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경화로 투병 중이던 막내 오빠가 먼 길을 떠났다. 마지막 유언은 그가 어렵게 시작해 일으켜 놓은 공장에 “문 잘 잠그고 불 잘 꺼라!”였다.
새벽에 떠났으니 긴 삼 일 장이 될 것이다.
산수를 잘 했던 오빠,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2 더하기 3은 5야, 그럼 3 더하기 2는?” 물었을 때 대답을 못하자 내 머리에 꿀밤을 주던 오빠, 재수할 때 체력장 끝내고 교문을 나서는 뒤에서 나의 막연함을 안다는 듯 다가와 말없이 손을 잡아주던 오빠. 그날 우리는 손을 잡은 채 말 없이 정류장을 향해 언덕을 한참 걸어올라 버스를 타고 집에 왔었다.
내가 결혼할 때 남편의 시계를 사주었던 오빠.
오빠 내외와 우리 부부가 식사 중에 ‘진주’라 천리 길, 앞으로 진주 여행 한번 하자는 말이 나왔을 때 그 길로 우리를 태우고 까만 밤을 달려가 진주로 거제 외도로 여행을 시켜준 오빠.
가끔 농장에 들러 농사짓는 이 동생을 대견해하면서도 짠한 마음 빛으로 바라보던 오빠.
대가족을 살피고 모으고, 가족 모두가 의지했던, 큰 기둥이던 내 오빠.
병원에서 그를 간병하던 올케언니가 과로로 오빠보다 먼저 쓰러질 지경이어서 내가 합류했다. 낮엔 내가, 밤엔 올케가 간병을 나눠 맡았다
그동안 한가하게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던 오빠와 나는 이렇게 오빠가 아프고 나서야 같이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병실 창문 너머 창공에서 비행기가 가는 모습을 보며 저기가 비행기 길인가보다고 내가 말했고, 그는 침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그런가보다고, 그리로 비행기가 자주 다니더라고 말했다.
외할아버지가 옹기 공장을 만들어 우리 고향 동네를 옹기마을로 만든 이야기, 궁핍한 살림에 흉년으로 더 어려워진 사람들이 외갓집에 빈 삼태기 하나만 가지고 들어와도 먹고 살 수 있다고들 말했다는 이야기 등. 그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파낸 흙을 망에 걸러 곱게 만드는 ‘수비질’로 머슴살이를 시작했고 좀 더 지나면 옹기를 만드는 옹기장이가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오빠는 우리 고향이기도 한 외갓집 동네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동네 입구에 서 있는 외할아버지 비석은 민둥산이었던 동네 뒷산에 외할아버지가 소나무를 심어준 공덕을 기리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세워준 거라고도 했다. 초등학교 때 소나무가 우거진 그리로 소풍을 갔어도 그런 사연을 몰랐었다고, 이제야 알게 됐다고 나는 말했다.
그가 나에게 글 부지런히 쓰라고, 외할아버지 공덕비 옆에 나의 문학비도 세우자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흐 웃었고 일찌감치 글 쓸 걸 하는 아쉬움을 잠시 가졌다.
오빠가 모르는 사연을 내가 알고 있기도 했다. 쌍둥이인 둘째 셋째 오빠가 장가들 때 두 오빠 전세방을 얻어주려고 어머니가 고향 밭을 팔고 나서 울었고 그 모습을 본 셋째 오빠도 같이 울었다는 얘기는 내가 했고 오빠는 몰랐다고, 그 얘긴 처음 듣는다고 했다.
오빠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공장 운영을 그의 아내와 아들이 잘 받아 하고 있음이 다행이라고도 했다.
우린 희망도 얘기했다. 완쾌되면 김장배추 모종 심고, 장어 집에도 가자고.
그리고 더 나중엔 오빠 여생의 마지막 소원이던 옹기장사를 다시 시작하고 그 옆에서 찐 옥수수도 팔자고, 옥수수 파는 알바자리는 내가 찜했다고 다른 사람 쓰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고관절 수술로 입원중인 작은 언니가 잘 회복하고 있는지 걱정된다며 전화를 했다. 전화 받은 언니는 “오빠오빠 오빠 어떡해 오빠 얼른 일어나야 돼, 나 퇴원하는 대로 오빠 보러 갈게.”하며 울었고 그는 왜 우냐고, 언니가 걱정이지 그는 다 나았으니 괜찮다고 언니를 안심시켰다.
