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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Feb 05. 2024

        분홍빛 과수원

   어머니를 닮아 성질 급한 내 마음은 이미 푹 퍼진 봄 안으로 뛰어 들어가 앉아있다. 그리고 누굴 닮았는지 꽤 가벼운 내 입은 분홍꽃잎이 날리던 그 봄날을 얘기하고 싶어 입술을 달막거린다.



16 년 전, 농사지을 텃밭을 알아보다가 산속 동네 마당 있는 작은 집이 예뻐 마음을 바꾸고 그 집과 인연을 맺었다.


주말마다 서울과 그곳을 오가는 생활이 시작됐다.


첫 주말에 들어가니 중년 부부가 우리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쪽 옆에 있는 고추밭 주인인데 뒤로 돌아가기 번거로워서 이리로 다닌다고 했다.


그 후 나는 가끔씩 그들의 고추밭으로 넘어가 고추가 많이 열렸네요 참 부지런도 하시네요 등의 말을 하고, 여자가 이게 달래고 저기 저게 둥굴레 잎이라고 알려주는 식물들을 몸 숙여 들여다보고 만져보다 내려오곤 했다.


다음 해 친정 대가족이 모이는 여름휴가철을 앞두고 필요해진 원두막을 마당 끝에 들여놓고, 오랫동안 다니지 않아 무성해진 뒷길 풀을 그들의 고추밭 입구까지 남편이 깎아놓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우리 마당이 막혀서 못 다니니 이젠 이 길로 돌아서 다니라는 간접 신호였다.      


그날, 그들 부부가 그 길로 돌아 들어갔다가 밭일을 끝내고 나오며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말이 주방 창문을 통해 들려왔다. “마당으로 우리 못 다니게 저걸로 막아 놓은 거야.”


그때부터 우리는 그들의 싸늘한 등을 오랫동안 봐야 했다.     

    한 주 동안 잘 지내셨느냐는 인사에 그들은 대답이 없었고, 커피 한 잔 하고 가시라는 권유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따라서 심심할 때 나도 그들 밭으로 넘어갈 수 없게 됐으니 그들에게 고추가 잘 익었네요 말할 일도, 그녀 쪽에서 이건 뭔 줄 알아요? 하며 가르쳐 줄 일도 없어졌다.  

   농약 통을 지고 비탈길을 내려가는 키 큰 남자의 등에서 원주민의 견고한 텃세만 확인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그들의 등을 턱으로 가리키며 나와는 상관없는 말을 지껄였다. 저 집은 고추밭에 웬 농약을 저렇게 퍼붓고 다니느냐고, 저 남잔 웬 키가 저렇게 크냐고.


그들에게 답을 듣지 못하는 일방적 인사를 나도 포기했다. 그들이 저 아래에서 비탈길로 걸어 올라오는 모습이 보이면 마당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피했고, 산 좋고 물 좋아 여기에 정착하고 싶어도 사람들이 못쓰겠어서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


불편한 마음과 행동도 반복되면 자연스러워지나 보다. 시간이 지나며 피하는 것도 성가셔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 그들처럼 싸늘히 등을 보이며 하던 일을 계속했고 그것도 반복되니 불편함도 모르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밭에 올 일이 없어 올라오지 않는 그들을 잊고 지내기도 하며 사 계절이 여러 번 지나갔다.




살다 보면 처해진 상황으로 의지를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오기도 한다.


어느 봄날 남자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계속 외면하고 지내려던 그들에게 우리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올핸 밭에 고추를 안 심고 복숭아나무로 바꿔 심었는데 당장 묘목에 줄 물이 없단다. 고추농사는 많은 물이 필요치 않아 그동안 하늘이 내려주는 빗물만으로도 감당이 됐으나 과일 묘목은 땅 속에서 강건히 뿌리내리기까지 많은 물이 필요하다고, 우리 집 외엔 부탁할 곳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어떻게 물 준비도 없이 나무를 심었는지 묻지 않았다. 이미 입양해 온 아가나무들의 생사를 가르는 생명수가 급하다 하지 않는가. 우리는 마당에서 밭까지 이어지고도 남을 길이의 물 호스를 그의 손에 쥐어주고 우리가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 평일에도 쓸 수 있도록 지하수 전기 스위치의 위치도 알려주며 충분히 쓰라고 했다.


