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59. 삶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참을 줄 아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인내할 줄 알라. 현명한 사람은 늘 참을성이 약한데, 지식이 많아질수록 조급해지기 때문이다. 아는 게 많아지면 만족하기 어렵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가장 많이 의지하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참아야 한다. 참을 때 비로서 귀중한 평화가 생기는데, 이는 당에서 누리는 행복이다.
12월 1일.
문득 지난해 같은 날이 떠오른다. 그 시기엔 매장에서 근무하며 책을 정리하고, 매달 진행할 출판사 광고를 섭외하며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서점 현장에 서 있었고, 새로운 직원들과 호흡을 맞추며 익숙한 고객들을 맞이했다. 광화문 광장 시위는 일상의 풍경처럼 이어졌고, 그 속에서 하루가 묵묵히 흘러갔다.
그 와중에도 사회복지 수업을 듣고 있었고, 전산회계 1급 자격증을 위한 공부도 병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던 중, 어둠의 그림자가 아주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복직한 지 겨우 6개월. 그해 11월 초 건강검진에서 왼쪽 유방에 이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런 증상도 없던 터라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당시 곁에 가족이라곤 걷지 못하는 친정엄마뿐이었다. 두 아들은 군 복무 중이었고, 군 생활을 잘 해내길 바라며 인터넷 편지를 보내고, 전화가 오지 않을까 초조하게 휴대폰을 확인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병명을 엄마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형제들은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 “몇 기냐”고 물었지만, 정작 마음의 균형을 잡기 어려운 상태였다. 위로나 걱정의 말조차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고, 병원을 알아보고 다니는 일도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 가장 힘든 것은 몸보다 마음이었다. 누구에게도 충분히 털어놓지 못한 채 두려움을 홀로 삼켜야 했다.
엄마에게 모든 사실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딸의 보살핌을 바라는 마음과 동시에, 진실을 알게 될 경우 더 깊이 아파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시기 엄마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중환자실에 입원하기까지 했고, 엄마의 병원 일정과 치료 일정을 동시에 관리해야 했다. 끝없는 검사와 비용, 예약 일정은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졌다.
어느새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선항암을 받고, 수술을 하고, 방사선 치료까지 마쳤다. 다시 항암을 시작하려 했으나 한 차례만에 몸이 버티지 못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부작용으로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고, 회복의 시간은 끝없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사이 엄마의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큰아이는 제대를 맞았다. 또 한 번 겨울이 찾아왔다.
지금도 학교를 꾸준히 다니고 있고, 글쓰기는 삶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회사 동료들과의 소통은 줄어들었지만, 학교 친구들과 같은 병을 겪는 친구 한 명과는 깊은 마음을 나누고 있다. 몇 달 전부터는 교회에 나가 조용히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갖고 있다.
몸은 예전의 상태와는 다르다. 그러나 지난 일 년 동안 이어진 부작용을 버텨냈고, 흔들리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그 인내 덕분에 가족 안에서 큰 갈등 없이 서로를 지킬 수 있었고, 특히 친정엄마와의 관계도 조심스러운 버팀 속에서 유지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암 3기에 어떻게 걷지 못하는 엄마를 모시고 사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엄마의 마음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하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동시에 엄마는 가장 큰 힘의 근원이 되어 주고 있다.
힘든 날에도 결국 마음을 붙잡아 준 것은 글이었다.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래고, 흔들리는 시간을 스스로 다독이면서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수많은 순간을 참아냈기에 지금 이 시간, 조용히 다시 글 앞에 앉아 있다.
12월 한 달의 마무리와 새해 계획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지혜롭게 견뎌낸 스스로에게 작은 칭찬을 건네고 싶다.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아팠지만 멈추지 않았다. 인내로 버텨낸 시간들이 지금의 자리까지 데려왔음을 깊이 느낄 뿐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다시 다짐한다.
살아낸 하루하루를 잊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내일도 묵묵히 걸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