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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욱 Jun 01. 2023

55세 인생의 길목에서 나를 돌아보다

1. 프롤로그(Prologue)


인생을 살아가며 특정 시점에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고 지난 시간을 성찰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같은 과정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도승, 수녀, 목사님, 신부님 같은 성직자들 외에 일반인들이 이 같은 행위를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직장에서는 주간, 월간, 연간단위로 사업과 회계집행에 대한 결산을 실시하고 그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신상필벌 원칙을 적용한다. 거의 모든 조직에서 예외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는 이런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상당수 필부들은 지난 시간을 성찰하고 평가하려는 시도에 인색하다.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내비게이션 없는 돛 단 배처럼, 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인생을 맡긴 채 인생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모른 채 무작정 사는 인생들이 많아 보인다. 얼마 전 생일이 지났으니 한국 나이로 55세가 되었다. 문득, 학교졸업하고, 취업하며, 결혼과 육아, 직장생활, 사회생활하면서 나는 무엇하며 살았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긍금해졌다. 지난 세월들을 진지하게 성찰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100세 인생, 노년을 준비하는 인생의 길목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작업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곧 다가올 제2의 인생을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차원에서 55년 인생을 성찰하고 그 기록을 글로 남기고자 한다.      


2. 1968년 출생, 내향적 아버지와 외향적 어머니의 갈등


내가 세상에 태어난 1960년대 후반은 빈곤의 시대였다. 트로트 가수 진성의 히트곡 "보릿고개" 배경이 되는 시대였다. 아버지는 형광등을 제조하는 전기회사 노동자로 근무하며 정년까지 성실히 근무하셨지만 4명의 가족을 건사하기에는 경제적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아니 부족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무학인 아버지는 결혼 전부터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셨지만 인간관계 등 사회성은 부족하셨다. 술, 도박, 여자 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본인의 무학을 노출하기 꺼려하셨고 자존심이 매우 강하신 분이었다. 특히,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셨다. 평소 조용하시다가 명절 때 서울 큰 집에 가족이 모일 때나, 의왕시 산소에 성묘로 가족이 모이면 아버지는 늘 안 하던 술을 입에 대시고 갑자기 가부장적 태세로 돌변하며 어머니를 핍박하는 모습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한편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의 행태를 참기 어려웠지만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애들 둘 낳고 가정을 꾸려보니 그때 당시 아버지의 돌발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2021년 코로나 시국에 아버지 천국 떠나시기 전까지는 20년 이상 매년 아버지와 전국 휴양지를 유람 다니며 좋은 곳 보고 맛난 거 먹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기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많이 사라졌다.   

반면, 어머니도 무학이지만 아버지와는 다르게 사교성과 사회성이 뛰어나셨다. 미인이시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손발 벗고 도와주는 봉사정신으로 적십자, 부녀회 등 각종 봉사단체에서 수차례 표창을 받으실 만큼 사회활동에 대한 에너지가 강렬한 분이시다. 75세까지 화성시청 '노노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실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은 젊은이들보다 뜨거웠다. 아버지의 직장월급으로는 4 가족이 먹고살기 부족하여 결혼 후 줄곧 동네 전자제품 조립공장에서 일하시며 가계경제를 도우셨다. 운동회, 졸업식 등 학교행사에는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시고 항상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3. 경제적으로 부족했지만 순탄한 학창 시절


내가 태어나던 1968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북한의 남파간첩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파주시 문산읍으로 침투하여 김신조 1명이 생포되고 나머지 일당은 현장에서 사살된 사건이다. 물론 학교 사회시간에 배워서 알게 된 사건이다. 김신조 씨는 후에 기독교를 믿고 내가 다니던 교회에 간증하기 위해 오면서 우연히 만난 기억이 있다. 또한, 1979년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실장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서거하여 온 국민이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을 TV로 시청한 기억이 생생하다. 1980년 초등학교 6학년에는 빡빡이 전두환 아저씨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장면을 보았고,  프로레슬러 박치기왕 김일과 일본 이노끼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주인집 이코노 TV로 시청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수원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치열한 경쟁의 시대였다. 쪽지시험, 중간고사, 기말고사, 각종 평가 등으로 사람의 순위가 매겨지고 그 사람의 가치가 평가되는 시절이었다. 영화 친구에서 담임교사 김광규가 교실에서 불량학생 유오성에게 "너희 아버지 뭐 하시니?"라고 묻자 유오성이 "우리 아버지 장의사입니다"라고 답변하자 담임교사가 시계를 풀러 학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장면은 당시 고등학교의 현실을 리얼하게 표현하는 명장면이다.


