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는 누구를 정할까?'
아마딜로 소인들은 손을 깍지 끼며 모두 모였다. 서로가 깍지 낀 손으로 연결되었다. 그들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일체가 되어 미래를 도모했다. 그리고, 거기서 결정된 의견들은 조나단에게 전달되었다.
아마딜로 소인들은 살아가기 위해 거인이 필요했다. 거인들은 키가 클수록 지도자로 뽑힐 가능성이 많아 아마딜로 소인들과 협업하기를 원했다. 아마딜로 소인들은 머리에 흡착판이 있어 거인들의 발바닥에 붙어 거인을 지탱했다. 탄성이 많은 몸의 피부들은 무거운 거인의 몸무게를 고통 없이 견딜 수 있었다. 아마딜로 소인들은 떼를 지어 거인들의 발바닥에 틈 없이 붙었다. 그러면 거인의 몸무게를 골고루 분산시킬 수 있다.
거인들의 피에는 대사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그린돌핀이란 특수 물질이 있었다. 그것은 초록색 거인들의 몸이 태양빛을 받을 때 합성되었다. 아마딜로 소인들은 거인들과 협상해서 거인의 발바닥에 붙는 순간 흡착판으로 거인의 피에서 일정량의 그린돌핀을 흡수했다. 소인들의 크기가 거인과 매우 차이가 나서, 거인에게는 미미한 양이었다.
거인의 세계에 아마딜로 소인들이 나타난 것은 인간 조나단과 함께였다. 조나단은 아마딜로 소인들을 배낭에 넣어 어깨에 지고 돛단배에서 해변가 모래에 첫 발을 디뎠다.
바닷가를 걷던 그랜드 아이즈는 우연히 조나단을 발견해 집으로 데리고 왔다. 돛단배도 자신의 영지인 해변 숲 속에 숨겼다. 거인인 그랜드 아이즈의 눈에 조나단은 돌쟁이 아이처럼 보였다.
아이 같은 작은 존재가 거인들의 말을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웅얼거릴 때 그랜드 아이즈는 당황했다. 뭔가 협상을 시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랜드 아이즈는 조나단에게 종이와 크레용을 깎아 주었다. 아들이 쓰던 크레용이었다.
조나단은 아마딜로 소인들로부터 거인국의 위치와 언어를 전달받았다. 소인들은 조나단의 손바닥에 그들의 작은 손바닥을 흡착시켰다. 고무 같은 손가락들을 최대한 밀착시키면서 셀 수없는 아마딜로 소인들이 조나단의 손바닥에 붙었다. 그들의 손가락 끝에는 빨판들이 있었다.
조나단은 학습이 아니라 순전히 물질로 기억이 전이되는 게 신기했다. 아마딜로 소인들은 손바닥을 통해 조나단의 뇌에 거인국의 위치와 언어, 정치 체계를 입력시켰다. 지식이 물질로 전이되어 조나단의 뇌에 입력되었다. 마치 키보드를 쳐서 컴퓨터에 정보를 저장한 것처럼, 조나단의 뇌에는 소인들의 역사와 현재 상황, 그리고 그들이 가진 정보들까지 그대로 입력되었다.
조나단에게 물질을 주입했던 많은 아마딜로 소인들은 조나단의 손바닥에서 인디언 핑크 색 액체로 변해 땅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동그란 물방울들로 흩어져 있다가 증발해 버렸다. 수 백명의 아마딜로 소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나단은 거인어로 종이에 파란 크레용을 사용해서 거인국에 도착한 이유를 썼다. 그랜드 아이즈는 조나단이 쓴 글들을 돋보기를 쓰고 읽었다.
"헤븐 숲 속 나라에서 아마딜로 소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호퍼족이 헤븐 숲을 침범해 와 수천 년을 살아온 고향을 떠나왔습니다. 왕이 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거인들에게 왕을 뽑는 것은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10년에 한 번씩 거인들은 왕을 뽑는 대회를 치렀는데 키가 큰 거인이 유리했다. 거인들의 키는 비슷비슷했지만, 거인들 중 가장 키가 큰 사람이 왕이 되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의 키를 키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키 크는 운동도 많이 시켰다. 거인들의 나라에서는 농구가 가장 인기 스포츠였다. 키를 키우는 데 유리했기 때문에 아기가 걷기 시작하면 농구를 가르쳤다. 어쨌든 거인들 중 조금이라도 더 키가 큰 이들은 다 왕을 꿈꿨다. 왕의 임기는 10년이었다. 왕의 선출 나이도 45세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50대가 되면 키가 조금씩 줄어든다고 상식처럼 알려졌다.
