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지는 건 난데, 무뎌지는 건 너네
어릴 때부터 나는 털이 많았다
팔, 다리 그리고 턱. 심지어 머리까지. 그때 화장실에 나란히 선 아버지가 면도하시는 모습이란. 흰 거품을 바르고 사각사각 깨끗하게 잘려나간 수염. 그리고 멀끔한 아버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수염이 나지 않았던 꼬마였던 나였지만 괜히 한번 면도기를 들었다 놨다 해보았다. 그 소리가. 그 냄새가 참 좋았다.
수북이 자란 수염
이제는 성인이고 수염이 자라고 머리는 빠지고 그랬다. 그러고 있다. 매일 아침 출근 전에 면도를 한다. 아들의 눈에 그리 보일지 모르겠지만 똑같이 흰 거품을 바르고 사각사각 깨끗하게 수염을 잘라나간다. 그리고 안 멀끔한 모습으로 출근을 한다. 얼굴이 다르다. 아쉽다.
날카로운 면도날
처음 면도를 시작했을 때 서툴러서 피가 나기 일쑤였다. 수십 번의 영광의 상처를 얻고 나서야 겨우 멀끔히 면도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이중날, 삼중날 이제는 오중날까지 날카로운 면도날에 개수를 더한다. 덕분에 면도기는 내 수염을 더 쉽게 베어 간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날카로운 사람이 있다. 아주 예리해서 주변인들을 베어나가지만 정작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도 날을 더해간다.
경도의 차이
면도날은 2주에서 4주 정도 주기로 바꾼다. 쇠로 만든 날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경도가 너무나도 다른 수염을 자르는데 쇠로 만든 면도날이 무뎌진다. 확실히 오래된 면도기를 써보면 잘린다는 느낌보다는 뜯긴다는 느낌이 난다. 아프다.
면도날처럼 예리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무른 사람이 있다. 툭 던진 한마디에 상처를 잘 받는 사람. 수 없이 반복된 상처에 무뎌질 법도 한데 쉽지가 않다.
면도날과는 다른 인간관계
날카로운 면도날이 수염을 베어가지만 오히려 무뎌지는 것은 면도날이다. 인간관계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순적인 상황.
갈등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모순적인 상황이 뒤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예리한 사람은 점점 무뎌져 주변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상처 투성이인 사람은 단단함으로 무장하여 상처받지 않도록. 모두가 같은 경도로 마주하도록. 베어 지지 않는 마음을 갖도록.
우리 무뎌지는 연습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