당시 나는 수학을 정말 못했다. 아니 못한 정도가 아니라 수학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었다. 당연히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따라갈 수 없었고, 수학선생님은 "내가 너 대학 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막말까지 퍼부으셨다. 그 선생님의 막말이 동기부여가 되어서인지 재수를 해서 대학진학은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 그 선생님 손에 장을 지졌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당시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 학생들을 때리고 윽박지르고 체벌하며 강압적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성인이 되아서야 당시 상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치열한 경쟁의 먹이사슬 생태계에서 최고의 포식자가 되는 길은 SKY대학을 가는 것이고 최소 4년제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1960년대를 살아가는 모든 청춘들의 지상과제였다. 고등학교 학생들의 장래희망 조사에서 판사, 검사, 의사는 부동의 1위였다. 서울대 법과대학, 의과대학 졸업장은 출세의 보증수표였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패스는 사회적 신분의 수직적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제도적 수단이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저 사람을 이겨야 내가 살 수 있고 내가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었기에 누구도 그 희생을 값어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만 보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즈음인 1986년 12월 대학시험 학력고사에서 낙방하였다. 1987년 2월 수원의 명문 수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을 가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낙오자라는 비판을 감당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경제력도, 어머니의 정보력도 없는 나는 서울에 있는 재수학원을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당시 종로학원, 대성학원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최소 노량진에 있는 학원을 다녀야 서울에 있는 대학진학이 가능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경제적으로 의지 할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와는 대화가 안 되고 어머니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수원시에 있는 입시학원인 동양학원에 등록하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죽어라고 공부만 했다. 6월까지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10월경에는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고 집 근처 독서실에 등록했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독서실 책상에 앉아 책과 씨름했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지식은 아마 그 시절 공부해서 얻은 지식이 60% 이상일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1988년 수원 아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수학점수는 낙제였지만 영어와 암기과목의 선방으로 1년 재수 끝에 가까스로 합격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1988년 입학한 아주대학교 학내상황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이끌어낸 1987년 민주항쟁의 열기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등 국내외적 대형 이슈로 상당히 어수선하였다. "탁하고 책상을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 경찰이 쏜 최루탄에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사망한 이한열 열사 사건, 강경대 열사 쇠파이프 사망사건, 백골단 학교폭력 등 당시는 강의실에서 정상적으로 학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케케 한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고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돌덩이들로 학교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국가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목도하면서도 나는 거리에서 동료들과 더불어 가열하게 투쟁하기보다 공무원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행정학과에 진학한 목적도 고위 공무원이 되고자 함이었다. 어지러운 나라상황도 폭력이 나닌 법률과 제도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4. 고위직 공무원의 꿈을 꾸다


