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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May 27. 2024

                 작은언니

내 인생의 모든 것은 작은언니가 주었다. 언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학교에 다녔고 언니를 통해 음악을 알았으며 인생을 배웠으니까. 그리고 늦도록 언니의 등골을 빼먹었으니까.

                                                   


                                                                 

오남 사녀 중 제일 위가 큰 언니, 그 아래로 오빠가 다섯이고 그 아래가  나 보다 두 살 많은 작은 언니다.


작은언니와의 첫 기억은 주일학교에서 신부님이 내는 퀴즈에 정답을 말하면 상품을 받는 시간이었는데 답을 알아도 수줍어 손을 들지 않고 있는 나의 한 팔을 언니가 뒤에서 아프도록 위로 치켜올리며 신부님의 지목을 받아 상을 타게 하려던 몸짓이다. 다행히 신부님은 다른 아이를 지목해 답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어려서 언니의 별명은 ‘독살 쟁이’. 어머니에게 대거리하는 형제는 언니가 유일했다.

  

 김장대목이 끝나고 부모님이 하시는 옹기장사가 휴지기에 들어서는 겨울이면 부모님은 집으로 들어와 겨울을 나셨고 어머니는 겨우내 우리들의 옷과 양말을 기웠다. 바지 엉덩이 쪽에 구멍이 작게 나있어도 어머니는 옷감을 엉덩이 전체 크기로 덧대어서 꿰맸는데 나는 그게 불만이어도 그냥 입었으나 언니는 그 자리에서 그걸 이빨로 힘을 다해 뜯어내고 콩알만 하게 뚫린 구멍만큼만 덧대서 다시 꿰매 입었다. 언니가 같은 색깔의 빨간 천을 대고 꿰맨 모양은 표시가 나지 않고 예뻤다. 당신의 노고가 무시당했다는 분노로 어머니는 언니에게 욕을 했지만 나는 자신의 불만을 바로 노출하고 손끝 야무지게 다시 기워 입는 언니가 부러웠다.      

   

여장부며 억척스러웠던 어머니는 그누무 지지배를 뱃속에 가졌을 때 빨간 뱀이 혀를 날름대며 대들더니 지금 똑같다고 흥분하며 어머니는 태몽 얘기를 가끔 했다. 속으론 여리고 겁이 많기도 했던 어머니는 그 얘긴 언니가 없는 자리에서만 했다.    

 

                                                                    



의협심 강하고 정 많던 언니는 학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언니는 반에서 왕따인 친구의 머리를 빗겨주었고, 그러면 반 아이들은 왕따 시키려던 의지를 포기했다.

   반장이 남자고 여자가 부반장이던 시절, 언니는 반 친구들의 투표로 부반장이 되었다.

   언니가 책보를 한쪽 팔에 올려 들고 등교할 때 학교에 먼저 온 두세 명의 언니 반 친구들이 한참 아래에서 올라오는 언니를 마중 나와 그중 한 명이 언니의 책보를 들고 학교로 올라갔다. 언니는 난감해하며 사양했지만 친구들은 책보를 빼앗다시피 했다. 그녀들의 행동이 굴욕으로 보이지 않고 언니에 대한 존경으로 느껴졌다.

                                                       



여덟 동생들을 건사하던 큰언니가 시집을 갔다.

   장날엔 장터를 다니며, 다른 날엔 먼 동네로 다니며 옹기 행상을 하느라 집에 자주 오지 못하는 부모님은 어른이 없는 우리 집에 일 할 사람을 들였다.

   흰색 한복 차림으로 날씬한 몸매에 쪽 진 머리로 긴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던 중년의 여인, 서너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던 몸집 큰 아주머니, 갓난아기와 함께 들어와 산후 부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로 아기를 방바닥에 눕혀놓고 재봉질하며 처량히 노래 부르던 미혼모가 우리 집에서 차례로 머물다 떠났다.

   미혼모가 들어온 지 사나흘 만에 홀연히 사라지자 남편이 군대에 가 있는 동네 아주머니가 다섯 살짜리 기택이를 데리고 들어와 오래 일을 해주었다.  

   기택이 아버지가 군에서 제대하자 기택 엄마도 떠났을 때 언니는 국민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행상이 체력적으로 힘들어진 부모님은 옹기를 한 곳에 앉아서 소매상인들에게 넘기는 큰 도매상으로 바꾸기 위해 장사 터를 서울로 옮겼다.