운명이었을까. 해변가에서 조나단이 우연히 만난 그랜드 아이즈는 거인들 중에서 두 번째로 키가 커서 한 번 왕을 뽑는 대회에서 떨어졌었다.10년 전에 뼈아픈 패배를 한 후 그랜드 아이즈는 아들의 키를 키우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청년기까지 키가 커야 30대, 40대에 왕이 되는 대회에 도전이 가능할 것이다. 그랜드 아이즈는 조나단에게서 아마딜로 소인에 대한 설명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아마딜로처럼 공모양으로 동그랗게 몸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몸을 펴면 4센티 정도의 인간 모양으로 변했다. 머리 위에 흡착판이 있었다. 눈, 코, 입을 보면 인간이었다. 남녀구분이 없는 고무로 이루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 그들에게 몸속의 그린돌핀을 조금만 나누어 주면 키가 4센티 클 수 있다. 그거면 게임이 끝나는 것이다.
조나단은 아마딜로 소인들은 흡착판으로 발바닥에 붙기만 하면 분리되지 않아 심사위원들이 발바닥 피부가 변형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현재 거인 왕국의 법 상 어떤 규정도 없으니 무조건 키만 크면 되지 않냐고 그랜드 아이즈를 부추겼다.
"일단 왕이 되고 나서 법을 바꾸면 되죠. 아마딜로 소인들이 발바닥에 붙어 있어도 키로 인정한다는 것을 법으로 제정하면, 아드님까지도 세습이 가능할 수도 있어요."
그랜드 아이즈는 약간 걱정이 돼서 물었다.
"아마딜로 소인들을 계속 부착해야 하나요? 언제까지나?"
"왕을 그만두시면 언제든지 떨어뜨려도 되죠. 그때쯤이면 오히려 그랜드 아이즈님이 같이 있기를 원할 수도 있어요. 무척 힘을 주는 존재거든요."
"그건 아니야. 거추장스럽지만 권력을 위해 필요한 거야."
그랜드 아이즈가 고개를 저으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을 때 조나단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딜로 소인들은 한 달에 한 번 그랜드 아이즈의 몸에서 떨어졌다. 하루 종일 모두 모여 손을 잡고 뭉쳐 있었다. 조나단은 24시간 휴식이 소인들에게 거인들의 무게를 지느라 지친 몸을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시간이라고 했다. 하루를 쉰 후 아마딜로 소인들은 다시 몰려와 그랜드 아이즈의 발바닥에 붙었다.
10년에 한 번 왕이 되는 행사가 열렸다. 거인들은 맨 발로 왕국의 큰 나무 광장에 모였다. 그린 타이탄 족은 소수 민족이었다. 다 모여도 만 명 남짓 했다. 주변의 다른 종족보다 훨씬 큰 땅을 지배할 수 있는 어마무시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무도 쳐들어 올 수 없는 큰 힘이었다. 거인족들은 키를 키운다는 명목 아래 자손들의 체력 훈련을 철저히 했다. 그래서, 강력한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랜드 아이즈는 32살 때 아깝게 왕이 되지 못했었다. 이번에 맨 발로 나무 아래서 키를 쟀을 때 그랜드 아이즈의 키는 10미터 44센티였다. 2위인 거인보다 2.5센티가 컸다. 거대한 거인의 발바닥은 뭔가 우둘두둘해 보여, 심사위원들은 발을 점검했다. 단단한 것들이 붙어 보였지만 워낙 큰 발에 균일하게 있어 발바닥 피부가 두꺼워져 보였다. 그랜드 아이즈는 그냥 웃으며 가볍게 말을 던졌다. 혹시 나중에 문제가 될까 봐 최대한 가볍게 넘어갔다.
"많이 걷고 운동을 최대한 했어요."
어떤 인과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거인들은 그래서 발바닥이 두꺼워졌다고 자동완성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그랜드 아이즈는 왕이 되었다. 그는 아마딜로 소인들이 생각보다 힘이 세다는 걸 알았다. 소인들이 발에 붙은 상태에서 걸을 때 편안했다.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랄까. 오히려 한 달에 한 번 아마딜로 소인들이 떨어져 나가고 걸을 때, 다리에 힘이 없고 온몸이 피곤해서 누워 있게 되었다. 일 년 정도가 지나자 그랜드 아이즈는 소인들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마딜로 소인들이 떨어져 나간 하루는 꼼짝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5년이 되었다. 그랜드 아이즈가 볼 때는 아마딜로 소인의 수는 그대로였다. 아마딜로 소인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둘로 나뉘면서 똑같은 크기의 두 사람이 된다고 했다. 소인들의 번식체계라고 조나단은 분명히 설명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인들의 수는 늘지 않았다. 그들이 누가 누구인지 구분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조나단은 왕궁에 살지 않았다. 그랜드 아이즈가 왕이 된 후, 자신의 원래 집 정원에 조나단이 살 작은 집을 지어 주었다. 조나단은 한 달에 한 번 아마딜로 인간들이 쉴 때 왕궁을 방문해서 그랜드 아이즈를 알현하고 아마딜로 소인들도 만나고 갔다. 그랜드 아이즈는 조나단에게 필요한 옷과 먹을 것들을 궁정의 요리사들, 재단사들, 시종들을 시켜 마련해 주고 배달도 해줬다.