처음에는 용기를 내어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같이 고시공부를 시작한 동기들이 오랜 시험준비 끝에 중도 포기하자 나도 동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대신 학업에 집중하여 학점을 잘 받아 대기업에 취업해야겠다는 쪽으로 진로를 변경하였다. 한라그룹, 건영, 신도리코.. 여러 기업에 원서를 제출했다. 3년 동안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은 터라 운 좋게 4학년 2학기 학교재단 대우그룹 계열사인 경남기업에서 특채 제안이 왔다. 행정학과에서 유일하게 온 제안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1주일을 고민했다. 1993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이끄는 계열사는 출세의 보증수표였다. 그러나 이 회사를 입사하게 되면 공무원에 대한 꿈은 영원히 접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 시작했다. 편안한 현실을 택할 것인가? 고달픈 미래를 택할 것인가? 사느냐? 죽느냐? 고민하는 햄릿이 되어 직장선택의 기로에서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결론은 공무원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학교의 추천서를 포기하고 당해 9급 지방직(의왕시)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하였다. 잠시나마 고시 공부한 가닥은 있어서인지 어렵지 않게 합격하였다. 그렇게 1997년 6월 공무원으로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1997년 6월 공직 첫 부임지는 의왕시 내손2동사무소였다. 관내는 청계산과 전직대통령, 거물정치인, 재벌총수 등 유명인사들이 미결수 신분으로 구금되는 서울구치소가 있어 유명한 지역이었다. 맡은 업무는 주민등록, 인감, 전입신고 등 민원업무였다. 키 188에 몸무게 90킬로가 넘는 거구가 민원창구에서 등초본을 발급하고 있으려니 가오가 말이 아니었다. 9급 서기보 시절인 것으로 기억한다. 민원창구에서 일을 하는데 지역에 거주하는 대학 지도교수님께서 민원업무를 보기 위해 동사무소에 들르셨다. 얼굴을 피할 겨를이 없이 교수님 얼굴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진욱이 공무원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여기서 근무하는구나!"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교수님의 인사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었다. "네. 지난달 임용되어 근무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나를 생각하여  대우그룹 계열사를 추천했으나 가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표시한 것 같이 느껴져서 더욱 죄송한 마음이었다. 안 되겠다 여기서는 내 미래를 담보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으로 가야 승진도 빠르고 사회적 지위, 대외적 위상도 높아질 것 같은 판단이었다. 그럭저럭 동사무소에서 2년을 근무하고 8급으로 승진하여 의왕시청 환경녹지과로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5. 인생의 동반자, 아내를 만나다


1993년 대학을 졸업하고 4년여 기간 '구몬수학'으로 잘 알려진 학습지 회사 공문교육연구원(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1996년 아내를 처음 만났다. 둘째 처형과는 수원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처갓집 가족과는 에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도 둘째 처형을 만나기 위해 친구들과 익산 처갓집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둘째 처형은 내심 바로 밑의 여동생을 나와 엮어주려고 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러나 나는 여러 차례 멀찍이서 5남매 중 막내인 현재 아내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밭일을 마치고 몸빼바지에 리어카를 밀며 처갓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작고 왜소하지만 억새 보이는 시골 아낙의 모습이 찰나의 순간이지만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후 서울 세무서에 근무하는 큰 동서와 서울과 수원에서 만나며 아내 이야기를 자주 했다. 큰 동서도 내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큰 동서의 적극적인 중재로 아내와 나는 자주 만났으며 처갓집 식구들과도 허물없이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3시간 동안 수원과 익산을 오고 가는 연애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헤어지면 많이 보고 싶었다. 방법은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당시 핸드폰은 고가품이라 갓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핸드폰을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시 삐삐는 사양화 추세이고 수신은 안되고 발신만 가능한 '시티폰'이라는 전화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주저하지 않고 한화그룹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구입하였다. 직장인 동사무소에서, 퇴근하고 집에서 아내가 보고 싶을 때면 시티폰으로 1시간 이상 통화하였다. 1997년 당시 시티폰 요금이 10만 원 이상 나왔으니 시티폰은 우리 부부 사랑의 오작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회사일로 바쁠 때면 서대전역에서 만나기도 하고 아내가 수원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게 1년여 시간 수원과 익산을 오고 가며 사랑을 꽃피운 결과, 1998년 3월 가족과 친지들의 축하를 받으며 수원시 매교동 결혼회관에서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55년 인생 중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은 아내를 선택한 것이다. 25년을 살아보니 성격, 외모, 식습관, 성장환경.. 맞는 부분보다 안 맞는 부분이 훨씬 더 많지만, 만일 내가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 인생은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6. 경기도청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다


