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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Jul 04. 2024

파도 앞에서 파도 입기: 블루웨이브 가디건 (1)

마냥 웃긴 뜨개일지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뜨개인은 실 세일을 지나칠 수 없다. 실도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명절이나 기념일에 할인을 많이 하는 편인데, 단종 예정인 실의 경우 특히 큰 폭으로 할인한다. 물론 추가 구매할 수 없다는 치명적 단점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반값으로 파는 실을 보면 침 흘리며 장바구니에 담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침이 잔뜩 묻어 배송된 이번 실은 ‘히말라야 데님’이다. 퓨어 코튼 100%의 실로, 이름답게 흰 눈이 스프레이처럼 묻어있는 실이다. 4볼 묶음으로만 판매하는데, 무려 반값이니 두 묶음을 샀다. 할인하는 품목을 사면 돈을 아끼는 거니 이 정도는 괜찮다며 합리화했는데 결국 통장에서 빠져나간 건 원래 값이다. 조삼모사다.     



그래도 한 볼에 50g짜리 실이 8볼이나 있으니 든든하다. 보통은 뜨고 싶은 도안이 있으면 그에 어울리는 실을 찾는 편인데 이번엔 실이 먼저 생겨버렸다. 가볍고 얇은 면실이 눈앞에 있고 마침 날씨는 더워지니 이건 여름 카디건을 뜨라는 계시가 아닐까!     


내 뜨킷리스트 속에서 욕심을 담아 ‘블루웨이브 가디건’ 도안을 열었다. 차트 도안을 보는 게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원작과 게이지 차이가 꽤 나는 상태로 일단 시작했다. 이 옷은 뜨개인들 사이에서 굉장히 핫한 아이템이었는데, 파도가 치는 것처럼 물결무늬를 따라 구멍이 송송 뚫린 모양이 아주 매력적이다. 게다가 도안이 무료다!      


욕심 많은 햄스터를 본 적이 있는가. 햄스터는 다 먹지도 못할 해바라기 씨를 양 볼에 욱여넣고는 저만 아는 곳에다가 우르르 뱉어 보관하는 습성을 가졌는데, 내가 도안을 보관하는 방식이 이렇다. 언제 뜰지, 무슨 실로 뜰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일단 마음에 드는 도안이 있으면 고이고이 모아둔다. 참고로 모아놓은 수십 개의 도안 중 직접 뜬 건 단 3개에 불과하다.      


완성작을 3개에서 4개로 늘리려는 야심 찬 도전의식을 불태우려는데 다섯 단 만에 막힐 줄은 몰랐다. 줄글로 상세하게 적힌 글 도안과 달리 사각형에 기호로 쓰인 차트 도안은 어느 정도 스스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차트를 왼쪽에서 시작하는 건지, 오른쪽에서 시작하는 건지, 갑자기 늘어나거나 줄어든 코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헤맬 부분이 가득했다.      


우선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떠내려가는 탑-다운 형식인데, 분명 4단까지는 없던 코가 5단에서 아무렇지 않게 표시되어있다.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코를 늘려야 하는 건지 몰라 여러 뜨개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해당 도안을 먼저 떠본 선배들에게 조언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 (그냥 감아코로 늘려주면 된다고 했다)    

 

알음알음 떠내려가는데 소매 분리를 할 때쯤 또 이상한 걸 느꼈다. 작았다. 그냥 작은 것도 아니고 작아도 너무 작았다. 소매를 분리할 때가 됐다는 건 적어도 가슴 언저리까지는 떴다는 건데 아무리 몸에 가져다 대어도 길이가 한참 부족했다. 사료 많이 먹고 사랑 많이 받아 튼실해진 소형견에게 입히면 적당할 것 같은 사이즈다. 안타깝게도 나는 166cm에 몸집이 커다란 여성이므로 맞지 않을 것이 뻔했고 반려견을 키우고 있지도 않다. 주인 없는 옷을 뜨고 있던 거다.      


  


앞서 말한 내용 중 ‘게이지가 많이 다르다’는 복선이 있었다! 원작의 메리야스 게이지는 19코 19단. 내 실의 게이지는 19코 26단. 세로 길이에서 굉장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 소매를 분리하는 시점이 당연히 원작보다 많은 단수를 뜨고 난 후여야 했는데 일정 단수마다 반복되는 케이블 무늬를 계산하기 싫어 살짝 눈 좀 피했다고 이런 일이 일어난 거다.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넘어가면 꼭 나중에 더 큰 불상사로 돌아온다는 인생의 진리가 뜨개에서도 예외 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 불상사를 어떻게 했냐면, 그냥 또 모른 척 넘어갔다. 분명 시착 시 아기 옷 뺏어 입은 사람처럼 어깨며 팔이며 꽉 끼어 앞섶이 닿지도 않는 꼴을 봤으면서 그냥 이어서 뜨고 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모두 풀었다가 다시 떠야 할 앞길이 막막해서, 라고 답하겠지만 아마 진짜 이유는 아닐 것 같다. 은연중에 이 옷을 포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이렇게나 결함이 많은데, 일단 떠보고 괜찮으면 입고 아님 말아야지, 하는 적당한 생각으로 뜨고 있는 게 아닐까. 몸통을 끝내고 소매를 뜨며 든 생각이다.      


또 실패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건가 싶지만 우선 끝까지 떠봐야 아는 법이니 마지막까지 떠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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