   어머니는 큰 언니가 했던 희생의 바통을 작은 언니에게 이어가라 했다. 정의파였던 언니였지만 자신의 도약을 위해선 강건한 이기심을 가지지 않았던 언니는 진학을 고집하지 않았고 다만 교복 바지는 입고 싶다고 해 어머니는 언니에게 곤 색 교복 바지를 하나 해주었다


                                               



언니는 집에서 그 바지를 입고 살림을 시작했다.

   학기 초 등교 길에 아직은 살얼음 아래로 졸졸 물이 흐르는 개울을 언니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동생과 나를 차례로 업어 모래강변까지 건너 주었다. 여름밤엔 동생과 나의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 주기도 했다.     

   언니의 시선은 서울을 향해 있었다. 서울엔 부잣집 애들이 다니는 리라 국민학교가 있다는데 그 학교 아이들은 노란 교복을 입고 여름에도 양말을 신고 다닌다더라며 나와 동생에게 한여름에도 흰 커버양말을 신겨 등교시켰다. 동생의 머리는 파마를 시키고 양 갈래로 묶어 머리에 리본을 달아 학교에 보냈다. 모든 과목이 ‘수’ 일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동생은 학교에서 제일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아이로도 유명했다. 나는 머리형이 짱구여서 상고로 자르는 게 어울린다며 읍내 어느 미용실이 잘하니까 하교 길에 그 미용실에 들러 자르고 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언니는 또 주 1회 학교로 오는 소년동아일보를 구독해 주고 나와 동생이 읽게 했다.

                                                               

                                                                      



3년 후, 네 살짜리 꼬마가수 박혜령이 부른 ‘검은 고양이 네로’가 집 기둥에 달린 스피커에서 종일 나오던 그 겨울에 우리 가족은 부모님이 사놓으신 서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라디오를 들여놨고 내 시선은 언니를 따라다녔다. 해외문화에 대한 동경도 컸던 언니는 라디오 음악 프로를 통해 세계 가수들의 소식을 접했다. 우리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에 언니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해외 음악 프로를 들었고, 국내가요만 알던 내가 학교에서 오면 비틀스 멤버들의 사생활도 얘기해 줬다. 존레넌과 오노요코의 이야기도 함께.      

 <When a man loves a woman>을 들으며 언니가 이 노래는 비 오는 날 들으면 더 좋다고 말했을 때 나도 동감하며 이 노래를 부른 Michael Bolton은 분명 흑인일 거라고 했고 언니도 아마 그럴 거라고 말했다. 여과되지 못한 슬픔이 목을 막은 틈으로 비집고 나오는 흑인 특유의 쇳소리 절규가 느껴졌으므로.

   우리의 추측과 달리 그가 백인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집에 흑백 TV를 들여놓고부터는 주 1회 방영하는 미국 가정드라마 ‘월튼네 사람들’을 같이 보았고 영화 평론가 정영일의 해설과 함께 하는 주말의 명화도 같이 보았다. ‘로마의 휴일’을 보며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을 처음 알았다.  

   언니와 함께 있으면 닿지 못할 저 너머에나 있을 것 같은 세상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동네에 고등공민학교가 생겼다. 정식 학교로는 인가가 나지 않아 검정고시를 거쳐야 하는 학교지만 언니처럼 배움의 시기를 놓친 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언니의 공부를 늘 마음에 두고 있던 한 오빠가 언니에게 그 학교에 가기를 권했다. 오빠는 어머니가 반대해도 보낼 결심을 한 듯 비장해 보였다.

   며칠 후 집에 온 어머니께 그 얘기를 했고 살림은 누가 하느냐며 호통 치는 어머니 앞에서 오빠의 결심은 바로 좌절되었다.      


틈틈이 언니 희생의 강도크기도 했다. 한 오빠는 갈 데 없는 고향 후배를 집에 데려다 놓고 취업할 때까지 두 달 가까이 머물게 해 삼시 세끼 언니가 밥을 해 줘야 했고, 한 오빠는 군 입대 송별회 한다고 많은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언니가 상차림을 준비하다가 몸살이 나서 토하는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부엌의 흰 타일 부뚜막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언니의 뒷모습을 두어 번 보았다. 그때 나는 가슴이 서늘해지며 슬펐다. 그러나 그런 채 그저 세월을 보냈을 뿐이다.