1999년 의왕시청에서의 생활도 난관에 봉착하였다. 공사장 비산먼지 신고, 특정공사 사전신고, 환경개선부담금 징수 등의 생활환경업무를 담당하였다. 환경업무지만 행정직이 수행하기에 난도가 높거나 복잡하며 크게 부담되지 않은 업무였다. 그런데 민원이 문제였다. 특히 환경개선부담금 관련 악성민원인들의 전화폭언과 협박 등은 30세 새내기 공무원이 감내하기 어려웠다. 혈기를 참지 못하고 민원인들과 다투는 일이 종종 있었고 시장 비서실에 호출당해 호되게 주의를 듣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평소에는 조용하다 화가 나면 불같이 화를 내며 자제하지 못하는 성격이 천국 가신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무원이 민원인을 피할 수는 없는 법. 고민이 깊어졌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 할까? 내가 죽든지, 민원인이 죽든지 사생결단을 내야 할 판이었다. 그때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직원 전입요청 공문이 시행되었다. 함께 근무하던 차석이 내게 한번 응시해 보라고 하였고, 나도 선관위는 민원인을 상대하지 않아서 직장 생활하기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경기도에서 전입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의왕시에서 직원들 대상 소양고사에서 3년 연속 1위를 하는 등 시험에는 자신 있었기에 전입시험에 구미가 당겼다. 도는 시와 같이 민원도 많지 않고 광역지자체이니 승진도 빠를 것이라 생각하였다. 대학 졸업 후 기업을 갈지, 공무원을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상황에 이어 2번째 선택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직장생활은 선거관리위원회가 좋다며 워라밸이 최고라는 선배, 승진과 행정업무를 제대로 배우려면 도청으로 가야 한다는 현실주의 선배.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의왕시청 인사팀장 호출이 왔다. 도청 추천서를 써줄 테니 도청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행정국장도 같은 말을 하였다. 경험이 많은 인사분야 전문가들의 조언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그렇게 2001년 12월, 8급 공무원인 나는 경기도공무원교육원으로 전입하는 데 성공하였고 2023년 6월 현재까지 총 22년을 경기도청 구내식당에서 영양만점 사내식을 먹으며 건강한 공직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경기도청 구청사

2001년 12월 경기도에 전입한 이후 많은 부서를 이동했다. 기획담당관(기획팀), 법무담당관(법제, 행정심판), 조사담당관(조사총괄), 감사총괄담당관(사전컨설팅 감사), 과학기술과(연구기반), 국제통상과(전시컨벤션), 환경안전관리과(환경보건), 광역환경관리사업소, 여성가족부(파견), 경기도의회(총무, 도시환경위).. 1개 부서에서 평균 2년을 근무했으며 감사관실은 총 6년 이상을 근무하였다. 중요하지 않은 업무부서가 단 1곳도 없었다.


특히 감사관실에서 근무한 6년여 기간은 공직생활의 프라이드를 오롯이 느낀 시간이었다. 공직자들의 비위행위를 감찰하고 비위사실을 적발하여 인사위원회에 징계요구를 하는 등 신분상 불이익을 주는 업무이기에 조금의 실수나 빈틈이 허용되지 않는 업무이다. 그만큼 직무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다. 같이 근무한 동료직원의 비위사실을 적발하여 법령절차에 따라 면직하고, 공직에서 배제하는 행정행위는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조사하여 파면한 00시 직원을 홈플러스 쇼핑 중 마주했을 때의 그 민망함이란... 정의감과 공명심 덕분인지 공직감찰 부문에서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을 2번 수상하였고 2015년 1월, 6급때는 박근혜 대통령 표창을 받는 영광의 순간도 있었다. 그때는 대통령 표창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곳저곳 술 사주고 기분 냈는데, 지금은 그냥 종이에 대통령 직인 찍혀있고 액자로 멋지게 장식하여 집 벽면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래도 인사기록카드를 볼때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부분이 표창 부분이다.


