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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by 개울건너

휴대폰에 영상 전화가 떴다.

사각의 화면에서 운전 중인 시동생과 그의 뒤에서 막내 시누이가 웃고 있다. 지금 막 떠나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란다. 저녁식사는 하고 출발했으니 저녁밥 걱정은 말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다른 데로 휴가 떠나 여기에 없으면 어쩌려고 전화도 없이 나섰느냐고, 느닷없는 건 여전하다며 웃었다. 이제 나섰다니 세 시간 후에 그들은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의 오빠가 이끄는 악극단에서 발전기를 돌리던, 이후엔 군산 비행장에서 비행기 정비공으로 일하던 시아버지는 6,25 한국전쟁이 나자 처가 동네인 살구골로 들어왔단다. 살구골은 전쟁에서 안전한 곳이었기에.

시부모님은 그곳에 남향의 외딴집을 짓고 논밭을 마련했다. 집 뒤로는 밭이 붙어있고, 집 앞 저 아래로 논이 있었다.

농토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모자라지는 않은 정도였다.

탱자나무 울타리의 넓은 마당에는 삥 둘러 보리수 앵두 살구나무, 감나무가 있어 과일은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단다.

시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는데 아버님은 가끔 가을에 탈곡기를 어깨에 메고 근동을 다니며 탈곡을 해주고 삯을 받아와서 생활에 보탰다.

손기술 좋은 아버님은 볕 좋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놓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만들기도 했다.


아랫동네 사람들이 동네에 하나 있는 우물로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생활하던 시절, 아버님은 마당 한 편에 마중물을 붓고 펌프로 지하수를 퍼 올리는 샘물을 팠다. 샘 양 옆에 포도나무를 심어 샘물 위로 포도 넝쿨을 올렸다.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 건 아버님이 아프면서부터였다. 병환의 시간이 길어지며 논을 조금씩 팔아 아버님 병구완에 보탰다.

아버님은 여러 해 누워계시다가 예순 연세에 세상을 뜨셨단다.


고향에서 학업을 마치고 군에 다녀온 위의 형제들은 대처로 나가 일하며 제 앞가림하기에 바빴고, 집안의 가장 큰 희생타인 시동생은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버스 차장부터 시작해 운전을 배워 돈을 벌었다.

그는 작은 월급을 집으로 보내 외딴집에서 살고 있는 어머니와 그보다 세 살 아래인 막내 시누이의 생활비를 댔고 시누이를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다. 그리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살구골 외딴집에서 살고 있는 모녀를 전기가 들어오는 아랫동네 한가운데로 이사시켰다.

그는 버스 운전, 트럭 운전, 스쿨버스 운전기사를 거쳐 지금은 레미콘 트럭을 사서 운행하는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레미콘 운전을 시작할 때 들어간 하숙집의 딸과 우여곡절을 겪고 결혼해 두 딸을 낳았고 그 딸들이 잘 커서 올 가을이면 큰 사위를 얻을 예정이다.




결혼 전, 예비시댁에 인사를 가기 위해 남편과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부여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택시로 비포장도로의 밤길을 40여분 달렸다. 집에 도착하니 불이 꺼져있어 깜깜했고, 남편이 어머니를 부르자 방에서 시누이가 먼저 나오며 마루 기둥에 달린 백열등을 켰다. 그 등불 아래서 약간 긴 단발파마의 그녀가 생긋 웃었다. 기다리다가 너무 늦어 안 오는 줄 알았다고 하면서.

그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여군에 지원하고 싶어 했지만, 이미 도회지에 나가있는 오빠들이 너라도 어머니 곁에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설득해 지금 어머니와 함께 있다고 그때 남편이 내게 말해줬었다.



내가 결혼하자,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도와주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는 전사 같았다.

제사 때 명절 때 시댁을 내려가면 그녀는 미리 음식을 다 해놓고 밥상을 차려주었다.


결혼 전 친정에서 올케언니들에게 종종 여우 같은 시누이노릇을 하다가 시집온 나는 그녀의 배려에 놀랐다.



첫 아이를 낳았던 그해 겨울엔 눈이 많이 내렸다. 작은 단칸방에 누워 그녀가 옥상에 올라가 빨래를 널고 걷을 때 눈을 밟는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끼니때마다 밥을 새로 지어 주었다. 미역국이 너무 뜨겁다고 하면 국그릇에 입을 가까이 대고 호호 불어 뜨거운 김을 날려주기도 하면서.