왕이 된 그랜드 아이즈는 통치 4년째 법을 바꾸어 아마딜로 소인의 도움을 받아도 키로 인정해 준다고 법령을 만들었다. 다른 거인들은 처음에는 아마딜로 소인이 뭔지도 몰랐다. 법령도 법령집에 소리 소문 없이 적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궁중에서 일하는 시종이나 왕비와 친한 귀족 부인들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아마딜로 소인들의 존재가 알려졌다. 그랜드 아이즈 가족들을 제외한 거인들은 경악했다. 그래도, 어쩌랴. 너무 늦었다. 왕이 벌써 그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린 타이탄 족들 사이에 경쟁이 시작되었다. 누가 아마딜로 소인족을 차지할 것인가?
십 년은 더디게 흘렀지만, 어느새 지났다. 모레면 그린 타이탄 왕국의 새 왕이 탄생된다. 조나단도 떠날 때가 되었다. 조나단은 자신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장렬하게 사라져 간 수백 명의 아마딜로 소인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집단 지성으로 생존을 위해 처절한 선택을 했다. 먼저 태어난 순서대로 아마딜로 소인들은 그린돌핀을 조나단에게 주입했다.
아마딜로 소인들에게 그린돌핀은 생명 자체였다. 조나단의 대화를 위해 아마딜로 소인들은 생명을 바쳤다.
타이탄 족의 나무 광장은 거인들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했다. 조나단이 도착했던 바닷가 숲 속으로 갈 채비를 할 때 그랜드 아이즈의 부름을 받았다.
왕인 그랜드 아이즈는 이제 아마딜로 소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곧 왕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랜드 아이즈의 걱정은 자라서 자신의 키만큼 되었다. 그랜드 아이즈는 왕위이양 이틀 전, 조나단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마딜로 소인들과 헤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법이 뭐가 있지? 소인들이 주는 에너지를 포기할 수 없어."
조나단은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다 한참을 생각한 후 대답했다.
"일단 아드님을 왕으로 만드시려면, 아드님 발바닥에 아마딜로 소인들의 수를 반으로 나누어 부착하시면 될 듯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누어 부착하면 소인들의 수가 더 빨리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랜드 아이즈는 매우 기뻐하며 아들을 부르려고 시종을 보냈다.
조나단은 그랜드 아이즈에게 경건하게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폐하, 제가 오늘 지인의 초대를 받아 떠나야 합니다. 만수무강하소서."
조나단의 의례적 인사에 그랜드 아이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으로 떠나라고 허락했다.
아들이 왔다. 그랜드 아이즈가 아들에게 아마딜로 소인들을 발바닥에서 떼서 나누어 주었다. 소인들은 아들의 발바닥에 붙었다. 왕의 아들의 발바닥에 붙은 아마딜로 소인들의 손끝에 작은 동그라미처럼 열매가 매달리다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소인들의 손을 잡은 같은 크기의 소인이 나타났다. 색깔은 훨씬 옅어 밝은 분홍색을 띠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마딜로 소인들이 발바닥에 머리를 흡착했다. 머리를 흡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색깔이 진해졌다. 아마딜로 소인의 수가 그랜드 아이즈 아들의 발바닥에 맞추어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그랜드 아이즈는 안심했다. 이번에는 아들이 왕이 될 것이다. 최초의 세습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왕의 지위가 2대를 거친 적이 없었다. 왕의 아들보다 꼭 더 큰 거인들이 나타났다.
그린 타이탄 왕국의 왕 선발 대회가 시작되었다. 참가한 거인들의 발바닥은 다 우둘두둘해져 있었다. 그랜드 아이즈의 키 큰 아들은 왕이 되지 못했다. 아마딜로 소인과 그린 타이탄의 공생 관계는 그렇게 보편화되었다. 호퍼족의 공격을 받아 헤븐 숲을 떠났던 소인들은 그린돌핀을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거인들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조나단은 새로운 왕의 즉위식이 열릴 무렵, 타고 온 돛단배를 타고 거인국을 떠났다. 그동안 여러 거인들로부터 작은 금화들을 받았다. 거인들은 조나단의 주문대로 금화를 작게 만드느라 고생했다고 투덜거렸었다. 비밀스러운 거래였다. 그래도 서로 좋은 거래였다. 거인들은 금화를 작게 만드는 덕분에 싸게 아마딜로 소인들을 나누어 받을 수 있었다. 조나단은 작은 금화 주머니들을 나무 상자에 담았다. 그 곁에 있는 다른 상자에 담은 봉지물들과 작게 썰은 레몬, 말린 육포등을 확인했다. 물기 없이 딱딱한 빵도 많이 준비했다.
'바람이 분다.'
조나단은 닻을 올리고 지도에서 그려 있는 사람이 사는 섬 <사피엔스>로 향했다. 거기서 고향으로 출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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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1월 10일 금요일 발행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