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라흐마니노프의 탄생 150주년이었습니다. 작년 한 해 본의 아니게 라흐마니노프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를 참 많이 다녔고, 프로그램 노트, 연주회 리뷰도 꽤 많이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 파가니니 랩소니, 교향곡 2번, 교향적 무곡. 몇 곡 안 되는 레퍼토리이지만 작년 한 해 콘서트홀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른 작곡가가 라흐마니노프 아닐는지요. 라흐마니노프가 이 사실을 안다면 참 신기해하면서도 기뻐할 노릇이 아닐까 싶었어요.
작년 한 해 음악계가 라흐마니노프 기념에 푹 빠져있는 사이, 우리가 잊고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작곡가들의 탄생/서거 주기가 있습니다. 국립오페라단에서 작년 한 해를 탄생 210주년을 맞는 베르디의 오페라 네 편을 제작했으니 오페라 팬들은 분명 작년이 베르디 탄생 210주년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을 것 같네요. 하지만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한 곡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윌리엄 버드 탄생 400주년을 비롯해서, 팔레스트리나 서거 430주년, 바그너 서거 140주년, 랄로 탄생 200주년 등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음악가는 아니지만, 많은 음악학자 팬을 거느린 아도르노의 탄생 120주년도 조용히 지나간 것 같네요. 10년(decennial), 25년(quadranscentennial), 50년(semicentennial), 100년(centennial). 기념의 주기가 너무 많은가요?
올해에도 탄생/서거 주기를 맞는 작곡가들이 많습니다. 스메타나와 브루크너가 탄생 200주년, 푸치니와 포레, 부조니가 서거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올 한 해 쇤베르크의 탄생 150주년이 어떻게 진행될는지 궁금합니다. 분명 라흐마니노프가 한국 땅을 비롯한 전 세계의 음악회장에서 누린 성대한 잔치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음악학계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이렇다 할 쇤베르크 기념 행사 소식도 없구요. 하지만 쇤베르크가 서양예술음악의 역사에 남긴 거대한 흔적과 오늘날 음악이론 속에 남아있는 그의 유산들은 여전히 소중한 그의 발자취들입니다. 그간 열심히 음악회장을 드나들었건만 그의 초기작 ‘정회된 밤’(Verklärte Nacht, op. 4)을 제외하면 쇤베르크의 음악을 들을 기회는 정말 드문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음악학자나 작곡가들만 쇤베르크를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1년의 차이로 탄생 150주년을 맞은 라흐마니노프와 쇤베르크가 얼마나 다른 음악을 만들었는지도 잘 아시겠지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쇤베르크의 ‘기대’(Erwartung)는 같은 해에 탄생한 작품입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이 두 작품은 1908년 세상에 나왔습니다. 다만 라흐마니노프가 향하고 있었던 것은 19세기 비르투오소 음악의 전통이었고, 쇤베르크가 바라보던 곳은 아무도 걷지 않은 새로운 길이겠지요.
두 작곡가 모두 삶의 후반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러시아에 혁명이 일자 러시아를 떠나 뉴욕에 정착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연주 투어로 바쁜 삶을 살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42년 요양차 미국 베벌리힐스로 이사했다가 이듬해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당시 베벌리힐스에는 스트라빈스키도 있었죠). 쇤베르크는 1933년 나치 정권을 피해 UCLA에서 교편을 잡고 정착했으니 이 두 작곡가는 분명 한동안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겁니다.
미국에서 활동했던 유럽 작곡가들의 삶을 뒤적이다 보면, 그들에게도 타향살이의 외로움이 깃들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영어를 못했던 드보르자크 같은 경우, 처음부터 개인 비서이자 통역사를 대동하고 다녔고, 미국 시절 초반부의 라흐마니노프도 마찬가지였죠. 그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다가 잠시 라흐마니노프의 가슴 아픈 고백과 만났습니다. 1939년, 유럽에 있던 라흐마니노프에게 한 미국 저널에서 현대 음악에 대한 작곡가의 생각을 청탁했을 때의 일입니다. 청탁에 대한 답변으로 라흐마니노프는 기자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낯선 세상에서 유령이 된 기분입니다. 낡아버린 작곡 방식을 버릴 수도 없고, 새로운 것을 습득할 수도 없습니다. 요즈음의 작곡 방식을 느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 방식은 저에게 오지 않을 겁니다. . . .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러시아에 닥친 재앙을 겪으면서도 저는 항상 제 자신의 음악, 그리고 모든 음악에 대한 저의 반응은 정신적으로 같다고 느끼며,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노력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SERGEI BERTENSSON AND JAY LEYDA, SERGEI RACHMANINOFF: A LIFETIME IN MUSIC, 351)
현대음악에 대한 거부도, 찬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세상에서 소외된 이의 서러운 목소리였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대중들은 라흐마니노프에 환호했지만, 정작 작곡가 자신은 자신이 새로운 음악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전문가들의 차가운 평가는 오늘날의 음악학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연구는 열심히 손품을 팔지 않고서야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전에 라흐마니노프가 너무 좋아서 연주회장을 다니기 시작하고, 학부 시절 음악 교양수업을 챙겨 듣던 저의 친구는 이 간극에 대해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는 게 미천했던 시절(지금도 별반…) 그에게 해줄 대답은 신통치 않았죠. 라흐마니노프는 세상에 뒤처진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저의 미천한 답변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음악의 물꼬를 튼 쇤베르크라고 해서 인사이더로서의 안정감을 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라흐마니노프 못지않은 소외를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단번에 공포감, 무조성, 12음 작곡 같은 것과 나를 연결한다.
STYLE AND IDEA: SELECTED WRITINGS OF ARNOLD SCHOENBERG, ED. LEONARD STEIN, 76.
이 악몽, 이 불협화의 고문,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생각들, 이 질서정연한 광기를 없애버리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ARNOLD SCHOENBERG LETTERS, 245–46.
쇤베르크는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초기 무조음악을 ‘고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도 어찌 보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였습니다. 소위 ‘헐리우드의 황금기’였던 1940년대, 라흐마니노프와 쇤베르크는 모두 헐리우드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끊임없이 모더니즘과 대중문화 사이에서 분열을 겪어야 했던 팝콘의 나라 미국에서는 이방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탄생 혹은 서거 몇 주년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이들의 예술을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기획하는 데 있어 대중들의 주목을 끄는 브랜딩의 한 전략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음악회장에서 라흐마니노프가 기억되고, 쇤베르크가 망각됨으로써 모더니즘의 참담한 실패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공통점이라고 1도 없을 것 같은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교차점은 이들이 결국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았던 이들이었다는 점을 되새겨줍니다. 예술가로서 그들이 겪은 시대의 혼란과 갈등, 그것이 작년과 올해 1년 터울로 탄생 150주년을 맞은 이들 두 작곡가를 다시 기억할 수 있는 힘을 주네요.
61호_VIEW 2024.02.15.
글 ∙ 정이은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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