한 달 후 그녀가 내 산바라지를 끝내고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혼자 아이를 목욕시키고 났는데 아이의 온몸에 빨간 반점이 올라왔다. 시간이 지나면 들어가는 태열인 줄을 그때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왜 이러는지 몰라 놀랐다. 아기 키우는 게 두려워 찔끔찔끔 울었다. “아가야 세상에 태어나니 고생이지?” 하면서. 그리고 나는 몸살을 앓았다.


이후에도 그녀는 가끔 올라와 산더미처럼 쌓인 세탁물을 주인집 마당 수돗가로 가지고 나가 손빨래해서 탁탁 털어 널었고, 그러다가 그녀가 다시 시골집으로 내려가면 나는 또 몸살을 앓았고, 큰 기둥이 빠져버린 것 같은 두려움과 허전함에 또 훌쩍훌쩍 울었다.



작은 아파트로 이사 온 후 작은 아이를 낳았다.

병원에서 퇴원해 방에 누워있을 때 그녀가 거실에서 이불을 꿰맸다.

세 살이었던 큰아이가 바느질하고 있는 그녀에게 오모(고모)? 오모? 부르고, 그녀는 오야 오야! 대답하는 소리를 닫힌 거실 문 너머로 들었다.



그녀가 첫 아이 때처럼 둘째 아이 몸조리도 한 달 해주고 집으로 내려갔다.


몇 달 후 작은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을 해야 했고, 나는 산후풍이 들어 바깥바람을 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또 시누이에게 전화로 이 사정을 알렸다. 그녀는 다른 데를 가다가 일정을 취소하고 바로 올라왔다. 현관문을 급히 열고 방으로 들어오던 그녀의 다급하고 근심 어린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집에서 산후풍을 앓고, 그녀는 병원으로 가서 입원해 있는 작은아이를 돌보고 퇴원시켰다. 그녀 덕에 그렇게 우환의 고비를 또 무사히 넘겼다.


나보다 아홉 살 어린 그녀는 전생에 나의 언니가, 아니 나의 친정 엄마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농협 다니는 옆집 총각과 연애를 했다.

친정 동네에서 가난하게 살며 같은 동네에 사는 손아래 친정 올케들에게 홀대받은 시어머니는 그녀의 동네 결혼을 많이 반대하셨다.

남녀의 사랑을 누가 막겠는가.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고 그녀가 첫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고, 몇 년 후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어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잘 살고 있다.


시골에서 흙 밟고 자란 그녀의 아이들, 그곳에서 학교 교육 외에 학원은 태권도 학원에만 다니면서 큰 그녀의 남매는 반듯하게 자라 아들은 현재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딸은 제 엄마가 못 이룬 여군의 꿈을 이루고 군 지휘관이 되어 같은 직업의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얼마 전에 딸을 낳았다.





그들이 농장에 도착했다.

이미 밤이 깊어있었다.

그들이 고추 딸 때 앉아서 딸 수 있는 바퀴 달린 의자를 가지고 차에서 내렸다. 그것을 그 동네 철물점에서 샀다면서 쪼그려 앉아 고추 따면 무릎 상하니 여기에 앉아 따라고 했다.


해가 남아 있을 때 밭에서 미리 따다 씻어놓은 방울토마토를 우리는 같이 먹었다.





‘지금 여기’라는 삶의 우주에서 의미 없는 시간이 한 순간인들 있을까.


새날이 밝았다.

새로운 날엔 새로운 서사가 엮어지리.


우리는 아침을 먹기 위해 차를 타고 나가서 강 길을 달렸다. 강 위로 피어 오른 물안개가 몇 겹의 산을 중턱까지 품고 있었다. 시누이가 아, 좋다고 말했다.

가수 김종환이 아침에 이곳을 지나며 ‘사랑을 위하여’ 노래를 지었다더라고 내가 말했다. 그들이 아 그러냐고 말했다.

나는 강을 바라보며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혼잣말처럼 작게 노래를 불렀고 그들은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래를 혼자서 조금 더 부르다가 나도 그들의 대화에 합류했다.


우리는 조금 더 달려 유턴해서 순두부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옆 밭 부부와 아침에 가끔 오는 이곳에 형제들이 농장에 오면 같이 와야겠다고 남편과 함께 계획했었다.

