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의 역사 공개수업을 참여하기 위해 직장에서 일찍 나왔다. 남은 시간은 1시간 30분. 강화도로 향했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주변이 차분해졌다. 파란 하늘과 노란 논을 가로지르는 것만큼 상쾌한 것이 있겠냐만, 가을을 짙게 만드는 빗속을 천천히 달리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다.
강화도를 향한 나만의 인사 습관이 있다. 바로 초지대교를 건널 때마다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살피는 것이다. 넓게 펼쳐진 회갈색 갯벌 사이로 급히 빠져나가는 물흐름에 정신을 뺏긴 적도 있다. 물살이 어찌나 강한지, 그 소용돌이를 정신없이 쳐다보기도 하였다.
온수리로 직진하였다. 가을 추수 중인 들녘과 황토색 고구마밭은 출산을 앞둔 여인처럼 묵직하게 가을을 품고 있었다.
온수리 시내로 들어서니 농약사, 학생분식, 김밥만두집, 치과가 보였다. 딸아이가 놓고 간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어갔다.
정육점과 호프집의 직관적인 빨간 간판 사이로 고목 속 빵의 요정이 숨겨놓은 듯한 이곳은 소박하지만, 당당하고, 거칠지만,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빗속에 더욱 짙어진 간판에는 영어로 BELPAN이라고 적혀있다.
통유리창으로 된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손님 4명이 남자 사장님께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집에 쌀 떨어지는 것보다, 벨팡 빵 떨어지는 게 더 무서워요!"
쾌활한 분위기의 그녀들이 떠난 후, 남자 사장님과 나, 단둘이 작은 공간에 남았다. 빵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매서운 눈빛에 살짝 긴장했었다. 사장님의 바지엔 군데군데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
100% 통밀빵이 있는 걸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빵 주세요"라고 말했다.
벨팡의 통밀빵은 풍성하게 꽉 차있다. 큰 칼로 빵을 잘라주시면 그 사이로 뽀얀 갈색 속살이 드러난다
다른 식빵과 달리 한 조각만 먹어도 배가 든든하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빵으로 가득 찬 갈색 선반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 먹고 싶었지만, 두 가지 빵만 사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사워도우 하나를 골랐다. 이성은 여기까지라고 했지만, 딸에게 하나 더 사주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달콤한 빵들이 모여있는 코너에 눈길이 갔다.
사장님은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내가 바라보던 시나몬 건포도 페스츄리 하나를 집어 크라프트지에 포장해 주셨다.
"이건 맛보세요."
많은 말을 나누진 않았지만, 이쯤 되면 사장님이 독심술을 가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항상 딸과 함께 왔던 내가 오늘은 혼자지만, 딸을 생각하며 달콤한 빵을 골랐다는 걸 읽으신 듯했다.
"멀리서 이곳을 응원하고 있어요, "
내가 말하자 사장님은 어색하게 몸을 흔들며 웃으셨다.
"그러지 마세요. 거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먼 데까지 와요?"
"빵 먹으려고 오죠."
건강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산을 가로질러 여기까지 오는 길이 마치 반지 원정대가 된 심정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차에 앉아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온수리의 고즈넉함과 조용히 흐르는 시간은 나만의 소박한 사치 속에서 소중한 휴식을 선물해 주고 있었다. 차 안에는 따뜻하고 달콤한 시나몬 페스츄리 향이 가득했다.
강화도 온수리의 풍경, 사람들, 그리고 이 빵집에서의 마법 같은 순간들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내가 강화도로 빵을 사러 오는 이유는 단순히 맛있는 빵 때문이 아니라, 이 여정이 주는 평온함과 그곳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초지대교를 건넌다. 물이 차오른다.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영양분을 가득 채운 후, 섬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