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ii에서 행복을 만나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남편이 아픈 이후로, 우리 부부에게는 '건강'이 일 순위가 되었다. 그동안 일하랴, 아이들 키우랴, 건강은 늘 뒷전이었던 우리였다.
미국 오기 전 3여 년 간의 내 일상은 이랬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방송원고를 쓰고(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새벽뿐이었다),
부랴부랴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고 등교를 시킨 뒤에 방송국에 출근을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아침 생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면 오전 11시 30분. 집에 돌아와서 간단히 어질러진 집안을 청소하고 점심을 챙겨 먹고 나면 어느덧 첫째가 학교를 마칠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온 첫째의 간식을 챙겨주고, 숙제를 도와주고, 학원을 데려다주고 나면 곧 둘째가 탄 유치원 버스가 도착할 시간. 하원한 둘째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면 숨돌림틈도 없이 또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퇴근한 남편과 저녁을 먹고 나면 아이들을 씻겨서 재우기 바빴고, 새벽부터 일어나 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아이들을 재우면서 함께 잠드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남편 역시, 내가 방송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손수 아침식사를 준비할 만큼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퇴근 후에는 특별한 모임이 없는 한 곧바로 집으로 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집안일이든 육아든, 함께 손을 보탰다. 그러다 나와 아이들이 잠이 든 저녁 시간이면 조용히 TV를 틀어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게 남편의 유익한 낙이었다.
일과 육아, 가정에 충실했을 뿐인데. 시간을 분단위로 촘촘히 써도, 늘 시간이 부족하던 날들이었다.
그런 일상에, 운동이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신랑이 한번 크게 아프고 난 뒤 우리는 '건강'의 소중함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우리가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걸..
이제 우리도 더 이상 젊기만 한 나이가 아니라는 걸
피부로 느꼈다.
어쩌면 미국에서의 1년이라는 시간이, 우리가 그동안 놓쳐온 '건강'을 돌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날부터 우리 부부는, 매일 하루 만보 이상 걷기를 시작했다.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바인의 환경
막상 걷기를 시작해 보니, 어바인은 걷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조성된 산책로를 Trail 이라고 하는데, 우리 집 주변에만 코스가 다른 Trail이 2개나 된다. 가벼운 차림에 운동화만 챙겨 신으면, 누구든 언제든 운동을 할 수가 있다.
매일 걷는 Trail 코스가 지겹다면, 동네에서 얼마 멀지 않은 Trail을 찾아 걸어도 좋다.
구글 지도를 켜고 Trail을 검색하면 동네에서 2,30분 거리에 경치도 좋고, 아름다운 산책 코스들이 수십 개가 뜬다. 그중에는 낮은 산이나 숲을 끼고 있는 산책로도 있고, 바닷가 해안로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곳도 있다. 눈을 돌리면 어디든 Trail이 있고, 그곳엔 어김없이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은 집집마다 대부분 개를 키우다 보니 개를 데리고 산책 삼아 Trail을 걷는 사람들도 많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 달리기를 하는 사람, 걷는 사람 등등 각자 취향에 맞게 운동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집 가까이 Trail과 공원이 있고, 운동이 생활화되어 있다 보니, 유모차에 어린아이를 태운 젊은 엄마들이 함께 어울려 Trail을 걷고 운동하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예쁘게 조성된 산책로에서 유모차를 끌고 운동하는 엄마들을 볼 때마다, 유모차를 끌고 나가고 싶어도 동네 놀이터 외에는 갈 곳이 없던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이면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답답한 집안을 벗어나, 가까이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설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엄마들이 육아 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Trail을 걸으면서 느낀 소소한 행복들
건강을 위해 걷기를 시작했지만, 남편과 함께 매일 Trail을 걷는 시간이 나에겐 또 다른 의미에서 행복을 선물해 주었다.
일단, 산책로를 걸으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꽃과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어바인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처음 맞았던 새처럼 생긴 극락조(bird of paradise)부터 시작해서, 지난봄 캘리포니아의 산과 들을 온통 노랑으로 물들였던 겨자꽃,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 캘리포니아 도로를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인 자카란다까지...
미국에서 처음 만난 꽃과 나무들이 신비롭고 아름다워 매일매일 산책하는 길이 더없이 행복했다.
이외에도 산책길에서 만나는 토끼와 다람쥐 친구들의 모습도 반갑고, 두더지가 파놓은 굴이 어디 새롭게 생겼는지, 몇 개나 늘었는지를 확인하는 일도 즐거웠다.
Trail을 걷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소소하지만 소중한 행복이었다.
또, Trail을 매일 걷다 보면 같은 시간에 같은 얼굴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엔 그냥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는 순간부터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웃으며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에서, 누군가 우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웃어주는 경험은 우리도 비로소 이곳의 일원이 된 듯한 안도감과 따뜻함을 전해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Trail을 걷는 시간은, 우리 부부에게는 연애시절의 풋풋한 감정을 되살려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단둘이 함께 걸으며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고, 슬며시 팔짱도 껴보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다 보면 숨죽였던 연애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우리 부부 둘 다 얼마 안 가 체중감량에도 성공했으니, 이보다 좋은 운동이 또 있을까.
아침마다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꽃이 폈을까,
오늘은 또 어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까,
오늘은 또 신랑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까,
이런 설렘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trail을 걸으면서 비로소, 미국 생활의 긴장감을 내려놓고 일상의 평온한 행복을 찾아가는 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