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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개비꽃 Jun 06. 2023

일상의 기적

                              

                                                         

 아침에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탔다. 목적지에 이르러 출구를 향해 걷던 중 갑자기 어지러워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출근길의 직장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미안해서 할 수 없이 119 구급대원의 도움으로 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약속은 무산되고 혼란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며칠 후 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별일 없지?”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늘 하는 첫인사말이다. 나는 “별일 있었어!”라고 말한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친구는 사는 동안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면서 계단을 내려온 뒤여서 망정이지 그만하기 다행이라며 따뜻이 달래준다.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지내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고맙고 별처럼 달처럼 아름다운 것인지 새삼 느낀다.


 모 일간지에 연재했던 작가 k 씨의 글을 찾아 읽는다. 2012년 2월이니까 10년 전 것이다. 나는 좋은 글이나 그림을 스크랩해서 모아두는 습관이 있는데 가끔씩 꺼내 읽으면 느낌의 차이를 알 수 있고 글을 쓸 때 도움이 된다. 어느 화가가 ‘일상’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그림을 보고 쓴 글이다. 그림은 눈이 쌓인 황량한 벌판을 낡은 기차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달려오는 유채화다. 


 이 그림을 보며 작가는 사유한다. 거칠고 쓸쓸한 벌판 같은 삶 속에 ‘일상’이라는 이름의 기차가 끝없는 레일을 타고 시간 속을 달리는 것이라고.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리는 동력의 리듬감으로 기차 안의 사람들은 끄덕끄덕 졸기도 하고 삶은 계란이나 시원한 맥주도 마시며 무료함을 달래기도 할 테지만 바로 그런 게 일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차가 순식간에 탈선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다. 일상이라는 무쇠기차는 이렇듯 무서운 힘을 동시에 갖고 있다. 공포에 질린 기차 안 사람들은 지루한 듯 하품하던 몇 초 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평온한 시간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10년 세월을 더 살고 난 지금 k 씨의 글을 읽으니 가슴이 서늘하기까지 하다. 오늘 이 시간까지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온 게 기적일 만큼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렇게 있다’는 사실이 묘한 기분이다. 그러기에 꿈을 성취하고 요즘말로 잘 나가는 사람을 너무 부러워할 일도 아니지 싶다. 일상이 무료하고 지루하다는 말도 해서는 안 되는 일,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하고 마음과 몸을 다스리면서 낟가리를 쌓아 가면 풍요로운 삶으로 이어지리라. 제 일을 하면서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오늘 하루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은 어떨까. 전쟁의 포화 속에 신음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예전의 일상이 더할 수 없이 그리울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한 따듯한 식탁, 치즈 바른 빵과 커피 향,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과 온갖 꽃이 피어나는 꽃밭,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지던 평범한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픈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까. 마음이 아프다. 가족과의 생이별, 피 흘림, 피난살이의 고통 등등 얼핏 얼핏 영상으로 보여주는 전쟁터의 공포를 생각하면 평온한 일상이 확실한 행복이고 위대함인 것을 절감한다. 


 세상이 뒤숭숭하다. 고물가. 고환율로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지진 홍수 태풍이 일상을 잃게 한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업무 스트레스와 사업 실패로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힘들지만 소중한 하루의 일상을 잘 살아냈으면 싶다. 너무 내일이라는 미래에 결박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 

 친구는 햇빛이 잘 비치는 베란다에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를 심고 가꾸기에 일상의 낙을 찾는다. 시들한 잎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탐스런 꽃을 피우면 행복감이 밀려온단다. 나는 한강을 산책하며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한다. 오전과 오후, 봄여름 가을 겨울, 계절과 햇빛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강변 풍경을 보노라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다시는 구급차 불러 응급실에 가서 CT 찍고 온갖 검사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 오늘도 별일 없이 평온한 일상의 기적을 맛보며 한 날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한다. 노년에 접어든 나는 오늘이 내 생애에서 가장 젊은 날이고 가장 아름다운 날의 절정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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