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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람 Jul 12. 2023

6. 미국에서 아이들 학교 보내기 (2)

-눈물겨운 미국 학교 적응기

사실 영어보다 걱정인 건...

미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아이들은 등교를 시작했다. 미국 나이로 9살인 첫째는 4th grade, 6살인 둘째는 kindergarten에 속했다.

서툰 영어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 더 걱정인 건 두 아이의 성향이었다. 내향형인 I형 부모를 닮아, 두 아이 모두 사교적이지 않고, 조용한 I형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 못해도, 사교적인 아이들은 바디 랭귀지를 써서라도 아이들하고 금방 친해진다는데. 우리 아이들은 아는 영어가 있어도 수줍어서 입 밖으로 꺼내질 못하는 성격이다. 그런 아이들이 활달하고 적극적인 미국 아이들 사이에서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사실 영어보다도 이게 더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이들 앞에선 내색할 수 없었다.

오히려 미국 학교도 재밌을 거라고, 친구들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애써 다독이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수밖에.


떨리는 첫 등교, 그리고...


처음 학교를 가던 날. 마치 내가 입학하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이들 손을 꼭 잡았다. 학교 오피스에 들어가 아이들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었더니 두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각자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셨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있는 동안 나 역시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영어가 서툰 아이들이 수업은 잘 들을지, 친구들과 의사소통은 어떻게 할지. 걱정되고 궁금하고 초조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러 하교 시간, 다시 만난 아이들은 생각보다 잘 지낸 듯 보였다.


선생님은 친절하셨고, 영어가 서툰 아이들을 위해 한국인 친구들을 소개해 주고 학교 생활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고 했다.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첫 등교는 그렇게 어리둥절한 상태로 시작을 했지만,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다.


첫째는 그나마 같은 반 교실에 있는 한국인 친구들을 의지하며 비교적 수월하게 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둘째는 달랐다. 셋째 날까지는 그럭저럭 잘 가는가 싶더니, 넷째 날부터는 엄마와 떨어져 혼자 교실까지 들어가기 싫다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서 실랑이를 하다 보면 매번  8시 10분 등교 시간을 지나쳤다. 등교시간이 지나면 출입문으로 들어갈 수 없고, 오피스에 들러 아이 이름을 적고 아이만 교실로 들여보내야 했다. 그때부터는 둘째는 아예 엄마 옷을 붙들고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학교가 떠나가라 울음을 터트렸고 보다 못한 선생님들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 후로도 일주일은,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다.

집에서부터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둘째를 어르고 달래서 교문 앞까지 데리고 가면, 그 앞에서 아예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기를 반복했다.

같은 반 친구가 와서 얘기를 하고, 선생님들이 와서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어도 막무가내였다.

엄마 옷을 붙들고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

그러면 나도 그만 마음이 약해져,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그냥 집으로 데려오고만 싶어졌다.


아이 옆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선생님이 급기야 나를 향해 단호한 말투로 'get out'!이라고 하셨다.

아이의 울음 앞에 내 마음이 약해져 있는 걸 알아차린 듯, 차갑고 냉정했다.

아이를 어떻게든 학교에 보내야 할 엄마가 집에 데려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선생님 입장에서는 답답해 보였으리라.


지금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때는 냉정하기만 한 선생님이 괜히 원망스럽고, 우는 아이를 학교에 남겨둔 채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내가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엄마보다 강하다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담임 선생님을 만나 부탁을 드리고 싶지만, 그러기엔 내 영어 실력이 지나치게 형편없었다.

아이를 미국 학교에 보내려면 엄마의 영어실력이 중요하다는데. 이럴 때를 대비해서였나 보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눈물을 머금고 둘째 담임 선생님께 번역기를 돌려가며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에 만나자는 답장을 보내왔고, 그렇게 처음 담임 선생님과 일대일 만남을 가졌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지만, 내 짧은 영어 실력으로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아이가 많이 힘들어한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시면 고맙겠다는 말 밖에..


그러자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찍은 아이 사진을 보여주며, 걱정과 달리 학교에선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을 시켜주셨다. 그리고 엄마와 떨어져 교실까지 혼자 걸어 들어가는 걸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서 다음 날은 기꺼이 교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주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으셨다.


그렇게, 다음 날 둘째는 교문 앞까지 마중 나온 선생님 손을 잡은 채 눈물을 보이지 않고 등교를 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 초등학교라고는 가본 적도 없는 아이가, 낯선 미국에서 첫 학교생활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고 낯설고 긴장이 됐을까. 아이들을 위해 온 미국이지만, 괜히 부모의 욕심인가 싶어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적응해 가는 아이들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온 둘째가 갑자기 엄마 사진을 가방에 넣어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학교에서 엄마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보려고 그런단다.


문득, 둘째가 처음 유치원에 갈 때가 생각났다.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음이 많은 둘째는 유치원 적응도 쉽지 않았다. 유치원 차량을 태워 보내기 힘들어 유모차에 태워서 등하원을 시켜야 했고, 유치원 문 앞에서도 엄마랑 떨어질 때마다 눈물을 보이곤 했었다.


엄마랑 떨어지기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 이름표 뒤에 엄마 사진을 붙여주는 거였다.

사진을 붙여주며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 유치원에 있는 동안 엄마랑 비록 떨어져 있지만 엄마 마음은 늘 함께 있어. 엄마 생각날 때마다 엄마 사진 봐줘. 그러면 엄마도 우리 아기 생각할게.


그때 그렇게 이름표 뒤에 붙여준 엄마 사진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미국 학교에서도 문득 엄마 사진이 생각난 걸 보면.


아이 말을 듣고는 당장 핸드폰에서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서 프린터로 출력을 한 다음 구겨지지 않게 케이스에 넣어서 아이 가방에 넣어주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엄마는 항상 함께 있다는 말과 함께.


다음날부터 아이는, 엄마 사진을 주머니에 꼭 쥐고 혼자서 교문을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 힘들거나 엄마 생각이 날 때마다 사진을 꺼내본다고 했다. 세 번, 두 번, 한 번, 사진을 꺼내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떤 날은 친구들과 노느라 엄마 사진을 꺼내볼 시간도 없었다며 웃기도 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찡했다. 이 쪼그만 아이도 자기만의 방식대로 적응해 가려 애쓰는구나, 싶어서.


아이들의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방식대로 자란다. 부모는 그저 곁에서 함께 마음을 보태고, 묵묵히 기다려줄 뿐. 시간이 지나고 보면, 늘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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