통증이 가라앉자 그가 집으로 가고 싶어 했고 퇴원이 결정됐다. 병원을 나가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오빠와 나는 침상을 가린 커튼 안에 서서 같이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살금살금 노래했다. 병실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그가 엉덩이를 양쪽으로 흔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속삭이듯, 그러나 힘차게 외쳤다. 화이팅!
퇴원 후 그의 집에선 그의 아내와 내가 같이 그를 돌보았다.
누워있는 오빠의 양 발을 하나씩 잡고 발바닥 마사지를 해주다가 오빠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그녀와 나는 거실로 나와 탁자에 앉았다.
작년 봄 부모님 기일에 대가족이 산소에서 모였을 때 오빠가 조카, 조카사위, 조카며느리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와줘서 고맙다 말하더라고, 특히 몇 년 전에 혼자 된 조카며느리에겐 등을 더 오래 두드려 주더라고, 그 모습을 보며 울컥 했는데 오빠의 그런 어른의 모습을 내년부터는 못 보게 될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하며 나는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그의 아내도 눈물을 닦았다.
가족들이 병문안을 왔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그가 방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한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하며 또 군가를 불렀다. 집에 왔으니 이젠 노래를 크게 불러도 된다. 더구나 여긴 주택이 아닌가.
“사나이로 허잇!” 그가 구호에 맞춰 한 쪽 앞 발바닥을 나머지 발 뒤로 콩 찍으며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태어나서 허잇!” 하자 그가 또 그렇게 했다. “할 일도 많다만!” 그가 엉덩이를 양 옆으로 흔들었다. 거실 소파에, 식탁 의자에, 심란히 앉아있던 가족들이 까르르 하하하 웃었다. 없는 기운으로 힘을 다해 춤을 춘 그가 비틀거렸다.
동행한 수녀조카가 아픈 오빠의 고통을 덜고 구원을 얻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했다. 기도 끝에 오빠가 ‘아멘’ 하면 기도가 마무리된다. 그의 엉뚱함은 아파 누워서도 여전했다. 그가 응답했다. “나무관세음보살.”
경건함으로 기도에 임했던 가족들이 아랫배가 출렁이도록 웃었다. 수녀가 곱게 웃었고 그가 씨익 웃었다. 그의 고른 치아가 깨끗했다.
극심한 통증이 또 시작됐고 간격이 짧아졌다. 불러주는 군가에 호응 못할 만큼 그가 쇠약해졌다. 세 번째 입원을 했다.
다음 날 새벽에 그의 아내로부터 그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그는 산소 호흡기를 쓰고 누워 있었다. 그의 아들이 그의 손을 잡고 “아버지 평생 내 손 한 번 안 잡아줬잖아, 이제라도 한 번만 잡아줘요.”하며 울고 있었다.
심장박동 표시판에 초록 선이 여러 번 출렁이며 삐 소리를 냈다. 간호사가 와서 초록 선이 직선이 되면 얘기하라고 그저 직업적인 투로 말했다.
조금 후 삐 소리를 내며 초록 선이 평평해졌다. 그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다섯 손가락을 같이 끼고 있던 나는 손가락을 풀었다. 이제 삼 일 동안 언니와 조카가 상주가 됨을 알리는 말, 의사가 들어와 그의 사망을 선고했다.
그의 아내는 오빠가 술 많이 먹는다고 오빠를 미워만 했다고, 왜 사랑한다 말 한 번 해주지 않았는지, 미안해 사랑해 말하며 울었다.
살아선 신정이라고, 휴가라고, 여행가자고 많이 사랑했던 가족들을 불러들이던 오빠가 오늘은 죽어서 가족들을 불렀다.
빈소가 차려졌다.
큰 오빠 내외는 오래 전 제주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올 리 없고, 다섯 오빠 중 유일하게 생존중인 둘째 오빠의 아내가 그녀의 아들이며 우리 집안 장손인 조카와 함께 도착했다. 그녀는 지금 이십 년 째 남편의 병시중을 들고 있다. 그녀의 딸 사위 손자손녀들도 도착했다.
작은 언니와 형부, 그들의 아들 며느리도 도착했다.
이리 저리 성긴 애증들.
넷째 오빠가 암 진단을 받자 ‘부모님을 오래 모신 형이 돈 때문에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병원비는 내가 댄다!’ 막내오빠가 공언 한 후 병원비와 경비를 다 댔지만 투병하던 넷째 오빠는 발병 일 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맏며느리도 아닌, 더구나 넷째인 자신이 부모를 모신 것이 억울하다며 넷째오빠의 아내가 그녀의 남편을 묻은 자리에서 형제들을 향해 목 끝까지 차 있던 욕을 퍼부으며 달려들고 몸부림쳐 장지는 아수라장이 됐었고 형제들은 흩어져 이후 오래 앓았다.