도로가에 있는 식당엔 이른 아침인데도 여러 좌석에서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몇 년 전 해물을 먹고 장염으로 한밤중 응급실까지 가는 고생을 했던 시동생은 소고기순두부를, 나머지는 해물순두부를 주문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벌초날짜를 상의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해물 순두부 주문을 잠깐 후회하며 먹지 않은 수저로 시동생의 소고기 순두부를 조금 떠서 맛을 보았다.


추석이 10월 초니까 벌초는 9월 마지막 주에 하자고 말을 모았다.

시동생이 연세 많으신 큰 형과 누나에게 미리 전화드려 알려야겠다고 말했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는데 시동생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서 한 잔씩 주었다. 나는 아 맞다, 여기서 커피도 해결하고 가자고 말하며 커피를 받았다.




농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식당으로 올 때 사각 바구니에 담아 차에 실어놓은 노각 두 개와 호박 세 개를 내기 위해 로컬 푸드 매장으로 달렸다.


매장 마당에서 엎드려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가끔 끔뻑이는 고양이가 우리를 또 졸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시동생이 다가가 고양이 몸을 쓸어주며 말을 붙였고 고양이는 그 앞에서 발라당 드러누워 졸리던 눈을 반짝이며 애교를 부렸다.



키오스크 앞에서 내가 물었다. 얼마에 낼까? 그들이 노각은 이천오백 원, 호박은 이천 원이면 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대로 가격표에 표시해 뽑았다.

다 같이 매장으로 들어갔다.



선택의 여지가 많으면 망설임도 많아진다.


어디에 놓을까?

아직은 이른 시간이어서 비어있는 매 대가 많았다. 여기에 놓자, 아니아니 저기가 더 낫겠네 아니아니 거기가 고객들한텐 더 잘 보이겠다. 잠시 왔다 갔다 하다가 한 곳을 정하고 그곳에 섰다.

나는 가격표를 떼고 시누이는 받아서 붙이고 남편은 보기 좋게 진열했고 키 큰 시동생은 뒤에서 머리를 숙이고 바라보았다.




농장으로 돌아왔다. 잊기 전에 약부터 먹으라고 내가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각자 복용 중인 약을 먹었다.


시누이가 서둘렀다. 고추가 많이 붉었으니 어서어서 고추를 따자고, 해 올라오면 뜨거워 일 못한다고.


우리는 한 명씩 고랑으로 들어가 고추를 땄다.

고랑마다 여러 개의 바구니에 고추가 담겼다.

나는 같이 고추를 따다가 고랑에서 먼저 나와 그들이 따놓은 고추 바구니를 수돗가로 옮겼다. 장화로 갈아 신고 키 큰 고무 대야에 물을 담아 큰 식초병을 거꾸로 해 꾹꾹 눌러 물에 타고나서 고추를 거기에 쏟았다.

삼십 분 동안 고추가 식초를 섞은 물에 살균되는 동안 나는 따다 만 고추 고랑에 들어가 고추를 마저 땄다.


삼십 분 후에 식초 물에 살균한 고추를 고무 대야에 옮겨가며 흐르는 물에 3회 세척했다.


다른 고랑 고추도 먼저 다 딴 시누이는 도라지 밭으로 가서 풀을 뽑았다. 그녀는 어제 낮에 비가 와서 풀이 잘 뽑힌다고 말했다.


내가 씻어 물 빼놓은 고추를 남편과 시동생이 농막으로 옮겼다. 그들은 혹여 탄저병이 있는 건 없는지 하나하나 다시 확인해서 탄저병이 있는 고추는 그 부분만 가위로 오려내고 건조대 채반에 담아 펼쳤다.


고추를 펼쳐 담은 채반 여러 개를 남편이 건조기 문을 열어 차례로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한 손을 올려 72시간 예약을 누르고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건조기가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올여름 들어 세 번째로 딴 고추가 72시간 후에는 만지면 다그락다그락 소리가 나도록 바짝 말라있을 것이다.


우리는 탁자 의자에 앉으며 오늘은 해가 구름을 가려줘서 다행이라고 서로 말했다.


내가 고추를 세척하느라 고춧잎 등으로 어질러 놓은 수돗가를 남편이 정리했다. 물이 가득 들어있는 키 큰 물통은 남편도 혼자 쏟아내기 힘들어 시동생과 함께 기울여 쏟았다.




