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웃긴 뜨개일지
소아비만 출신에게 살은 저주다. 살을 뺀다는 건 저주를 물리치는 것 만큼 어렵고 힘들다는 거다. 사람의 몸은 기준이 되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어 ‘적정 체중’이 기준이라면 과식 한두 번 한다고 쉽게 살이 찌지 않는다. 반대로 기준이 ‘비만’이거나 ‘과체중’이라면 하루 이틀 굶는다고 쉽게 살이 빠지지 않는다.
보신탕집을 운영하던 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누구보다 든든한 끼니를 챙기며 자란 나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비만이었다. 할머니는 타이어 회사 마스코트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는 내 몸을 보고도 어릴 땐 잘 먹어야 한다며 모든 식사를 과잉 공급했다. 덕분인지 평균보다 조금 큰 키를 가졌지만 평균보다 훨씬 무거운 몸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별 의미는 없었다.
학창 시절 내내 과체중과 비만 사이를 오간 나는 어느 반에나 한 명쯤 있는 ‘뚱뚱하고 착한 애’ 포지션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체중에 대한 어떤 생각도 안 하다가 고등학교를 올라가며 몇 번 다이어트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거나 감량했다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폭식으로 단련된 위가 갑자기 줄어들 리도 없었고 내 몸이 과체중을 기준으로 항상성을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나에 대해 설명할 때면 항상 ‘통통’이라거나 ‘살집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필수로 붙었고 언제부턴가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살찐 게 잘못한 건 아니지만 그냥 듣기 싫었다. 그래서 입시를 거쳐 스물셋까지 날씬하진 않아도 적정 체중인, 만족스러운 몸을 유지했다. 연애가 반년 만에 없애버린 몸이긴 했지만.
삼 년 동안 운동과 식단으로 유지한 몸이 고작 6개월 만에 망가지다니! 술과 기름진 음식을 맛있게 먹긴 했다. 운동할 시간에 데이트하느라 바빴고 제대로 자지도 않고 밤새 통화도 했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5kg, 일 년 만에 17kg이 쪘다. 배와 팔뚝에는 튼 자국이 가득했고 맞는 옷이 없어 전부 새로 샀다. 그나마도 정확한 사이즈 측정이 무서워 눈대중으로 사느라 대부분은 작게 사 억지로 몸을 구겨 넣으며 입었다.
그래도 예쁘다고 해주던 연인에게 차이고 나니 허망할 정도로 입맛이 없었다. 그동안 해왔던 다이어트는 전혀 노력한 게 아니라고 말하듯 살이 쭉쭉 빠졌다. 이 살들이 다 행복이었나, 싶을 만큼 쉬운 일이었다. 어디선가 최고의 다이어트 방법은 이별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렇게 헤어지고 일 년. 12kg이 빠졌다. 건강하게 뺐다고는 못하겠다. 건강하게 식단을 조절하지도 운동을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사이즈는 줄었으나 아마 인바디 점수를 측정하면 반타작도 못 맞지 않을까 싶다. 살이 빠졌어도 한 번 생긴 튼 자국은 흉터처럼 남아 지워지지 않았고 아직도 누군가 날 비방하는 말을 하면 내가 뚱뚱해서, 라고 생각한다. (비방의 이유와 목적이 내 외모와 전혀 상관없음에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내가 날 좋아하지 않으니 누가 날 좋아할까. 나부터 날 사랑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내 콤플렉스를 확 드러내 보면 어떨까, 하는 나답지 않은 방안을 냈다. 가리는 데에는 자신 있어도 드러내는 건 고역인데.
하체에 비해 비대한 상체가 가장 큰 콤플렉스니 과감히 팔뚝을 드러내 보기로 한다. 당장 실을 가져와 내 생에 첫 민소매를 뜨기 시작했다. 도안 사이트 검색 필터에 민소매를 설정해두면 수천 개의 도안이 나온다. 그중 내가 고른 건 spiced breeze. 예시 사진에 저마다 다른 몸매로 이 옷을 입고는 환하게 웃고 있는 여성들의 표정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
피그먼트울 2번 색상(수련)을 사용했고 5mm (고무단은 4.5mm) 바늘을 사용했다. 사진 상으로는 조금 밝아 보일 수 있는데, 모네의 그림 '수련'에서 영감을 받은 만큼 정말 예쁜 색이다. 사이즈 표도 몇 번이나 확인했고 스와치로 세탁 후 수축 여부까지 확인했는데도 뜨는 내내 불안했다. 완성본이 너무 작을까 봐. 기껏 열심히 떠놓고 못 입을까 봐.
몸통 밑단부터 마지막 어깨끈까지 너무 빨리 떴다. 평면뜨기, 가터뜨기, 고무뜨기 정도만 알고 있다면 특별한 무늬가 없으니 아주 쉽게 뜰 수 있는 도안이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그간 연마한 뜨개 속도가 반갑지 않을 때가 있다니. 아직 이걸 입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실 정리를 남겨두고 며칠간 방치했다. 시간이 지나도 마음은 준비될 기미가 없었으므로 그냥 눈 꼭 감고 입기로 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이지. 작을까 봐 걱정하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오히려 넉넉했다! 기뻤다. 마냥 가리려고만 했던 팔뚝도 어쩐지 괜찮아 보였다.
한동안 몸무게는 계속 동일했으니 아마 옷을 만드는 동안 갑자기 팔뚝 둘레가 줄었을 리 없지만, 기분 탓인들 어떠냐. 내가 내 몸에 기쁜 감정을 느끼는 게 얼마만 인지. 일단 이번엔 이 정도면 됐다. 이렇게 날 위한 옷을 만들며 뜨개를 하며 당분간 조금 더 날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