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호성 Mar 02. 2024

먹고살기 바빠도, 잠시 '책'

다행히 어려서부터 책을 싫어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이건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는 대중교통으로 출ㆍ퇴근을 하시면서 항상 신문지로 표지를 감싼 책을 가지고 다니셨고, 집에서도 짬을 내서 종종 책을 읽으셨던 모습이 흐릿하게 기억난다.     


부모님은 누나와 나를 키우면서 넉넉지만은 않은 형편이었지만 책을 사는 데는 고액의 백과사전을 비롯해 각종 전집 등 금액을 따지지 않으셨다. 덕분에 그 당시에 집에 친구들이 놀러 오면 엄청나게 많은 책에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곤 했다. 잠시 돌이켜보면 작은 집이었지만 실제로 압도적인 양의 책이었고, 흔한 소파나 침대는 없었지만 다양한 크기와 색상을 가진 높고 낮은 복수의 책장들이 집안 곳곳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부모님의 결단이었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부모님이 좀 야속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엄청난 책벌레는 아니었다. 읽다가 중도 포기한 책들도 수두룩하고, 허세의 용도로 사놓기만 한 책들도 상당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미 있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모르다가 학교 추천 도서라는 이유로 같은 책을 사놓는 일도 있었다. 책을 통해 심심치 않게 마음의 양식을 쌓기도 했지만 허영심의 도구였던 적도 있었고, 제목만 읽어도 전체를 정독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휩싸여 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모든 행위는 결국 적어도 나를 책 속 활자들과 크게 어색하지 않은 관계를 만들어주는 데까지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거부감없이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나름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기꺼이 돈을 지불하며 책을 가져와서 읽고, 생각하는데 내 시간의 일부를 소비하는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그 순간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는 배부른 취향을 갖게 된 것 같다.     




가끔 새 책의 냄새가 생각날 때가 있다. 책들이 모여있는 서점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주는 냄새와 분위기가 있고, 책장에서 꽂혀있는 딱딱하고 반듯한 책의 윗부분을 살짝 당겨 꺼내는 고유한 기분이 있다. 책 하나를 당겨 빼낼 때 양옆의 책들이 이때다 싶어 빈 공간을 파고들어 틈을 메우다 보면, 불현듯 눈에 띄어 계획보다 더 많은 시간을 죽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런 날은 뜻밖의 과소비를 하게 되기도 한다.     


책. 그중에서도 종이책은 왠지 조만간 휴대전화나 컴퓨터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처럼 위태위태하면서도 아직은 남아있고, 앞으로 절대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는 존재 중의 하나이다.

지구인들이 마음먹고 내일부터 종이책 대신 IT 기기로 모두 대체하기로 결의해버리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시대 속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아직은 자신만의 번식 방법으로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책은 스스로 제 살길을 끊임없이 찾아가길 바란다.    

 



지구인들은 먹고살기 바쁘다.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책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먹고살기 바빠도 ‘잠시’ 책이라고 생각하는 주변인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비는 다시 태어나 책이 된 모양이다 - 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