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만 되면 케이크를 기분 내는 용으로 직접 사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선물로 흔하게 받기도 한다. 그런데 개인적인 오지랖인지 모르겠지만 먹다가 냉장고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지는 대부분의 케이크들은 나에게 상당한 죄책감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최근부터 기분은 조금 덜 살지만 밀려오는 후회를 줄이기 위해 작은 조각 케이크로 조촐한 촛불 끄기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 중에 문득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칼로 반쯤 잘려 있는 케이크를 쳐다보며 그깟 빵조각이 뭐라고 잠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처음엔 다 먹지 못하고 남겨진 케이크가 아까워서 드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케이크에 감정이 없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마무리로 매듭을 지었는데, 우리가 흔히 세상을 선하게 하는 ‘역지사지’라는 취지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너무 억지스러운 대상이자 결말이 생뚱맞다고 느껴졌지만 그 대목에서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예전 살던 동네에 ‘두 발로’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이집이 있었다. 붙여 읽게 되면 ‘두 발로 어린이집’인데 꽤 규모도 큰 어린이집이었다. 나는 처음에 어린이집인 건 알겠는데 ‘두 발로’ 는 도대체 뭘까 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보통 어린이집 앞에는 꽃 이름이나 동물 이름. 아니면 동네 이름 같은 누가 봐도 알 수 있고 아이들과 부모들이 모두 좋아하는 싱그럽고 귀여운 이름들이 붙는 게 일반적인데 입에 붙지 않는 저 이름은 도대체 무슨 의미의 단어일까 고민해 봤었다.
다른 나라 단어인가? 내가 모르는 의태어나 의성어 인가?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다시 관심 밖으로 던져놓은 채 무감각하게 간판을 보고도 처음 보느냐 지나가기도 하고, 술에 취한 채 무심하게 지나쳐버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느닷없이 궁금증이 풀리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잘 지나치지 않던 시간대의 어떤 오후. 나에게는 어정쩡한 시간이지만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마치고 하원을 하는 시간대였다. 우연히 그 시간에 앞을 지날 일이 있었는데, 어린이집 안에서 아이들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아! 한방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저 생각을 못했을까?’에 한 방. 그리고 ‘저 단어를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을 만큼 나는 그동안 많은 것을 얼마나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고 있었나.’ 하며 또 한 방이었다.
집에 돌아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짧지만 얕지 않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깊게 새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에 한창 바쁘게 살아가야 할 시기에 우연히 얻게 된 병으로 수술을 하고 힘든 재활 기를 거치며 나는 그 의미를 매우 완벽히 이해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해의 영역에서 ‘당연함’은 그 논리력을 상실한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에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전까지 숫자 0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감에 있어서 당연함을 만능 수학공식처럼 아무 데나 대입하다 보면 정작 쉽게 풀려야 할 문제가 어렵게 꼬이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당연함을 인생에 아무렇게나 붙여대다 보면 어느새 옆에 우연처럼 와있는 행운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니 항상 우리가 이 순간 느끼고 있는 행복감을 나 자신에게 당연하다고 주입해서는 안된다. 놀랍도록 경이로운 인간의 적응력은 때론 기적을 선사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행복 앞에서 무기력하게 남 탓만 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아직 나도 문득문득 느끼는 행복감을 마치 어제부터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거만하게 다룰 때가 있지만, 또 때때로는 행운과도 같은 행복이 언제, 어디서부터 내 옆에 와있었는지를 생각하며 잠시 시간을 보내 보기도 한다. 그렇게 잠시 아까운 시간을 생각하는데 소비하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만 한다는 고집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다 보면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또 어떤 행운이 찾아올지 기대되기에 조금 설레는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도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