패닉 상태에서 쓴 악다구니에서 정신이 든 순간 자기도 놀랐다는 그녀, 다른 가족들보다 더 깊이, 더 오래 앓았다는 그녀가 아들 경욱과 함께 들어왔다. 그날 이후 처음이니 십 년 만이다.
먼저 와 있던 가족들은 그녀와 서로 안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안부를 물었다. 제 어머니와 함께 오는 이 길이 편치 않았을, 이제 나이 사십 중반인 경욱을 향해서도 모두 손을 내밀었고 경욱은 가족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나머지 한 손은 악수로 잡고 있는 가족들의 손 등을 덮으며 토닥였다.
십 년 전 그날 장지에서 소란이 일 때 멀찍이 서서 바라보다가 저러는 거 아니라고, 자식 다 결혼시키고 이제 혼자 된 지가 힘들었으면, 젊은 나이에 어린 애들 넷 데리고 남편 보낸 나만큼 힘들었느냐고, 저러면 안 되는 거라는 말을 던지곤 돌아서 사위 차에 올라 쌩 하게 장지를 떠나버렸던 셋째 올케언니가 그녀의 네 딸과 사위 손자손녀들과 함께 도착했다.
나이 서른여섯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어린 오남매와 함께 남겨졌던 그녀는 시장에서 옹기장사를 시작했다. 옹기가 공장에서 큰 차로 들어오면 막내오빠 내외가 가서 무거운 옹기를 내려주곤 했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 뜬 후로도 명절이나 시집 행사에, 네 아이들을 데리고 빠짐없이 다녔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 다 떠나시고도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대가족이 막내 오빠 네서 모여 자고 아침 식사중일 때 늦잠에서 일어나 나온 날씬한 오빠는 까치머리를 한 채 이 언니의 등 뒤로 가서 뚱뚱한 그녀를 슬며시 안았다. 수십 년 쌓인 형수에 대한 고마움의 몸짓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이 밥을 입에 넣다가 반찬을 집다가 웃었고 국을 마시던 뚱뚱한 그녀도 웃었다.
오늘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 하는 말끝엔 목이 메었다.
해외에 있는 여동생도 도착했다.
구 남매 중 가장 위인 큰언니가 그녀의 딸 며느리 손녀와 함께 도착했다.
“누나 오래 사슈, 공장 시작할 때 진 빚 다 갚았으니까 이제부터 팔도유람 시켜드릴게.”하고 그는 형제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
큰언니는 내 동생 참 착한 사람이었다며 올케를 안고 오열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영정사진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삼 년 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겪은 후 그녀의 단기 기억상실증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녀는 사진 속 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몇 번 더 했고 조카들에겐 네가 누구냐고 몇 번 더 물었다.
가족들은 큰언니가 의자에 앉은 빈소에서 둘러선 채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여 있는 꽃만 아름다울까. 가족은 더 아름답다. 언제든 어디서든 모여 있는 가족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사진은 기록이기에 함빡 모여 있는 우리 가족을 향해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오빠를 잘 보내드리고 난 후에 가족 밴드에 올릴 것이다.
세심히 살피며 도와주던 상조회사 여 직원이 다가오더니 자기가 찍어주겠다고 했다. 나도 같이 찍으라며.
조금 떨어져 오빠 영정사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 상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주조카도 같이 찍자고 내가 불렀다.
키와 덩치가 큰 그가 와서 내 옆에 섰다. 작은 나의 키는 그의 겨드랑에 닿았고 나는 손을 뒤로 해 그의 허리를 잡았다. 큰언니와 둘째 올케언니는 처음에 앉았던 의자에 그대로 앉아 두 손을 꼬옥 잡은 채 카메라에 눈을 맞췄고, 다른 형제들도 손을 잡고 또는 허리를 감고 서서 사진을 찍었다.
가족과, 가까웠던 친구들에게만 연락해 치르는 장례는 순하게 진행됐다.
가족들은 십 년 만에 온 경욱이 겉돌까 살피며 자주 그에게로 가서 말을 걸었고 슬몃슬몃 그를 챙겼다.
밤이 되었다. 그를 회고하는 자리는 유쾌했다.
그가 운영하던 공장은 파라핀을 취급하는 일이라 화재에 민감했다. 그가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 새벽에도 공장을 몇 번씩 돌 만큼.