명동 어디에서였던가. 언니와 함께 송창식 윤형주 등의 공연이 있어 그곳에 갔다. 거기에 온 관객은 모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 난 그들이 언니와도 같은 또래라는 것이 마음 쓰였다. 공연이 끝나고 학생들이 재잘대는 명동 골목을 밀리듯 같이 내려오면서 언니는 작고 쓸쓸하게 말했다. “나 이제 이런 데 안 올 거야.” 내 가슴이 서늘히 오그라들었다.

                                                            

                                           



언니 나이 스무 살이 넘었고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겨울 방학 때 언니를 따라 충무로 술집엘 갔다. 맥주와 담배 연기, 청춘들의 흥청거림 속에서 젊은 남자 둘이 ‘긴 머리 소녀’를 무대에서 부르고 있었다. 원곡 자 ‘둘다섯’ 보다 더 잘 부르는 그들을 보며 유명가수보다 아마추어가 더 잘 부르기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세 오빠는 차례로 결혼해 독립해 집을 떠났고 나머지 형제들은 부모님 가게 근처로 이사하면서 부모님과 합가 했다.           

나는 성인이 돼서도 언니에게 빈대였다.

또 한 오빠가 결혼해 올케언니가 들어오면서 집안일에서 놓여난 언니는 종로에 있는 양품점에 점원으로 취직해 출근을 시작했다. 패션 감각도 남다르던 언니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수로 지내면서 배우고 있던 나의 피아노 레슨비를 대주었다.

   돈 벌면서 집에 생활비 안 내놓는다고 소리치는 어머니에게 언니는 내놓을 돈이 어디 있냐며 어머니의 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항변하면서도 지적 사치만 강했던 나에게 친구들과 함께 보고 싶어 하는 연극공연 관람료를 주기도 했고 언니 가게에서 파는 집시치마와 여러 옷들을 사다 주기도 했다. 언니보다 많이 배운 나는 여름에도 겨울에도 사시사철 빈대였다.

   내가 취업해 직장을 다니는 데도 언니는 나에게 겨울 부츠까지 사주었으니까.   


                                                     



이누무 김서방네는 똥구루마도 끌 줄 하나 없다, 숟갈 몽뎅이 하나 없이 시작한 살림이다 하며 아버지 쪽 집안을 향해 울화를 쏟아내곤 하던 어머니는 당신 자식들에게도 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언니를 미워했다.

   서울에 집을 마련하긴 했어도 생활은 도시 빈민의 삶이었고, 많은 식구들이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사투에 앞장서있던 어머니는 돈 버는 언니와 나에게 생활비 내놓으라 명령했다. 언니는 끝내 내놓지 않았고 겁 많은 나는 어머니가 요구하는 액수를 내놓았다. 내놓고 나면 교통비도 남지 않아 오늘은 출근해 누구에게 퇴근길 교통비를 또 빌리나 고민하면서.       


                                                    



언니 나이 이십 대 중반이 넘자 어머니는 결혼이 늦어지는 언니를 부담스러워하며 언니가 결혼으로 어서 집을 떠나 주길 바랐다. 어머니는 언니가 깊은 독감에 걸려 아파도 언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게로 나갔다.

   언니를 밀어내는 분위기에 대학에 다니며, 군대에 있으며, 군 제대하고 나서도 언니에게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언니의 애를 태우게 하던 남자친구를 차버리고 언니는 무직의 남자와 결혼해 쫓기듯 집을 떠났다.  

                                                    

                                          


나는 언니 집엘 자주 갔다. 안양 신혼집에도, 이사한 영등포 집에도. 결혼 후에도 계속 일하던 양품점에도. 언니와 함께 있어야 내 삶의 숨통도 트였으므로.     

그해 겨울날 새벽에 동생과 자고 있는 방문을 어머니가 열더니 이불을 끌어올려 어깨 위까지 덮어주고 나가셨다. 언니의 결혼 전에 언니도 함께 방을 쓸 땐 한 번도 방문을 열어보지 않던 어머니였다. 열네 살 때부터 집안의 희생타였다는 안쓰러움 보는 맞받아치는 언니에게 당신의 권위와 자존심이 상한 무게가 더 컸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겨우내 자주 들어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셨고 그럴 때마다 온기가 오르는 이불속에서 나는 뜨끈한 비애를 느꼈다.   

