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맨으로서 보도자료를 쓸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바로 제목이다. 유통 및 식음료 업계 출입 기자들은 하루 평균 100여 개의 보도자료 메일을 받는다. 매일 아침 데스크 편집회의 전 서둘러 그날에 쓸 기사의 발제를 올려야 하기에 그 많은 메일을 일일이 다 열어볼 수 없다. 그래서 무조건 속전속결이다. 이 때문에 홍보맨 입장에서는 그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섹시한 제목을 뽑아내는 게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몽골 편의점에서 한국식 자장면 인기' 보다는 '칭기즈칸 후예들 K-자장면에 푹 빠졌다'가 좀 더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다(아.. 아닌..가요?).실제로 제목의 임팩트에 따라 취재 관심도와 기사 게재율의 차이는 현격히 난다. 힘들 게 쓴 보도자료가 읽히지도 않고 바로 휴지통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이 얼마나 허탈하고 우울한 일인가.
그런데 그것만큼 허탈하고 우울한 일이 세상에 또 있더라. 나는 2년에 걸친 편의점 에세이의 집필과 탈고를 마치고 지체 없이 곧장 투고에 돌입했다. 왠지 원고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어떻게 하면 출간 확률을 높일 수 있을까 인터넷을 뒤져봤다. 먼저, 출판은 기획 출판, 자비 출판, 반기획 출판 등으로 나뉜다는데 내가 이런 걸 따질 짬도 안되고 그럴 배포도 없었다. 못 먹어도 투고(기획 출판)지!
출판사에 선정된 책은 기존 출간 작가이거나 블로그, 유튜브, SNS에 다수의 구독자를 보유한 인플루언서이거나.. 뭐야? 장난칩니까?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건데.. 계속 찾아보니 탑 오브 더 평범의 나는 '해당 안됨' 얘기만 나와 있었다. 다만,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소재인가, 글의 완성도와 탄탄한 구성을 가졌는가, 그 밖의 세일즈 포인트가 있는가 정도에나마 미세한 가능성을 걸어 볼 만했다. 그렇지만 늘 결론은 투고를 통해 책이 출간되는 경우는 1% 미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0.1%가 아닌 게 어딘가.(철현이는 겁도 없지.)
회사일처럼 출입기자 리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알라딘에 나와 있는 에세이 부문 출판사 랭킹을 기준으로 한 군데씩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그나마 기자들과 달리 출판사 편집자들은 접수된 원고를 스킵 없이 모두 읽는다고 하니 뭔가 의욕이 생겼다. 그래, 1위부터 100위까지 출판사의 문을 차례대로 두드려 보자. 엇? 하지만 랭킹은 53위까지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1위~100위까지 백 번의 메일을 쓸 생각보다 53위 이후 더 이상 메일을 쓸 곳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100번 거절당할 맷집은 있었어도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시작이 반이라고 인터넷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나름 투고에 대한 기준과 전략을 세웠다.
1. 투고는 하루 1개씩, 일주일 5개씩
아무리 보잘것없는 원고라 할지라도 덤핑처럼 내보내기 싫었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이었고 또한 메일을 받아보는 출판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끝내 출간에 실패하더라도 투고하는 과정의 기쁨이라도 오래도록 느끼고 싶은 마음이 컸다.
2. 출판사마다 개별 내용으로 메일 발송
내가 편집자라도 '아무나 걸려라' 하고 보내온 메일에는 그다지 마음이 갈 것 같지 않았다. 나의 원고를 봐 달라는 요구를 하기 전에 나도 그 출판사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게 글쓴이의 바람직한 태도.
3. 거절 때마다 제목, 구성 등 다른 버전으로 수정
매번 거절당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사람이 바라보는 눈은 대체로 비슷하다. 까인 건 또 까인다. 전반전에 지고 있으면 승리를 위해 후반전엔 전술을 바꿔야 한다.
4. 세일즈 관점에서 접근은 필수
책은 소비재, 출판은 비즈니스다. 책은 판매를 위한 목적으로 태어나며 많이 든, 꾸준히든 팔려야 그 생명력이 있다. 그러므로 집필 때는 작가의 마인드, 투고 때는 상인의 마인드로 접근해야 확률이 높아진다.
5. 좌절하지 않고 긍정과 자존감 유지
나는 무명이라는 주제 파악하기. 이건 자기 비하가 아닌 자기 객관화 차원에서, 불필요한 자존감 깎아 먹기가 아닌 하나씩 배워 가는 값진 성장통으로,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글쓰기를 위해서다. 출간 못 했다고 많이 많이 많이 아쉬울 뿐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
드디어 원고와 함께 출간기획서를 첨부한 나의 투고는 시작됐다. 보통 원고 검토는 1~3주가 걸린다고 했다. 1주일이 지났다. 역시나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2주일이 지나자 답이 하나씩 도착했다. '투고 감사합니다. OOO에서는 출간 의향이 없음을 정중히 말씀드립니다.' 거절의 메일은 하나 같이 정중한데 하나 같이 속이 쓰렸다. 그리고 투고를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저희 출판사와 결이 맞지 않아..' 처음엔 '그렇구나. 결이 맞지 않았구나.' 하다가 둘, 셋, 넷, 다섯 번째를 지나면 '아니, 도대체 그놈의 결이 뭔데?'라며 울분을 토하게 됐다. 글이 별로라는 얘기를 이렇게 고상한 말투로 전하는 게 더 짜증 났다.
