 집단이다. 내부에선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느라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일상이고, 그래서 딱히 위계질서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모든 집단에 대한 내부 평가는 약 3개월이 지난 후에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하다. 지금은 어쩌면 콩깍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 그러니까 애진작에 '활동가'로 활동하는 동년의 청년 친구들을 보며 항상 생각했다. 저들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자신의 청춘과 시간, 돈을 갈아가며 일을 하는 걸까? 활동가가 된다는 건 자기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연대가 필요한 사업과 기자회견, 행사는 끝도 없이 나타나고, 때로 후원 요청도 빗발친다. 사실상 품앗이에 가까운 돈이 오가는 것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주머니 네 주머니 채워주려 빈 지갑을 열어야 하는 걸까. 게다가 80년90년 민주화/노동/통일운동을 해오셨으나, 근래의 인권운동 갈래에는 모르쇠거나, 퀴어나 페미니즘 이슈에 '중립'을 지키시는 -꼰-을 마주할 때마다, 속에서 올라오는 쓴물을 삼켜야 한다. 게다가 그들이 내 상사다! 인권을 지키기 위해 갔던 곳에서 내 인권이 박살나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나에게도 끔찍하고 소박하고 일상적인 활동가의 일화 하나가 있다. 활동가가 되고 싶어 대학교 졸업을 하고 NGO 구인공고를 두리번 거리던 때였다. 어느 서울 모처에 유명한 인권단체에서 면접을 불렀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속버스에 올랐다.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내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받고 싶은 희망 월급과 관심사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순진무구했다.


  월 150만원, 노동운동, 페미니즘, 퀴어운동.


 물론 그때도 월 150만원만 받아서 살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루한 사무실을 보건데 사정이 좋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퀴어 운동을 딱히 퀴어 인권 단체에서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치 않았다. 소위 '인권단체'라고 이름나 있는 곳이라면, 다양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제를 다루는 게 맞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면접자는 내 서류를 보더니 대뜸 말했다.


월 150 가지고 살 수 있겠어요? 퀴어 당사자라고요?
그럼 퀴어 운동 단체로 갈 것이지 여긴 왜 왔어요? 


  비웃음이 역력한 말투였다. 심지어 내 말을 툭툭 잘라먹으며 무시하곤 대충 면접을 마무리지었다. 나는 허망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광주에서 서울이면 장장 편도버스로 4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나는 그 면접 하나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었다. 면접비 1원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낯선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하면서까지 진솔하게 응하고 싶었던 면접에서, 내 인격이 깡그리 무시되었던 감각을 느끼며 펑펑 울었다.






작년 광주퀴어문화주간 당시 광주인권지기활짝의 활동가가 발언하는 모습.


  아무튼, 대학교 졸업 이후 인권 활동을 하고 싶어하던 나는 약 N년이 지나 결국 활동가로 발돋움했다.


  활짝이 하고 있는 일들은 많다. 인권 교육을 하고, 각종 의제에 연대 활동을 하고, 인권 행사를 개최한다. 나는 그 중에서도 '퀴어운동'을 담당할 수 있었다. 덕분에 '퀴어서점'이라는 광주시민방송의 DJ도 하고 있고, 다양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차별표현 모니터링 사업을 보조하고, 다양한 퀴어 행사도 꿈꾸고 기획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걸 모두 하기엔 너무도 짧은 5개월이겠지만.


 배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배워서 좋은 활동가로 자리매김하리라. 나는 최대한 재미있게 활동할 것이다.

 게다가 브런치에서도 활짝을 통해 배운 걸 전파하려 하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같이 사회를 고민하다보면 누구 코털이라도 간질일 뾰족한 수라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또 오겠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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