                                                             

                                                            



나는 또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그날도 언니 집에 갔다. 언니가 낳은 조카가 3개월 정도 됐었는데 궁핍한 살림 중에 아기가 폐렴으로 통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언니는 옆집에 가 돈을 빌리더니 나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식당에서 언니가 사준 돼지갈비를 나는 맛있게 뜯어먹었다.


몇 년 후 나도 결혼을 했다. 결혼이라는 나의 모험 앞에서 언니는 걱정이 컸던 모양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성당 마당에서 두 시누이들이 내 팔짱을 양쪽에서 끼고 웃으며 사진을 같이 찍는 모습을 한복 입고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언니의 얼굴에 나에 대한 불안이 가득 들어있었다.  


몇 달 후 나는 입덧을 했고 입덧 중에 언니가 해주는 김밥이 생각날 때마다 지하철을 타고 언니 집엘 갔다. 돌아올 때 언니는 넉넉히 만들어 싼 김밥을 손에 들려주었다.

   만삭이 돼 아기 낳을 때가 되자 언니는 곰 그림이 있는 핑크색 아기 불도 직접 만들어주었다.           


어느 명절 때 한 올케언니가 식혜를 만들며 말했다. 시누이들 중에서 작은 언니가 가장 인간적이라고. 나는 움찔 부끄러웠다.      

                                                  

                                                                           



언니는 형부와 함께 작은 주류 배달업을 시작했다가 접고 화장품 외판원을 거쳐 치킨가게를 오래 운영했다.      


추석에 친정에 온 언니가  조금 슬픈 분위기로 고착돼 있는 집안 분위기를 단적으로 표현했다. 이누무 집구석은 여전히 사람 죽어 나간 집 같다고.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사람이 기를 펴야 사회생활도 잘하지, 예전에 우리들한테 했던 것처럼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당신 손자 손녀들한텐 그렇게 소리치고 쥐 잡듯 하지 말라고. 기운이 예전만 못한 어머니는 ‘나 요즘은 안 그런다’고 말했다.

그리고 언니 자신은 어렵게 살아도 동생들은 편히 살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도 말했을 때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늘 언니에게 반해있는 친정 조카들은 언니를 ‘교주님’이라 부르며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고.

조카들은 그 고모 앞에서는 마음이 열리며 자기들이 자라며 어려웠을 때의 얘기를 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했다.

조카들이 치킨 가게로 언니를 찾아가 언니와 술잔을 기울이며 연애상담도 하곤 했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 혼자 제주도에서 대학을 마친 한 조카가 대가족이 있는 서울로 오고 싶었으나 머물 곳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 걸 알게 된 언니는 그 조카에게 전화했다. “00야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지내자, 쓰러질 때 같이 쓰러지더라도.” 언니는  IMF 여파로 가게 폐업을 앞두고 있어 살고 있던 집도 보존이 불투명하던 때였다.

   그 조카는 서울에 직장 가까운 곳으로 방을 얻어 따로 생활하긴 했지만.


치킨 가게 폐업 후에 조카들은 언니가 일하는 식당으로 찾아가, 일하느라 바쁜 제 고모를 잠깐이라도 보고 오곤 했다.

   언니와 시간을 더 갖고 싶어 하던 조카들은 어느 날 휴일로 날을 잡아 언니 집으로 가서 밤늦도록 술을 같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형부의 직업이 오래도록 안정되질 않아 언니는 생업의 전선 한가운데 계속 있었다. 그러느라 세상 둘러볼 여유조차 없어 휴대폰 마련도 늦게 한 언니에게 나는 모든 세상이 이 작은 화면 안에 다 있다고 일러줬다. 그 옛날 언니가 라디오 음악으로 나에게 서양의 문화를 알려줬듯.

   나는 언니에게 휴대폰 문자 배우기를 종용했고 유튜브 세상도 일러주었다. 그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유튜브를 처음 접한 날 언니가 전화했다. 이런 세상이 돼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깜깜한 곳에 갑자기 들어온 세상 빛에 눈이 부시다고. 유튜브를 대하는 순간 누구라도 일찍 자신을 조금만 끌어줬었더라면 하는 회한이 덮친다며 울었다.    