선함으로 우회한 관계와 생명은 기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 해 복숭아나무가 꽃을 조금 피우더니 다음 해 봄엔 많은 꽃을 피워냈다. 거름과 물을 흠뻑 먹고 자라 든든히 서있는 나무 아래에서 수북이 올라온 쑥은 커도 여리고 향이 짙었다. 해마다 산으로 들어가 쑥을 뜯어오던 나에게 그들은 깊은 산엔 멧돼지가 있어 위험하니 여기서 뜯으라고, 내일은 나무에 약 칠 예정이니까 오늘 뜯어야 한다고 미리 일러주기도 했다.


복사꽃잎은 쑥들 사이로 분홍 송곳이 되어 꽂히기도, 분홍나비가 되어 내려앉기도 했다. 바람이 지나갈 땐 여러 꽃잎들이 호로록호로록 쑥 바구니로 날아들었고, 나 세상 떠나는 날은 이렇게 복사꽃 날리는 봄이면 좋겠다고 꽃잎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을 뒤에서 턱으로 가리키며 ‘저 집’이라 했던 호칭을 나는 그때부터 과수원집으로 바꾸었다.  


여름이 되자 과수원에 어른 주먹보다도 훨씬 더 큰 복숭아가 열렸다. 주말에 들어가면 싱싱하고 당도 높은 복숭아가 현관문 앞에 놓여있기도, 그들이 내려가며 직접 주기도 했다.

   나무들이 어릴 적에 젖을 충분히 먹어 잘 자랐다며 그녀가 복숭아를 건네줄 때 나는 겸연쩍어 대답할 말을 못 찾다가 얼른 그녀를 복사꽃 여인이라고 부르며 웃었다. 짧은 파마 머리에 뽀얗고 동그란 그녀 얼굴이 복사꽃처럼 환했으니까.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열리기 시작한 복숭아는 해마다 풍년이었다. 해를 거듭하며 우리는 더 많은 복숭아를 선물 받았다. 나는 단 물이 줄줄 흐르는 복숭아를 깨물면서 노후엔 이 동네에 정착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도 미쳤다.      



그곳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는 대인관계에 서툰 중년이었다. 그들과 이런 일을 겪는 과정이 나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타지에서 들어간 나의 건조한 원칙보다 한 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그들에게 유연한 예의가 먼저 있었어야 했음을 깨달아갔고, 그러면서 내 마음의 키도 그곳 과수원의 쑥처럼 연하게 자라 갔다.


그렇게 여러 해를 더 보내다가 우리는 애초에 계획했던 텃밭을 지금 이곳에 마련하면서 십이 년 주말살이를 끝내고 그곳을 떠났다.




벚꽃이 팝콘처럼 터졌다 지고 과수원이 복숭아꽃을 활짝 토해 내는 봄이 되면 나는 그곳이 궁금해져 마음이 근지럽다.

   이동해 온 이곳이 그곳과 먼 거리는 아니기에 그럴 땐 달려가 차를 세워놓고 비탈길을 걸어올라 과수원을 망연히 바라보다 오기도 하지만  향수의 해소는 턱없이 부족하다.      




봄이야, 봄이라구! 주문을 외운다. 환청인가, 땅 아래서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오는 물줄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온기 안은 봄 공기가 꾸물대는 것도 같다.


그곳 복숭아나무들이 서있는 대지는 아직 차가울 테지만 땅 아래에선 꽃을 피울 준비로 꿈틀꿈틀 흙의 움직임은 한창일 것이다. 그동안 더 튼실해졌을 나무들에서 올봄엔 또 얼마나 많은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려나.




그들이 나에게 분홍빛 과수원으로 물들어 있음은 꽃 같은 축복이다. 우리는 건너온 시간의 기억을 잡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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