하루는 그가 화재 예방 소화기 교육을 한다고 직원들을 불렀다. 불이 나면 이렇게 하라며 소화기 들고 핀을 뽑으려는데 반복해서 뽑으려 해도 핀이 뽑히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에이, 이럴 땐 그냥 튀어!” 했다고, 그 말에 공장 직원들이 웃었다고 상주조카가 전해서 우리도 웃었다.
상주조카는 아버지가 자기한텐 칭찬 한 마디를 안 해줬다고,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느이 엄마랑 상의해라, 결정은 내가 할 테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고, 결정을 아버지가 할 거면 왜 엄마랑 상의하라하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툴툴거렸고 그 얘기에 우리는 또 웃었다.
토 달지 말고 자신의 결정대로 무조건 따르라며 앞장섰던 오빠로 인해 맘고생 많았던 올케에게 오빠의 결정이 옳았었는지 내가 물었다. 다 옳았다고 그녀가 대답했다.
조카들은 그에게 도움 받은 얘기도 했다. 결혼 후에 남매 낳고 대학공부를 시작한 한 조카는 그녀의 남편이 실직해 공부를 중단할 위기에 처했을 때 오빠가 몇 학기 등록금을 보내주었다는 얘기를 처음 했고, 어느 조카는 결혼식 앞두고 집 마련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또 한 조카는 제 부모가 한 겨울에 실직 중일 때 그가 생활비를 보내주었다고도 했다.
그의 급한 성질은 흉이 되어 나오기도 했다. 식당에 가서 음식 맛이 없는 건 불평 안했는데 오래 기다리게 하면 그냥 나왔다고.
그가 구 남매 중 유일한 음치였던 건 누굴 닮아서였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둘째 날이다.
장조카는 왔다 갔다 하는 걸음만으로도 묵직함이 느껴졌다. 오래 전 큰오빠 내외의 죽음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맏며느리 자리에 서게 된 그의 어머니는 따로 사온 과일 박스를 열고 손님들의 식탁과 상조회사 직원들 탁자에 따로 놓아주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생활이 힘들어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한 것에 그녀는 내내 마음 불편해했었다.
가족이 모이는 자리는 미안함과 감사를 표현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장조카는 고관절 수술을 한 작은 언니에게 고모, 병원에 못 가봐서 죄송해요 하며 돈 봉투를 언니 손에 살며시 쥐어주었고 언니는 놀라며 사양하다가 받았다.
여형제들과 올케들은 조카손자 손녀들에게 용돈을 주었고 손자 손녀들은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받았다.
동생은 어느 조카와 손녀에겐 유족실로 따로 불러 용돈을 주는 모양이었다.
오빠 처가의 열한 살짜리 조카손녀가 문상을 하고 나오며 제 엄마 품에서 슬피 울었다. 집안 행사 때 만나면 저와 잘 놀아주었던 그를 많이 따랐다고 했다. 그가 역시 많이 사랑했던 그의 처가 식구들도 삼일 내내 장례식장을 지켰다.
입관 예절이 시작됐다.
장례사가 가족들에게 고인을 향한 마지막 인사말을 권했다. 상주올케는 당신 고생 많았다고 사랑한다고 말했고, 상주조카는 어머니와 잘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시라고 말했다. 누구는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했고 누구는 눈물만 흘리다가 물러났다.
나는 술을 끊지 못해 그예 영원한 이별을 하는 그에게 ‘아니 그래 하루에 막걸리 다섯 병이 뭐냐고.’ 슬픔과 원망 섞인 말이 튀어 나오려는 입술을 누르고 오빠 고마웠어요 사랑해요 하고 물러났다. 저 뒤에 나의 며느리 예림이가 서 있었기에.
나의 아들은 외삼촌 저 사랑해줘서 감사했다고 외삼촌이 예뻐하던 예림이와도 잘 살겠다고 울며 말했다.
오빠의 처형이 다가갔다. 그녀는 오빠의 한쪽 어깨를 잡더니 “술을 왜 그렇게 좋아해서 이렇게 나보다 먼저 가는 거여! 다음번에 다시 태어나믄 절대 술 먹지 말어!” 해서 울던 가족들이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오빠는 그의 처갓집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제들이 유산으로 골고루 나누어 받은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형제 중 가장 어려운 이 처형에게 다 넘겨주었었다.
둘째 날 늦은 밤이다.