                      

                                                                



구 남매 중 맏이인 큰 언니는 연세가 있어 와병 중이어서 소통이 어렵고 작은언니와 나, 해외에서 살고 있는 동생은 단톡방에서 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언니가 말했다. 언니가 어린 조카를 업고 가끔 내 신혼 방에 왔을 때, 언니가 좋아하는 소주를 미리 사다 놓고 김치빈대떡을 해 준 기억이 따뜻하다고. 나는 흠칫했다. 송두리째 염치없던 삶이 새끼손톱만큼이라도 용서받는 느낌이어서. 밤엔 조카를 끼고 누워 옛날이야기를 해주던 나와, 듣다가 잠이 들던 조카의 모습에 흐뭇했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움찔했다. 이젠 처자식을 거느린 듬직한 가장이 되어있는, 폐렴을 앓으며 제 엄마가 빌린 돈으로 사주는 갈비를 뜯던 이모를 한심하게 쳐다보았을 그때의 아가 조카에게 지금도 부끄러우니까.          


언니와 잦았던 형부와의 다툼 노년에 들어서야 잔잔해져 해로하고 있다. 내가 입덧할 때 드나들며 먹던 언니 표 김밥을 지금은 둘째를 가져 입덧 중인 언니의 며느리가 드나들며 먹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언니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언니에게서 받기만 했던 사랑을 얘기했다. 언니는 기억나는 것도 있고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했다. 나지 않는다는 기억 이야기엔, 그랬다면 자신이 기특하다고 말했다.

   언니는 나에게서 대리만족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뭐든 잘하고 예쁘길 원했단다. 내 손이 미워질까 봐 집안일도 안 시켰다고, 차라리 언니 손이 미워지는 게 낫다 생각했었다고 묻지 않은  대답을 했을 때 새삼 놀랐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설거지할 때, 빨래할 때 쫓아다니며 옆에서 조잘대긴 했어도 내가 집안일을 한 기억이 정말 없음에.  언니가 빨아준 옷엔 내 교복도 있었음에.

   “결혼 후 힘든 고비고비에서 니가 천사처럼 나타났었지.” 과분한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언니에게 지은 빚에서  조금  안도하고 싶어졌다.   


조카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어려서부터 각자 힘든 삶을 살아낸 친정조카들에게 고모로서 해준 게 없어 언니는  조카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지인에게서 가끔  인간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언니를 바라보며 언니의 맘 빛깔도 빼먹고 싶어 가져다 색칠하며 살려고 노력해 본 덕이라고 생각한다.


언니는 상자에 넣어 둔 채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옛날 사진이 이젠 보고 싶어 가끔 꺼내본다고 한다. 고향 동네 어귀에서 짧은 커트 머리에 월남치마 차림으로 서 있던, 언젠가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내가 얼른 외면했던 열네 살 그 고운 소녀 모습 안에 있을까.       


언니는 지금도 내가 예뻤으면 좋겠단다. 옷 사는 걸 성가셔하는 나에게 쇼핑 그거 쉬운 일 아니라며 상가를 지나다가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 있어 샀다며 보내온다. 언니가 대리만족 할 만큼 잘하는 것도 없었고 예쁘지도 않았고 내세울 것도 없는 나를 언니는 여전히 앞세우고 싶어 한다.           


                                                             



고향집 문간방에 잠시 세 들어 살았던 기옥 엄마는 옛날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 기 승 전 다음에 언제나 ‘그렇게 잘 살다 죽었대.’로 끝을 맺었었다.

   어느 날 언니 집에 찾아가 언니에게 금목걸이를 걸어주셨던,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걔한테 너무했지” 말했던 어머니는 2년 후에 세상을 뜨셨고, 언니를 늦게라도 중학교에 보내려다 어머니의 호통으로 포기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생각해 보면 다 불쌍해” 말했던 넷째 오빠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7년 후에 혈액 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작은언니는 아직 이렇게 세상에 있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내 한쪽 팔을 아프도록 치켜올려주던 힘을 여전히 발휘하면서.  

Michael Bolton - When a Man Loves a Woman - YouTube


                                          *******************


이미경 작가님께.

이미경 작가님, 작가님의 예약글에 답이 너무 늦었습니다. 저에게서 도망다니며 가진 성찰의 시간이 길었지요.

차마 건드리지 못할 언니 이야기를 풀게 해주신 이미경 작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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