한 낮이 한참 지나 있었다.

국수 좋아하는 시누이가 점심엔 월남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지난번에 와서 먹어보니 맛있더라고.



시동생이 키오스크에 자기의 카드를 넣고 월남 쌈과 국수를 주문했다. 화면에 생맥주가 보였다. 나는 생맥주도 한 잔 하자고 했고 그는 네 그래요 하며 그것을 추가 주문했다.


맥주의 양이 생맥주집에서 나오는 최소한의 양인 500CC가 많아 똑같은 양인줄 알고 미리부터 부담스럽긴 했는데 몇 CC인지 작은 컵에 담긴 양이 훨씬 적어 반가웠다. 내가 말했다. 맥주 양이 적어 좋다고.



남편이 좋아해 주문한 월남 쌈은 내가 많이 먹었고 내 국수는 남편이 많이 먹었다. 나는 조금 매운 시누이 국수를 더 건져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와서 옆에 있는 마트로 들어가며 내가 말했다. 시동생은 어떤 식당 어떤 음식보다도 집에서 먹는 김치찌개를 좋아하니 저녁엔 밥 해서 김치찌개랑 먹자고.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무심결에 내 기준으로 찌개 고기를 조금만 샀다. 남편이 김치찌개엔 고기가 많이 들어가야 맛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 그렇지 참! 하며 고기 한 근을 더 샀다. 찌개에 넣을 두부도 샀다.

나는 아이스크림 박스 문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고르라고 했다. 시누이와 시동생은 누가바를, 나와 남편은 쌍쌍바를 골랐다.


우리는 마트를 나와 농장으로 걸었다.

앞에 누가바를 먹으며 걸어가는 시누이와 시동생 뒤에서 남편이 고기와 두부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한 손목에 걸친 채 두 개의 막대가 박혀있는 쌍쌍바를 반으로 가르려고 애를 썼다. 그 반은 막내인 시누이에게 주고 싶은가 보다 생각하며 나는 한 손으로 쌍쌍바를 먹으며 한 손으로 그의 마트 봉지를 그의 손목에서 얼른 빼서 들었다.

쌍쌍바가 생각처럼 쉽게 나눠지지 않아 그가 포기했다.

그는 봉지를 나에게서 다시 받아 들고 저만치 앞서 걷는 시동생 시누이 뒤에서 나와 같이 걸었다.



농장으로 들어와 우리는 열기로 후끈거리는 농막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에어컨 아래에서 우리는 낮잠 한숨을 달게 잤다.


해가 이울 무렵 남편이 먼저 일어났다. 나는 그에게 부추를 베어달라고 했다.



모기가 달라 들어 발등과 목 팔뚝 등 나와 있는 맨 살은 다 물었다. 나는 모기향을 몇 개 피워 탁자 아래에 놓았다.


부추를 다듬기 시작하자 시누이와 시동생이 방에서 나왔다.

그들도 같이 부추를 다듬었다.


그들이 다듬어 끝을 맞춰 놓은 부추는 각을 이루며 쌓여갔다. 나는 예술이 따로 없다고, 저런 게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모방해보려 해도 절대 안 되는, 내가 다듬은 부추는 따로 삐뚤빼뚤 쌓여갔다.

나는 그들의 솜씨를 신기해하며 핑계의 생각을 찾아냈다. ‘어차피 씻으면 헝클어질 부추를 저들은 왜 저렇게 처음부터 가지런히 놓을까.’

하긴 그들은 씻어서도 각지게 놓을 사람들이다. 양념 넣고 버무리면 어차피 헝클어질 저 부추를.



휴대폰을 열고 ‘신유’의 노래 <반>을 틀었다. 나는 반주에서부터 어깨를 들썩였다.


신유가 소리쳤다. '가슴을 연다고 다 보이려나 ‘

부추를 삐뚤게 올려놓으며 생각했다. 맞다고, 가슴 열고 내 속을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는 내 맘 그대로는 모르더라고.

신유가 이어서 소리쳤다. ‘평생을 같이 살아도 저 사람의 속을 아나.’

부추 끝을 잘라주려고 일어나 주방으로 가위를 가지러 가며 시누이가 말했다. “맞어, 평생 같이 살어두 사람 속 모르겠대!”

https://youtu.be/kQpsCWIw1-4?si=aEff8QZpwiyS76Jc





날이 저물었다. 김치찌개를 준비했다.


