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묻다
어둠이 짙게 깔린 퇴근길이 무색하게, 네온사인의 빛들이 검은 공기를 촘촘히 파고든다. 역 안은 낮보다 환한 듯 하지만, 그 빛은 이상하게도 시리도록 차갑다. 플랫폼에 모여 선 사람들의 그림자가 발밑에 겹겹이 흩어져 있다.
서 있을 자리조차 없는 만원 전철이 들어오고, 나는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 움직일 틈조차 없다. 낯선 이들의 어깨와 어깨가 맞부딪히며 지친 숨결이 뒤엉긴다. 그 속에서 나는 문득 고립감을 느낀다. 수십 명의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서 있는데도 나는 어쩐지 혼자인 것 같다. 군중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마치 투명한 벽 안에 갇힌 듯 외톨이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무언가 잘못된 듯한 예감이 스며든다. 불안은 언제나 이런 틈새에서 고개를 든다. 몸은 무리에 속해 있는데, 마음은 홀로 떠다니고, 그 불일치가 나를 조용히 흔든다.
나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북을 켠다. 글자는 눈앞에서 흘러가는데, 머릿속에는 한 줄도 남지 않는다. 덜컹거리는 차체의 진동, 낯선 사람의 향수 냄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 모든 것이 겹겹이 쌓이는데,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더 낯설어지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나는 누구인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같은 전철을 타고 있지만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알 수 없다. 눈앞의 목적지는 분명한데, 내 인생의 목적지는 왜 이토록 흐릿한 걸까.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에요?"
나는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결국 입 밖에 나온 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몇 살의 이수아입니다."
라는 익숙하고 안전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난 뒤,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스며들었다. 나는 사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순간에 가장 나다워지는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은 목구멍에서 멈추고 말았다. 직업은 내가 하는 일이었지, 내가 누구인지를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했다. 마치 명함 한 장이 떨어져 나가면, 그 순간 나도 함께 지워질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문득 떠올렸다. 인간이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이 오래된 질문 앞에서, 데카르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려 했다. 감각도, 세계도, 심지어 신의 존재까지도. 끝내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는, 지금 이 순간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뿐이라는 결론이었다.
그 깨달음은 어느 출근길에 찾아왔다. 전날 과음으로 몸은 무겁고, 전철에 몸을 싣는 것조차 버거운 날이었다. 당장이라도 눕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한 채, 전철은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창밖의 물결은 쉼 없이 흘러가는데, 나는 누군가가 되기엔 너무 피곤한 상태였다. 그 순간 뜻밖에도 가벼운 충동이 일었다.
"강물에 몸을 맡기면 편해질까?" 그 생각에 흠칫 놀랐지만, 곧바로 이웃한 삶의 무게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솟구쳤다. 생각과 감정이 뒤엉킨 그 찰나에 나는 알았다. '생각'만으로는 결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 재단한 정체성이 아니라, 가슴의 떨림이 나를 더 깊게 규정한다는 것을. 그 찰나의 경험은, 내가 나로 존재하는 근거가 단지 사유의 계열이 아니라, 나를 흔들고 세우는 감정들의 복합성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머릿속을 스쳐가는 수많은 사고들보다, 나를 더 깊이 흔들고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감정이었다. 불안과 설렘, 두려움과 희망. 그 뒤엉킨 감정의 결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만약 존재의 기준이 단지 '생각한다'에 머무른다면, 생각을 재현하는 기계 또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대답을 내놓는 모습을 보며 나는 데카르트의 문장을 떠올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감정한다, 고로 존재한다.”
감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울고 웃는 일이 아니다. 두근거림 속에서 결정을 내리고, 불안과 설렘이 동시에 엄습하는 순간, 슬픔과 기쁨이 얽혀 터져 나오는 그 체험을 말한다. 데카르트가 ‘생각한다’를 통해 정신의 자각을 증명했다면, ‘감정한다’는 말은 신체와 정신이 하나로 묶여 외부 세계와 부딪히며 반응하는 인간만의 방식을 드러낸다. 이성적 판단과 생리적 떨림이 동시에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존재하고 있음을 안다. 기계가 생각의 형식을 재현할 수 있을진 몰라도, 감정한다는 이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체험은 여전히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아있다.
전철 창문에 비친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겹겹의 빛과 그림자 속에 비친 모습은 분명 나인데도 낯설다. 그 낯섦이 오히려 나에게 속삭인다.
너는 누구인가.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그의 말은 정답을 알려주는 명령이 아니었다. 끝없는 질문을 시작하라는 초대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직업으로도, 관계로도, 심지어 생각으로도 온전히 정의될 수 없는 존재이다. 정답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자유롭게도 한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답은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우리를 살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일까.
이 질문은 내 안에서 메아리처럼 오래도록 울리고 있다. 가끔은 무겁고, 가끔은 날카롭다. 그러나 그 질문 덕분에 나는 여전히 나를 찾고 있고,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