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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May 23. 2023

새벽 두 시의 편지

난 달아나, 당신이 집과 일과 고양이를 버리고 따라오지 않을 곳으로.


당신은 잠에서 깨도 좋으니 나보고 옆에 있으라 하지. 못 자도 좋으니까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에 있으라고 해. 내가 이불만 부시럭대도 눈을 뜨고, 내가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쳐서 귀마개를 끼면서도. 내가 꿈꾸면서 욕을 하고, 주먹으로 창틀을 내려쳐 멍이 들고, 당신 배를 퍽 때려 억 하고 깨는데도 당신은 내가 따땃한 온수매트 위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두 다리 쭉 뻗은 채 눕길 원해. 소파에서 담요만 덮고 모로 밤을 지새우거나, 서재에서 이불 한 장 깔고 웅크려 자다 감기에 걸리지 않길 원해. 안쓰럽다면서 말이야.


하지만 당신은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할 테고 잠을 설친 얼굴엔 그늘이 지겠지. 박탈된 수면이 당신의 얼굴을 점점 꺼멓게 칠할 거야. 당신은 침대를 탁탁 두드리며 오늘은 꼭 침대에서 자겠다고 약속을 받아내지만, 자기야, 새벽 한 시, 한 시 반, 두시 반, 시간을 가늠해 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이쯤이면 나가도 당신이 모를 거야. 숨을 죽이고 이불 위를 지나 앞꿈치로 땅을 디뎌. 고양이가 눈을 떠서 얼굴을 돌려. 괜찮을 거야. 소리는 안 날 테니까.


위협 없이 평안한 밤을 보내기를,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머물기를.


내가 없으면 당신의 잠이 더 깊다는 걸 알잖아.



한때는 당신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지. 당신이 아기새 같았어. 폭풍우에 전 날개를 접고 누운 작은 새 말이야. 비와 바람, 열풍과 눈보라로부터 당신을 지키겠노라 혼자 맹세했어.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슬프게 하지 않겠다 다짐했지. 하지만 자기야, 내가 당신을 지킨 밤이 얼마나 될까. 당신이 나를 지킨 밤의 십분지 일은 될까. 당신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밤에 있어줬고, 독감에 걸린 새벽에도 곁에 있었어. 죽고 싶다고 뚝뚝 울 때도 가만히 옆에 있어줬지. 내가 잠에 들 때까지 안아줬고, 새벽에 나가지 못하게 내 손을 꽉 잡고 잠들었어. 당신이 나를 살린 무수한 밤이야.


하지만 자기야, 당신이 언제까지 나를 보살펴야 할까. 우린 분명 연인이었는데 지금 난 당신의 식솔이야. 사람 둘과 고양이 하나를 먹여 살리려 당신은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해서 열 시에 퇴근해. 주말에도 일을 하러 가지. 그동안 나는 소파에서 볕을 쬐고 글을 끼적이고 책을 읽다 낮잠을 자고 휴대전화 게임을 해.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파 오면 만두를 쪄먹고 다시 누워서 휴대전화 속으로 빠져들어. 고양이가 날 보며 울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아. 눈을 마주치면 죄책감을 느낄 것 같거든. 당신이 카톡도 읽지 못할 만큼 바쁘게 일하는 동안 나는 당신이 산 집에서, 당신이 돈을 낸 전기로 티브이를 보고, 당신이 채워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어. 새벽엔 일출이 보이고 오전엔 하얀 햇살이 들어오고 오후엔 감색 노을이 내리쬐는 집에서, 나는 고양이보다 게으르게 누워있어.  


당신은 내가 회복 중이라고 말하지만, 자기야, 대체 누가 일 년 반동안 회복 중이야? 그리 대단치도 않은, 남들도 다 겪는 성희롱에서 회복하는 게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버려지듯 그만둔 직장, 잘 나가는 가해자,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 같이 자리에 있었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사는 동료. 나도 그들 중 하나이고 싶어. 나도, 아무렇지 않고 싶어.


잠에 못 들고 입맛도 없어. 읽고 쓰지도 못 해. 걸려오는 전화를 모두 피하고 문장을 끝맺지 못 해.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것도 없어. 만나고 싶은 사람도 즐거운 일도 궁금한 것도 없어. 땅이 계속 날 잡아당기는 기분이야. 설핏 잠들면 끌려들어갈 것 같아. 다시 병원을 다니곤 있지만, 이번엔 나아질까? 영원히 이렇게 지낸대도 당신이 나를 좋아해줄까?



자기야, 내 삶은 이미 끝나버린 영화야. 아는 결말을 되풀이하고 있어. 영화관이 아직 문을 닫지 않았다는 이유로 릴을 되감고 또 되감어. 나는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


하지만 어쩌면, 밤새 깨도 좋으니 따뜻한 침대에서 자라고 말하는 당신이 있는 한은, 고요한 얼굴로 나를 이해하려 애쓰는 당신이 있는 한은, 내 삶도 살만할 거야. 재미도 있겠지. 가끔씩 행복한 순간도 올 거야. 다 아는 영화라도 감동받을 수 있는 거잖아.


당신의 다리를 베고 누워 삶을 바라보는 오후처럼 말이야. 내가 당신의 오른 다리, 고양이가 왼다리를 베고 있었지. 당신이 웃으며 물었어. "왜 둘 다 나를 가운데서 베고 누워있는 거야?" 나도 웃었지. "그야 우리 집 가장이니까 그렇지." 당신이 고양이를 데려왔고 나를 들였지. 우리는 당신을 중심으로 모여있었어. 그런 오후면 이대로도 삶이 괜찮을 것 같았어.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꿈을 이루지 못해도, 큰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대도 당신과 함께하는 평온한 순간에 대한 기대만으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어.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어.



하지만 홀로 깨어있는 새벽에 나는 참을 수 없이 달아나고 싶어져. 내일을 위해 잠든 당신과 내일이 없는 나, 고요히 숨을 쉬는 당신과 가슴이 꽉 죄어와서 답답한 나. 내가 등을 돌리는 소리에도 퍼뜩 깨어 "잠이 안 와?"하고 토닥이다 잠 드는 당신.  날 걱정하는 당신의 말간 얼굴. 날 견뎌내는 당신의 피로한 얼굴.  


당신은 날 참아내고 있어. 내가 아프고 불안정해서, 나를 인내하고 있어. 괜찮아지기를 바라며 견디고 있어.

이해하려 애쓰는 당신의 정수리, 나오지 못한 말, 입 안에서 흩어진 한숨, 내밀다 만 어정쩡한 팔.

어쩌다 내 아픔이 당신의 고통이 되었을까. 당신의 삶이 내게 끌려다니고 있어.


자기야, 어쩌면 사랑은 오래전 증발했고 남은 건 책임뿐일지도 몰라.


내가 없으면 훨씬 가벼울 걸 알잖아.




새벽이 오기 전, 난 달아나. 피곤에 전 당신의 얼굴을 피해 도망쳐. 있는 힘껏.


멀리서 당신의 숨소리가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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