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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과 그림자 Oct 02. 2024

< 거리를 서성이다.>

 지현은 핸드폰으로 은행잔고를 확인했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모퉁이를 돌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게 은퇴라는 말을 실감했다. 마루 창문으로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들의 하얀 불빛이 보였다.


ㅡ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었네


지현은 혼잣말을 했다. 집안에 있는 것이 지겹게 느껴졌다.


ㅡ바깥공기는 찰 텐데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간절기라 유난히 한기가 느껴졌지만, 갑자기 외출을 하고 싶은 충동을 누를 필요가 없었다. 지현은 옷방으로 가서 가볍지만 따뜻한 구즈 패딩 옷을 입고 목도리도 둘렀다.


밖에 나가 사람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지현은 혼자인 것에 익숙했다. 같이 살던 어머니의 치매가 심해져서 요양병원으로 모신 지 5년이 넘었다.

토요일인 어제 어머니를 면회하고 와서인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영혼이 들락날락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를 만나면 우울했다.


어제는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지현을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낯선 사람처럼 대했다.

두려움을 느끼지만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라 반가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치매라도 외로움은 느끼고 사람을 반가워하는 모습이 짠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지현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강아지를 안은 위층 아가씨와 눈이 마주쳐서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주인의 품에 편안하게 폭 안긴 요크셔테리어 미니종은 지현에게 짖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려 산책끈에 묶여 주인을 종종거리며 따라가는 뒷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ㅡ 한 명


지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수를 셌다. 강아지는 빼기로 했다.

아파트 입구까지 걸어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색으로만 입은 아마도 중학생 같은 남자아이를  한 명 만났다


ㅡ두 명


내가 늦게라도 결혼했다면 저런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까? 지현은 언젠가 결혼까지 할 뻔했던 수현이 떠올랐다.

정규직 교사인 지현에 비해 임시교사였던 수현을 부모님은 못마땅해했었다.

수현은 결혼을 약속하고 얼마 후 미안하다며 헤어지자고 했다. 참 상냥하고 지현의 기분을 잘 맞춰주는 사람이었다.


일요일 저녁이라 모두 집에서 머무는지 아파트를 벗어나서도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현은 학원 사거리로 걸어가야 할지 송리단길로 걸어가야 할지 망설였다.


학원 사거리 쪽으로 가면 즐겨 먹는 잔치국숫집이 있다.

국수에 야채김밥 반줄을 시켜 먹고 바로 옆 베트남 커피 집에서 연유를 로부스타커피에 첨가해서 마신다.

송리단 길 쪽으로 가면 와인 바에서 간단한 핑거푸드와 저렴한 하우스 와인을 마실 거다.


 망설이는 동안 팔짱을 낀 연인 둘이 송리단길 쪽으로 지나갔다.


ㅡ 네 명


 지현은 추운 날씨에도 미니 스커트를 입고, 뽀글이 짧은 재킷을 입은 여자의 구불거리는 파마머리를 바라보며 따라갔다. 남자친구는 자신의 긴 패딩 옷을 벗어 주려고 했지만 여자는 거절하며 더 밀착되게 팔짱을 끼었다.


둘을 바라보다 보니 지현은 송리단 길로 접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자주 가는 와인바로 갔다. 은퇴하고부터는 비싼 와인이나 안주를 시키지 않았다.

지현은 오늘도 하우스 와인 한 잔을 시키려다가 하몽 샌드위치도 함께 시켰다.

핑거 푸드 세트만 시키기에는 너무 배가 고팠다. 오늘 첫 끼였다.


ㅡ종업원 다섯, 주인 여섯


맞은편에 앉은 중년들의 부부 동반 모임 4명


ㅡ총 10명



지현은 10명이 되자 세는 걸 멈추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 맛있게 저녁을 먹자. '


지현은 식사와 와인을 기다리며 다시 은행 잔고를 체크했다.

어머니를 좀 비용이 덜 드는 병원으로 옮길 것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되었다.


ㅡ여기 준비된 음식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종업원은 늘 그렇듯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하게 테이블 위에 주문한 음식을 세팅해 주었다


ㅡ 네, 감사합니다.


지현은 처음으로 누군가와 대화했다는 것을 못 느끼고,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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