감사관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7급 시절 바이오산업, 나노산업 등 첨단산업을 담당할 때였다. 당시 경기도지사는 손학규 지사였고 영어마을 조성, IT, BT, NT 등 첨단미래산업 육성에 도정을 집중할 때였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 동물복제 연구 등으로 세계적 관심을 받은 시기였고 경기도는 황우석 교수와 협업 프로젝트를 추진하였으나 황우석 교수의 연구스캔들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현재 수원시 광교 중소기업지원센터 인근부지에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한 광교테크노밸리를 조성히기 위해 나노특화팹센터, 서울대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경기바이오센터, R&DB센터 등을 건립하여 경기도 수원시를 과학기술의 메카로 조성한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지금도 출장이나 여행 중 동수원 IC를 진출입할 때 우측에 보이는 첨단산업클러스터를 보면 그때 내가 뿌린 한알의 씨앗이 풍성한 열매가 되었다는 뿌듯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또한, 당시 경제투자실에 근무하면서 영국과 독일의 바이오산업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인생 처음으로 비행기 타고 해외출장을 갔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2017년 5월 드디어 공무원의 꽃이라는 5급 사무관으로 승진하였다. 1997년 6월에 공직에 입직했으니 거의 20년 만이다. 공직에 들어와서 6급까지 총 3번 승진했다. 그러나 5급 승진은 지금까지 승진과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인사발령장에 적힌 내 이름 "김진욱" 석자를 확인했을 때 세상을 다 얻은 희열감과 행복감. 나만의 세상이라는 환각에 잠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전북 완주에서 6주간의 사무관 교육은 이런 기분을 더욱 UP 시키기에 충분했다.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이 최고이고 당신들은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야! 이런 분위기로 연수원에서 6주를 교육받으니 업무로 위축되었던 어깨가 쭉쭉 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환각에서 깨는 것은 순간이었다.


6주 사무관 교육을 수료하고 자랑스러운 임용장을 받은 후 팀장보직을 받아서 현장에 바로 투입되었다. 사무관 승진 후 첫 보직은 국내 전시컨벤션산업의 메카 고양국제종합전시장(KINTEX)을 지원하고 관리감독하는 경기도 국제통상과 전시컨벤션팀장이었다. 당시 KINTEX 대표이사는 경제부총리와 민선 2기 경기도지사를 역임한 임창열 지사였다. 도청 근무시절에는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TV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위대한 분과 경기도를 대리하여 주주총회에 참석하여 각종 국제전시회 운영과  KINTEX 인도 뭄바이 전시장 건립 등을 논의하는 상황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임창열 사장님의 업무스타일은 황소처럼 세게 밀어 붙이는 불도저같았다. 때로 그분의 업무스타일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분의 업무스타일이 독특할 뿐 업무를 처리하는 열정과 뚝심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지금도 그때의 근무경험이 지금의 공직생활에 많은 자양분이 되고 있음을 감사하고 있다.


7. 퇴직을 5년 앞두고 미래를 고민하다


돌이켜보니 25년의 공직생활 숨 가쁘게 달려왔다. 2028년 6월. 내가 공직을 떠나는 날이다. 군 복무기간을 제외한 실근무기간은 총 31년이다. 공직관행 상 1년 먼저 공로연수를 가게 된다면 내가 직장에서 공직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을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4년이 조금 더 남았다. 부서 2번 옮기면 이제 공무원으로서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각종 의무와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연인이 되는 것이다. 현재는 공직을 떠나는 아쉬움보다 자연인으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감이 더 크지만 노후생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앞서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억 원 남짓한 퇴직수당과 월 250만 원의 연금으로 안정적인 노후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최소 70세까지는 현역으로 열심히 뛸 생각이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나는 아마도 퇴직 후에야 미래에 대한 설계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을 것 같다.


8. 에필로그(Epilogue)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며, 결혼하고, 자식 낳고, 부모님 봉양하고, 병들고... 그렇게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55년 살아보니 인생 별다른 거 없다. 절대권력자 진시황도 죽고, 삼성 이건희도 죽고, 애플 스티브잡스도 죽었다.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 2개 있다 세금과 죽음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삶을 뒤돌아보며 반성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냥 앞만 보고 달려왔고 그냥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삶이 의미가 없다. 흥미롭지도 않다. 요즘은 사람들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여행 가서 좋은 것 보며 맛있는 거 먹는 그런 소확행을 실천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55년 살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나의 삶을 돌아보며 기억에 남는 순간을 글로 남겨보았다. 나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고 가족, 직장, 친구들의 사회적 인간관계 설정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이 글을 60세 회갑 기념하여 책으로 볼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오길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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