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반려동물의 시대이다. 키우고, 돌보고, 사랑하고, 열열하게 애정한다. 가끔 카페나 특별한 장소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는 반려동물을 발견했을 땐 나와 처지를 바꾸면 어떨지 하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다.
예상이나 했겠는가. 이 정도로 사회가 아이들 대신 각자의 반려동물들로 넘쳐나는 사회가 될지를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애완활동 시작은 금붕어였다. 세 마리를 키우다가 두 마리가 된 사연은 기억나지 않지만, 두 마리에서 한 마리가 된 이유는 가족 모두 명절에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는데 어항 밖 바닥에서 더 이상 입을 뻐끔거리지 않는 상태로 발견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고민 끝에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우발적 사고사(事故死)였고, 나머지 한 마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을 다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잊힐 때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아버지께서 갑자기 황색 강아지를 데리고 오셨다. 어느 종인지, 어떤 이유에서 우리 집에 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지만 그 아이를 ‘복실이’라고 작명하고 누나랑 같이 온 동네를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정말 노하우라곤 전혀 없는 돌봄의 경험으로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지쳤고, 그런 자식과 자식의 반려동물을 보는 부모님은 더욱 지치셨을 것이다. 그래서 ‘복실이’도 곧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옮기게 됐다. 시골 저수지 둑길을 이름을 외치며 같이 뛰어다녔던 기억은 아직 잊지 못하는 기억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그다음 명절에 할머니 댁에 갔었을 때 ‘복실이’는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들과 성인이 되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나의 ‘복실이’에 대한 애정은 거기까지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반려동물은 사라졌다. 거의 20년 가까이 무엇인가를 키우거나 돌본다는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욕구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군 복무 시절 집에 잠깐 들렀는데 집에서 꼬리를 꼿꼿이 들고 돌아다니는 고양이 두 마리를 발견했다.
상황은 이랬다.
누나 친구 중에서 고양이를 많이 키우는 지인이 있는데 갑자기 해외로 가게 되면서 주변에 원하는 친한 지인들부터 분양을 하던 와중에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누나가 분양받게 된 것이었다. 나는 몰랐다. 엄마와 누나가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말이다.
그날부터 부대에서 숙소 생활을 하다가 가끔 집에 올 때면 볼 때마다 몰라보게 커진 고양이 두 마리가 낯선 나를 경계하며 하는 행동들을 그냥 가끔 귀엽게 쳐다보다가 또 몇 번 기 싸움을 하기도 하며 그다지 기억에 남지는 않을 고양이와 나 사이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부대로 복귀하곤 했다.
그러다 누나는 결혼했고, 나는 전역을 했다. 그렇게 나는 고양이들과 동거를 하게 됐다. 그냥 좀 귀찮지만 보고 있으면 신기하고 귀여운 동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는 행동이 강아지와는 분명히 다른,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한 생명체였다. 더도 덜도 없이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그러다 뜻밖의 수술로 집에서 장기간 요양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적막 가득한 집에서 엄마는 고양이 두 마리에게 남다른 따뜻함을 느끼기 시작하신 것 같았다. 딸은 시집가고, 아들은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어두운 집안 분위기에서 그래도 문득문득 엄마를 미소 띄게 하는 고양이가 난 그때 처음으로 고맙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