이박삼일 휴가 마지막 날 밤엔 원래 술 한 잔 하는 거라고 내가 말했고 그들이 웃었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잘못한 처신의 후회가 많다. 이땐 이랬어야 했는데, 저땐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나 후회만 있을까, 잘한 짓도 있을 것이다.


삼십여 년 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적은 유산이나마 나눈 한 부분이 우리 몫으로 왔을 때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자긴 대처로 나가 우선 자기부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한 게 없다고, 그러니 고생 제일 많이 한 시동생에게 주고 싶다고.

그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것을 바로 시동생에게 그대로 넘겨준 건 잘한 짓이었다.

지금도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멋졌다.



시동생과 남편이 소주를 한 잔씩 마셨다. 소주가 한 잔이 정량인 시동생이 한 잔 더 달라고 했다. 우리는 웃었다. 남편도 웃으며 한 잔 더 따라주었다.


낮에 밭을 비운 사이에 옆 밭 아낙이 놓고 간 복숭아를 후식으로 먹으며 우리는 큰 시누이 남편이 퇴직 후 대문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을 걱정했고, 11월에 있을 시동생의 큰 딸 12시 결혼식에 맞춰가려면 여기서 몇 시에 떠나야 하는지를 계산했다. 그리고 서로의 건강을 염려했다.



밤이 늦었다.

샤워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 티브이를 틀었다.

리모컨을 손에 든 시동생이 폭력 영화 채널에 고정하기에 내가 또 저러네, 하며 다큐를 보자고 말했다.


이젠 자극적인 사건 사고의 뉴스나 영화보다는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다.


그가 자연 다큐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그가 고향에 집을 짓고 싶어서 요즘 로또를 사고 있다고, 하루에 만 원씩도 따로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해마다 산소에 오르며 그 집터를 지나칠 때마다 옛날에 있었다는 그 외딴집 그대로가 보고 싶어진다. 살구골도, 그곳에 살던 내 가족들이 살던 모습과 초가집도, 샘가도 아름다웠을 그때의 향취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나는 시동생에게 그 집터에 옛 모양 그대로 초가집을 지으라고 했다.

마당 주위로 살구 보리수 앵두 감나무를 어릴 적 그대로 심고 샘이 있던 자리에 지금도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올 거라고 하니 거기에 샘물을 다시 팠으면 좋겠다고, 샘물 위로 포도넝쿨도 올리라고 했다.


로또만 당첨된다면 그렇게 집 짓기는 충분할 텐데 매일 따로 모으는 만 원까지 필요하겠냐고 내가 말했고 우리는 웃었다.




능력도 없으면서 특별한 사람이고 싶어 안달하던 때가 있었다.

행복은 있는 걸까, 저 산을 넘어가 보면 있을까 헤매던 시간이 길었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티브이에서 소시민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나왔다.

남편이 돈 많은 사람들은 저런 소소한 행복은 모를 거라고 말했다.


나는 누워있는 시누이 얼굴에 마스크 팩을 가만히 올려서 폈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조금 쳐다보다가 흐흐 웃었다.

나는 마스크 팩 위로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짝살짝 눌러 주었다.




새 날이 밝았다.


남편은 언제 일어났는지 이미 밖에서 풀을 뽑고 있다.

시동생 시누이가 어차피 오늘 집으로 갈 거면 일찍 나설 것이다. 그러니 식사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밥만 새로 지어서 어제 남은 김치찌개와 김만 놓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중에 옆 밭 아낙이 고구마순 나물 무침을 가져와서 단출한 식탁을 도와주었다.

남편이 뒤란에서 눈빛으로 나를 불렀다.

동생들 내려가는데 기름 값이라도 줘야 되지 않느냐고 작은 소리로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줬다고 대답했다.



특별하지 않아서 고마운 노후를 함께 하고 있는 나의 동지들, 그들이 가봐야겠다며 농막을 나섰다.



그들이 차에 올랐고 나는 한 달 뒤 벌초 때 우리 또 보자고 말했다.


차가 움직였다.

비포장의 좁은 농로를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가며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식들 학교공부는 많이 못 시켰어도 사람 교육은 박사급으로 키워내신 시부모님의 덕을 지금껏 내가 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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