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공격
고생 끝에 생긴 소중한 아이.
와이프는 매일 달라지는 본인의 몸을 보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초음파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매일을 행복해한다.
와이프가 임신하고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여전히 누워 계시고, 여전히 아이쇼핑을 좋아하며, 여전히 손가락 하나로 온 집안을 지휘한다.
그리고 여전히 다리 꼬고 발을 까딱까딱.
까딱 한 번에 띠링.
까딱 두 번에 띠링 띠링.
마법도 이런 마법이 없다.
이제는 뱃속의 아이와 합심해서 당당하게 소비를 요구한다. 혼자 쓰는 것이 아닌 둘이 쓰는 것이라며.
뭐.
기분 좋게.
인정이다.
그렇게 제6차 임신 선물까지 조공을 마치고 와이프에게 조심스레 이야기해본다.
"우리 이렇게 계속 뭘 사다가는.."
와이프의 불붙은 소비 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쿠팡, 각종 여성의류 사이트, 인스타그램을 카드 거래 허가 구역으로 지정한다. 앞으로 위 구역에서 결제를 하기 위해서는 세대주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강력한 수요 억제 정책 덕에 와이프의 소비 심리는 한동안 위축되게 된다.
우중충한 날씨, 차가워진 기온.
집콕을 해도 합법인 날씨였던 지난 주말.
오랜만에 함께 하는 주말에 집에만 있기는 아쉽다. 와이프가 오랜만에 바람도 쐴 겸 현대 아울렛을 가보자고 한다.
현대 아울렛은 실내라 바람이 안 부는데..
이제는 제법 배가 나온 와이프가 현대 아울렛을 휘젓고 다닌다. 이곳저곳 안 들어 가보는 곳이 없다. 대기업의 매출을 올려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다 한 매장 앞에 멈춰 선다.
줄 서있는 사람들 뒤로 와이프도 슬쩍 줄을 선다.
여긴 왜?
"아니, 그냥 입어만 보려고. 누가 입은 거 봤는데 예뻐 보이긴 해서!! 안. 사. 걱. 정. 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몽클레어 매장으로 끌려 들어간다.
'꿈아 부럽다. 너는 엄마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지? 아빠는 엄마와 보이지 않는 목줄로 연결되어 있단다..'
몽클레어 패딩을 입은 와이프가 그대로 매장을 나가려 한다. 남편에게 제지당하자 이제는 제자리에서 빙빙 돈다.
그러다 점점 눈알 흰자만 보이기 시작하더니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이 패딩을 왜 사야만 하는지에 대해 속사포 랩을 쏟아낸다.
매장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중간에 나가더라.
그렇게 제7차 임신 선물 협상이 타결되었다.
밤에는 트럼프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낮에는 와이프 때문에 잠 못 이루고.
협상의 탈을 쓴 삥뜯기에 정신이 혼미하다.
억지로 눌러놓은 수요는, 무장해제되는 순간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더 큰 부작용을 낳게 되어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카드 거래 허가 구역 전면 해제.
범죄와의 전쟁, 투기와의 전쟁.
뭐 이런 그럴싸하고 멋진 전쟁들이 존재하지만,
나는 오늘도 여성 의류와의 전쟁을 하고 있다.
옷 방 행거 위에 와이프 옷이 또 한 겹 쌓인다.
여성의류 7층 석탑. 벌써 7층째다.
이 정도면 문화재로 지정해도 될 것 같다.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게도 쌓아놨는지 와이프도 무형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것만 같다.
이 옷 방에 내 지분은 거의 없다.
며칠 뒤.
갑자기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여보!!!!! 으아아앙 큰일났어!!"
이제는 갑작스런 전화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다. 저번에는 교통사고였는데 이번에는 무엇일까.
"옷 방에 있는 행거가 다 무너졌어. 큰맘 먹고 옷 정리하려 했는데 나 깔려 죽을뻔했어.."
아니 그냥 가만히나 있지 왜..
평소처럼 그냥 누워나 있지 왜..
왜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해..
할 말이 많지만 최대한 꾹 눌러 담고 한숨을 삼킨다.
"안 다쳤으면 됐어. 그대로 냅둬 내가 가서 정리할게"
제발 하나도 건들지 마.
거기에 내 비상금 숨어있으니까.
퇴근 후 참사 현장에 도착한다.
참사 현장을 보며 잠시 철학적인 생각에 잠긴다.
'무리하게 쌓아 올린 것들은 언젠가 무너진다.'
무너진 옷더미들 속에서 투자 철학을 발견한 나도 참 대단하다.
이럴 땐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거품을 걷어내고 핵심 골조를 튼튼하게 보강해야 한다. 당장 오래된 옷들부터 걷어내고 순살 행거가 되지 않도록 골조를 보강한다.
여성의류 7층 석탑 붕괴 사건의 현장 수습은 한 시간이 넘어서야 모두 마무리되었다. 전쟁터에서 빠져나오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다.
밥을 먹을 힘도, 커피를 마실 힘도 없이 그대로 침대에 풀썩 드러눕는다.
온몸에 힘을 빼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떠본다.
눈앞에 무언가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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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씨. 그 참혹한 붕괴 현장 속에서 자기꺼 몽클레어 패딩만 쏙 빼와서 모셔놨네.
정말이지, 와이프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