조카들이 모여 앉았다. 집안의 기둥이 떠났으니 이제는 그들이 기둥이 돼야 할 차례라는 의무감이 서려있었다. 정기적으로 만나자는 이야기, 월 회비를 내자는 이야기, 집으로 돌아가며 만나자는 등의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저무는 세대는 눈치껏 빠져줘야 한다. 나는 슬며시 일어나 유족실로 들어왔다.
가끔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 세대가 소멸해가고 교체된 세대가 뭉치는 소리다. 나는 언니들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출상 날 아침이다. 흰 장갑을 낀 여섯 명의 남자 조카들이 오빠의 관을 들고 계단을 올라 리무진에 모셨다.
나는 오빠의 병시중을 드느라 몸이 반쪽 되어버린 상주올케를 살피며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화장장으로 가는 리무진에 그녀와 내가 탔다.
화장장에 도착했다. 조카들이 다시 오빠의 관을 들었다.
장례사는 앞에 차례가 밀려있어서 여기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신혼인 한 조카내외가 둘이 손을 꼭 잡고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더니 저기 위층이 유족 대기실이라고 우리를 안내했다. 그곳에 들어서니 커피 냄새가 떠다녔다.
몸으로 마음으로, 공기처럼 늘 곁에 있던 오빠가 떠났으니 우리의 죽음도 곁에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리라.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많이 빨리 빨리 사랑하는 일 뿐이리라. 지금.
우리 세대는 창가 쪽에 모여 앉아 손가락으로, 팔로, 작은 하트 큰 하트를 만들며 사랑놀이를 했다. 양 팔을 벌려 엄지와 검지를 포개기도, 양 팔을 위로 올려 손가락을 모아, 양 팔을 앞으로 해 손목을 붙이고 중지를 꼬부려 붙여 하트 모양을 만들며 서로 서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말하고, 앉은 채 몸을 구부리며 거듭거듭 서로서로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바라보며 웃었다. 또 우리는 이렇게 오빠를 배웅하고 우리가 배웅 받을 날을 얘기했다.
조카들은 저 쪽에 앉아 담소하고 있다. 어느 조카는 커피를 가져다 우리들이 앉아있는 탁자에 놓아주고 그 자리로 가서 합류했다.
전광판이 오빠의 차례가 가까이 왔음을 알렸고 장례사의 안내로 우리는 일어나 좁은 복도를 따라 이동해 오빠가 보이는 곳으로 갔다.
오빠가 여러 조각의 크고 작은 뼈들로 변해 나온 모습이 작은 창 너머로 보였다. 나는 한숨 쉬며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도 결국 물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기다리니 그가 가루가 되어 흰 종이에 담겨 나왔다.
삶은 이렇게 허망하다.
우리는 그의 유해를 싣고 차에 올라 공장으로 갔다.
그를 앞세우고 우리는 그가 아끼던 공장을 같이 돌았다.
공장에 불 잘 끄라고 했던 그의 마지막 유언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공장에 불이 켜져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공장을 다 돌고 정신 차려 불을 끄고 다시 차에 올라 수목장으로 치러질 묘원으로 출발했다.
묘원에 도착하자 상주 조카가 경욱에게 오빠 사진을 들어 달라 부탁했다. 사진을 들고 앞장 선 경욱과, 유해를 든 상주조카의 뒤를 가족들이 따라 올라갔다.
나이 드니 조심스러운 게 많아진다. 삽으로 가족들이 한 삽 한 삽 흙을 떠서 오빠에게 덮어줄 때 나는 꽤 뒤로 물러나 있었다. 자주 나서는 모습으로 비춰질까봐서.
오빠의 처가 식구들도 한 삽씩 떠서 그를 덮어주었다
햇빛 잘 드는 소나무 아래 그가 잠들었다. 우리는 연도를 하고 성가를 불렀다.
순한 장례를 이렇게 마쳤다.
그곳을 떠나며 말했다. 오빠 잘 지내고 있어. 우리 또 올게.
귀가버스를 타기 위해 걸으며 그가 잠든 곳을 자꾸 돌아다보았다.
삼우제다.
조카들이 그에게 소주를 놓아드렸다.
49제다.
그의 처제들이 그에게 막걸리와 양주를 놓아드렸다. 막걸리 뚜껑을 열고 컵에 따라 주었다. 미남인 오빠가 사진에서 웃고 있다. 따라준 막걸리를 한 잔 마신 그가 말한다.
세상을 혼자만 잘 살지 말라고. 어려운 가족은 없는지 살피고 도우며 살라고.
우리는 한 팔을 들어 위 아래로 박자를 맞춰 흔들며 노래 불렀다. “사나이로 허잇! 태어나서 허잇! 할 일도 많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