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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Nov 17. 2023

         고추부각의 춤

   음식은 정서를 지배한다. 더 추워지기 전에 형제들이 농장에 놀러 오겠단다. 그들이 오면 반찬은 배추를 뽑아 고기 싸 먹을 노란 배추 속잎과 함께 가을에 말려둔 고추부각을 튀겨 내놓아야겠다. 부각은 보글거리는 기름 속에서 기지개를 켠 후 춤을 추다가 나와서 그들이 올 시간이면 깨를 뒤집어쓰고 식탁 위로 올라가 앉아있을 것이다.

   



시골에서 모내기와 추수하는 날만큼은 음식이 푸짐하다. 어린 날 부모님은 멀리 장사 나가 계시고 언니오빠들은 학교에 가고 없어 집에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예닐곱 살쯤 됐었을까. 나른한 봄날, 점심때 뒷집 재희네선 모내기 날이라 사람들로 북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늘 그랬듯 내가 배고팠던 모양이다. 삽작문을 나와 돌아서 비탈길로 올라가 그 집 대문 앞에 섰다. '이렇게 서 있으면 누군가가 부르겠지. 나도 저기서 밥 먹고 싶어.'

   부엌으로 마당으로 바삐 오가던 재희 어머니가 나를 보곤 놀라 나와서 내 손을 잡고 들어가며 연민의 말을 짧게 했다. “엄마가 없으니 쯧쯧..” 그리고 그녀는 나를 마루에 놓여있는 밥상 앞에 앉히고 밥을 주었다. 그때 처음 먹어본 고추부각의 맛이 얼마나 좋던지. 햇빛과 자연바람에 말리는 저장음식이 다 그렇듯 자주 들여다보고 때맞춰 뒤집어주며 살펴야 하기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오시는 우리 어머니는 장만할 수 없는 먹거리였다.

   



그 후로 그것을 다시 맛본 건 고등학교 때였다. 오빠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마당에 눈이 소복이 날 쌓인 아침에 일어나 애기씨라 부르며 새언니가 차려준 밥상에 고추부각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새언니 앞에서 수줍게 수저를 들고 밥과 함께 부각을 바사삭바사삭 깨물어 먹었다. 간간하며 매콤한 그 맛은 환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스무 살이 넘었을 때 장사에서 한가해진 어머니가 고추부각을 만들기 시작하셨다. 김장 전에 시장에서 고추를 사다가 만드셨고 그건 겨우내 우리 집 반찬이 되었다. 이후 이십 대 후반에 결혼으로 독립해 내 살림을 시작하면서 나는 부각을 손수 만들었다.



단칸방 살이 신혼 때 독이 바짝 오른 고추를 한 자루 사다가 세로로 갈라 씨를 빼고 소금물에 이틀 동안 담가 매운맛을 약화시킨 후 밀가루로 옷을 입혀 찜기에 넣고 찐다. 그리고 채반에 붙지 않게 펴서 주인집 옥상에 말렸다. 그러다 날이 궂어 건조가 늦어지면 거둬다 실에 꿰어 연탄불 화기가 지나가는 연통에 걸어두고 오가며 서로 붙어있는 고추들을 떼어주었다. 다 마른 고추들은 겨울 나뭇잎처럼 바스락 소리를 내며 서로의 몸을 비빈다. ‘고추부각’이라는 이름으로 명찰을 바꿔 달고서.

   

   삼 년 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때부턴 아파트 잔디에다 돗자리를 깔고 널어 말렸다. 잘 말려 보관해 둔 부각은 맥주 안주와 남편 도시락 반찬으로도 효자 노릇을 했다.

   이후 예순 살이 넘어 작은 텃밭을 마련하고 고추 농사를 직접 짓기 시작해 해가 지나며 고추의 양을 늘렸다. 꾀부리지 않고 몸을 움직여도 하늘이 도와줘야만 되는 농사일, 다행히 올해는 다른 해보다 많은 양의 고추를 수확할 수 있도록 하늘이 도와줬다. 따라서 고추부각의 양도 늘려 장만할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가 만드셨고 어머니의 어머니 세대도 만들었을 풍경이 요즘은 거의 사라졌지만 내게는 아직 일상이다.

   



   재미를 알면 세상 일 힘들 게 있으랴. 가위를 들고 세로로 고추를 가르는 나의 손놀림이 날렵하다. 마음에선 이미 부각이 형제들의 가슴에 한 아름씩 안겨 있으니까. 혹자는 이 일이 번거로워 힘들지 않으냐며 혀를 내두르기도 하지만 수십 년 하면서 몸에 익은 일이기에 번거로울 것도 힘들 것도 없다. 찐 고추를 남의 집 옥상으로 부엌 연통으로 옮기고, 아침저녁으로 내고 들이는 번잡함 없이 대형 건조기에 밀어 넣은 뒤 몇 시간이면 완전히 건조돼 나오는 세상 속에 있음이 고마울 뿐이다.  

