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자의 구례 짝사랑
나는 서울 토박이로서, 서울을 무척 사랑한다. 내로라하는 해외의 도시에 가도, ‘그래도 역시 서울만 한 곳은 없구먼.’하고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다. 하지만 이토록 팔불출처럼 서울을 사랑함에도 지칠 때마다 종종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지난가을처럼 말이다. 번 아웃에 허덕이고 있던 때였다. 친구와 여름에 함께 갔던 구례가 전 남자친구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홀린 듯 구례행 열차표를 결제하고 있었다.
구례의 밤은 어둡다. 버스 운행 횟수도 적거니와 막차는 황당할 정도로 이른 시간에 끊긴다. 서울 사람으로서 어디를 가든 당연히 밤이 깊어지면 도시는 네온사인으로 화려해지고, 버스는 시간을 맞추어 따박따박 오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오후 여덟 시에 구례역에 도착한 나는 홀로 망연자실하여 구례구역 앞에 서 있었다. 구례역에서 읍내로 가는 버스는 운행이 끝나있었다. 칠흑 같은 밤만이 어둠으로 모든 것을 삼킨 채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귀촌하세요. 삶이 정말 달라요.” 구례에는 유독 귀촌한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묵던 공유 숙소의 주인도 귀촌한 사람이었다. “새벽에는 별이 정말 많아요. 잠이 안 오시면 나가서 별도 보세요.” 그녀는 차를 내려주며 말했다. 서울에서 별을 본 적이 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꼭 오늘 밤에는 별을 봐야겠다.’ 다짐했지만, 포근하고 고요한 구례의 시골집에서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들었다. 오랫동안 앓던 불면증도 없었다.
구례 여행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다. 별을 보지 못하고 잠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방문하고자 했던 가게들이 열리는 요일과 운영 시간이 아주 제각각이었다. 맛집이라는 중식당은 정오가 되면 문을 닫았다. 그 때문에 위장 상태가 불량한 나 같은 사람도 아침 댓바람부터 짜장면을 먹어야 했다. 한 순댓국밥집은 지역의 명물임에도 불구하고 금요일에만 영업했다. 소품 샵은 주말에만, 빵집은 하루에 세 시간만 열고……. 서울에서처럼 당연히 열었을 거라는 생각에 가게에 찾아가면, 꼭 닫힌 가게의 문틈으로 형광등이 켜지지 않은 어둑한 실내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구례의 불편함은 모순적이게도 편안했다.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가게가 열려 있기만 하면 ‘문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먹으면 되었다. 택도 없이 짧은 가게 영업시간은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였구나.’ 하는 깨달음도 주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치열함을 동반한다.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은 퇴근하지 못한 직장인들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불빛 때문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24시간 편의점, 새벽 내내 운영하는 음식점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의 희생으로 서울은 밤이 사라진 도시가 된다.
산수유 축제를 보러 또다시 구례에 온 지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가뭄이 심각했기에,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섬진강의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단비다. 따라서 여행을 해야 하는데 비가 온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 하려 했던 대나무 숲길 걷기도 이렇게 비가 내리고 강풍이 부는 날에는 당연히 할 수 없다. 실내에서 하는 요가 수업을 들어볼까 했지만 일요일에 운영하는 요가 센터는 당연히 없다. 내가 가려고 벼르고 왔던 빵집도 당연히 열지 않았다. 구례는 역시 불편한 곳이다. 하지만 이런 구례의 불편함도 어쩐지 싫지만은 않다. 그래서 구례를, 불편해서 편안한 이 도시를 나는 자꾸만 찾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