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데 우선으로 잘해주지 말아요

그토록 미안하고 단단한 나의 땅

by 훌륭한어른이
그들은 별의 영구 불변성을 의심했지만, 노예 제도의 정당성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나도 잘 몰라!"

"됐어! 뭘 그런 걸 물어봐."


퉁명스럽고 귀찮다는 말투. 투박하다 못해 거친 어투를 뱉어낸 주인공은 바로 나다. 피해자는 우리 아버지. 그때는 아무 생각 없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차 싶다. 그리고 내가 우스워진다.


'너 아빠한테 그렇게밖에 할 수밖에 없었냐?'

내가 나를 나무란다. 아무 대꾸할 수 없다.




나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쓰인다. 원체 그렇게 태어났다. 어렸을 적 모범생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이유는 진짜 올바르고 착해서가 아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성인이 된 후 지금까지도 나는 다른 이들의 반응에 단단히 묶여있다. 내 말에 상대방의 표정이 좋지 않아도 걱정. 대꾸가 없어도 걱정. 분위기가 가라앉아도 걱정. 걱정이라는 큰 바퀴가 꾸준히 돌아가는 데 그 가운데 축에는 타인의 눈빛과 표정이 크게 자리 잡혀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 타인의 긍정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종속적인 사람 같아 그런 특징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렇게 태어난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나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었다. 유튜브로 인간관계에 도움이 될만한 영상을 찾아 시청했다. 이혼숙려캠프, 결혼 지옥, 나는 솔로를 재미로만 소비하지 않고 배울 점을 짚었고 빌런 출연자와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면 반성했다. 혹은 꼭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직장동료, 우연히 스치는 사람, 친구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에게 퉁명스럽게 대했던 못난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부끄러웠다. 스쳐 지나가도 놀랄 것 없는 사람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으려 노력하는데 내 가족에게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잘해줘야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다. 가족은 잘못해도 용서해 주는 사람이다.


'엄한데 잘해주지 말고, 네 가족한테나 잘해.'

나는 둥둥 하늘에 걸려있는 구름을 소중하게 바라본다. 구름은 유유자적. 언제든 나를 지나친다. 그 지나치는 모습이 신경 쓰인다. 잠시 아래로 내려와 포근히 안아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구름은 따스한 품이 없다.


나는 땅을 딛고 있다. 땅은 단단하다. 아무리 내가 쿵쿵거려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굳건히 받쳐준다. 꿈을 꾸고, 상상하고, 몽상을 해도 발을 디뎌 생활하는 곳은 결국 땅이다. 땅은 우리 가족이다.




당장에 살가운 아들은 되지 못하겠다. 나처럼 무뚝뚝해서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는 게 사랑 표현의 전부인 우리 아버지를 갑작스러운 변화로 놀라게 하거나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다. 다만, 조금 더 상냥하게 대답하고, 모르시는 게 있으면 조금 더 친절하게 알려드리겠다. 비옥한 땅을 위한 소심한 감사 인사라 할 수 있겠다.



keyword
이전 23화행운에 대하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