   

   정오가 될 무렵, 스티로폼 박스에 넣어 보온을 그대로 유지시킨 수육과 과일 등을 들고 가족이 스무 명 넘게 모였다. 농막은 순식간에 잔칫집이 되었다. 아이들은 의자에 앉아서, 어른들은 그 사이사이에 또는 조금 뒤에 서서 배추 속잎에 썰어놓은 수육을 넣어 싸서 볼 살이 터지도록 입 안에 넣고 먹는다. 오디오에서 나오는 노랫가락에 맞춰 대학생인 조카손녀가 몸을 흔들고 고개를 까딱이며 쌈 위에 고기를 얹는다. 아이 엄마인 네 명의 조카들은 제 고모부인 나의 남편과 술 대작 중이다.  

   이런 모습들을 많이 담고 싶어 자주 휴대폰을 들고 영상을 찍었다. 모두들 고추부각도 맛있다며 잘 먹는다. 큰 조카가 “이모, 엄마가 고추부각 맛있대, 이따 갈 때 싸줘.” 말하자 다른 이들도 모두 싸달란다. 뭔들 못주랴.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귤을 꺼냈다. 어른들은 그것을 천천히 까서 조금씩 먹고 아이들은 빨리 까서 급히 먹는다. 귤 한 박스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종이컵을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고 봉지커피를 뜯어 컵에 담아 끓인 물을 붓자 조카사위가 얼른 나무젓가락을 들더니 젓기 시작한다. 그리곤 그가 그것을 하나씩 들어 식구들에게 돌린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들고 영상을 또 찍었다. 한 올케언니가 “커피 마시는 것도 찍어요?” 나는 “언니, 이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면 끝이에요, 남는 게 뭐 있어 추억밖에. 그러니 이렇게 담아놔야 돼. 요 이쁜 이서방도 한 컷 담고.” 밥과 고기, 과일을 실컷 먹고 방에서 티브이 보며 뒹구는 손주들 모습도, 밖에서 제 아빠 따라 뛰어다니는 손주들 모습도 아침에 걸친 앞치마를 풀지 않은 채  부지런히 휴대폰 앨범에 담았다. 다섯 살짜리 조카손주에게 "규현아, 이담에 이 할머니 하늘나라로 떠나 세상에 없을 때 이 사진 보며 사진 많이 찍어준 할머니 기억해 줄거지?" 하자 녀석이 "네." 하고 대답해 모두 웃었다.  어른들은 대견한 눈으로 조카와 손주, 사위들을  바라보며 웃기도 하고 일상 이야기와 옛날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모이니 참 좋다는 말을 자주 했다.

   겨울 해는 짧다.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하니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남편이 비닐하우스로 가서 여러 날 만들어 대형 비닐봉지에 담아 천정에 매달아 둔 고추 부각 봉지를 사다리로 올라가 내렸다. 그것을 어깨에 지고 농막으로 옮겨와 주둥이를 열어 각 집의 몫으로 나눠 담았다. 말린 가지와 마늘과 호박오가리는 덤이고.

   

   모두 집으로 가기 위해 나가면서 농장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겨울 바지 위에 인형 같은 망사치마를 걸치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 조카손녀는 카메라 앞에서 취하는 포즈를 어찌 알고 검지 하나로 앙증맞게 제 한쪽 볼을 찌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이 년 전 뼈가 녹을 만큼 힘든 일을 겪은 큰 언니는 미소만 보인다.

   둘이도 찍고 셋이도 찍고, 누군가가 눈 감았다고 아쉬워해서 또 찍고, 키 작은데 맨 뒤로 가서 이마밖에 나오지 않아서 또 웃고 또 찍고.. 이젠 깜깜하다. 어서 헤어져야 한다. 밤 길 운전은 수월치 않으므로.

   손 흔들며 그들을 보냈다. 그리고 늦은 밤, 종일 찍은 사진과 영상을 가족 밴드에 올렸고 조카들에게선 감사 문자를 받았다.

   



 만남의 반가움만큼 아픈 숙제도 생기는 것이 가족의 삶이다. 지난봄, 가족 초대에 빠져 서운해하던 큰언니가 이번엔 딸과 함께 참석해 흠뻑 기뻐하며 잘 보내고 가셨다. 그녀의 주방 팬에선 고추부각이 지금쯤 화해의 춤을 출까. 오십 년 전 애기씨라 부르며 밥상을 차려줬던, 지금은 오빠의 병시중으로 힘든 둘째 올케언니네 집에선 부각이 어떤 춤을 추고 있을까. 그녀의 잔잔한 노래솜씨처럼 브루스일까. 늦은 나이에 시작한 사업이 불붙듯 일자 어려운 가족들을 표 내지 않고 살펴주며 우리 대가족의 지주가 돼있는 막내 오빠네선 그가 자주 추는 막춤을 부각도 추고 있으리라.

   내 집 주방 팬에선 제 주인 닮아 성질 급한 부각이 푸다닥푸닥닥 난리 법석 춤을 추고 있다.

   나에게 고추부각은 가족 의 애잔함이며 내 유년의 연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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