이 와중에 아내는 쇼미에서 불구덩이에 빠진 마미손의 노래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를 부르며 원래 첫 술에 배부르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지 않았냐며 나를 위로(?)했다. 그래! 여러 결에 맞지 않은 나는 이를 예상하고 고'결'하게 미리 전략을 세우지 않았던가! 거절을 당할 때마다 매주 제목을 바꾸고 출간기획서도 다시 손봤다. 세일즈 관점에서도 독자 타겟팅을 편의점 주소비층인 MZ세대부터 편의점 업계 종사자와 신입 공채 지원자까지 수치로 구체화해 설명했다. 고백하자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가장 실행이 어려웠던 건 '좌절하지 않기'였다. 역시 인생은 '하는 것' 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인가.
거절 메일을 받는 횟수만큼 속절없이 나의 자신감도 점점 떨어졌다. 슬픈 눈으로 아내에게 말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인 줄 알았는데 내려가네." 그렇게 조금씩 체념하며 계획한 투고가 막바지로 접어들 때 즈음 나는 '(돌베개 출판사) 유철현 예비 작가님께'라는 제목의 메일을 받았다. 두둥~ 그동안 받은 메일들과 제목이 확연히 달랐다. 예비 작가.. 예비 작가님께 라니!! 놀란 아내가 스팸 메일 아니냐고 물었다.(저기요. 초 치지 말고 스팸이나 드소!)
메일에는 글에 대한 긍정적 평가들이 요목조목 적혀 있었고 나의 원고에 대한 기획안을 올려 내부 검토를 진행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직접 만나 출간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자고 했다. 그럼요! 지금이 새벽 3시여도 당장 뛰어나갈 수 있어요. 의심 많은 아내는 나가서 장기 털리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감동 바사삭.(아직 스팸 다 안 먹었어?)아무튼 그날그 감격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동안 나는 총 41곳에 투고해 24개의 회신을 받았고 그중 40번의 거절과 최종 1곳의 채택을 받았다. 책은 단 한 곳에서만 출판할 수 있으니 투고에 있어 그 한 곳의 채택은 100%의 성공과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엄청나고 대단한 행운이었다.(철현이는 복도 많지.)
편집자님과 일주일 만에 광화문에서 만났다. 신입사원 면접 때 보다 더 떨렸다. 편집자님은 밝고 젠틀하고 편안한 분이셨고 글을 쓰게 된 동기부터 그 안에 담긴 메시지, 글쓴이와 직장인으로서의 나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셨다. 그리고 출알못인 나의 질문들에 출간의 과정도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편집자님과의 만남 후 내부 회의를 거친 나의 원고는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출간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한 달 이후 대망의 출간 계약서를 쓰게 됐다. 사인만 해도 된다고 했는데 이날 나는 인감도장을 들고나갔다. 심지어 편의점 책 계약서니까 인주도 편의점에서 직접 사갔다.(여러분, 인주도 편의점에 판답니다.)
인세는 유명 작가든 신인 작가든 똑같다고 했다. 그 말에 출간만 해주신다면 인세는 안 받아도 된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게 사람 마음인가 보다(출간 후 1쇄 인세는 '메이크어위시'라는 NGO에 전액 기부했다). 나중에 출간 뒤풀이에서 편집자님께 물었다.
"근데 제 글을 왜 뽑으셨어요?"
"재밌었어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습니다. 분명 일반 독자들도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렇다. 책을 내고 싶은 사람에게 첫 번째 독자는 출판사의 편집자다. 단 한 명,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딱 하나의 포인트가 있으면 된다. 그것을 찾는 건 온전히 그 글을 쓴 작가의 몫, 결국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출판사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편집자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꼭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끝으로투고는 용기라는 열쇠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열릴 때까지 두드리고 다듬고 수정하고 또 두드리고, 두드리다 안 열리면 그 문을 부숴 버리겠다는 패기로. 어마 쟁쟁한 출판사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 정도의 각오와 용기가 있어야 했다. 혹여나 나중에 정말 이 글을 포기해야 할 때면 그 또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이처럼 무명작가에게 출간이란시린 간절함으로 만든 열띤 고민과 씩씩한노력들을 겹겹이 쌓아 비로소 하나의 성을 짓는 일이었다.
SBS 러브FM (토, 일) 오전 06:00~07:00
4월 21일 SBS 라디오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 '내 책 어때요' 코너에 출연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