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은퇴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두 손으로 한음 한음 건반을 누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언론과 소셜 미디어에서 연일 화제가 되었습니다. 피아니스트 주앙 카를로스 마틴스(João Carlos Martins)의 이야기입니다. 마틴스는 바흐 전문가로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다가 1995년 불의의 사고로 뇌 손상을 입고 오른 손가락이 마비되었어요. 그 뒤로 몇 년을 왼손만으로 연주 활동을 이어가며 수십 차례의 손가락 기능 복원 수술과 재활을 거듭했지만 실패했고, 퇴행성 질환까지 찾아와 왼손의 기능마저 잃게 됩니다.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피아니스트는 결국 눈물의 은퇴를 합니다. 그런 그가 2020년 1월, 20여 년 만에 열 손가락을 모두 사용해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됩니다. 생체 공학 장갑을 끼고서 말이지요. 마틴스가 다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된 기적의 순간이 영상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함께 감동했습니다.
그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것은 기술의 도움이었어요. 장애를 입은 피아니스트의 오랜 팬이자 산업 디자이너인 코스타(Ubiratã Bizarro Costa)는 건반을 누른 후 손가락을 원위치로 복구시킬 힘이 생기지 않는 마틴스의 문제를 기능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생체 공학 장갑을 개발했고요. 그 장갑을 끼고 마틴스는 피아노 연주에 대한 열정을 되찾게 된 겁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마틴스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발레리나가 생체 공학 로봇 다리의 도움으로 감격의 무대를 선보였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이제 생체 공학 기술은 몸의 일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 귀, 손, 발 등에 적용하여 신체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기술 혁신은 불가능하다 여겨지던 많은 것들을 가능성으로 돌려놓습니다.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지는 광경을 목도하게도 합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기술이 가닿는 영역이 훨씬 다양해지고요, 음악과 예술에도 기술은 폭넓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음악의 오랜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음악 관행이 바뀌거나 음악 취향이나 스타일이 변화하기도 하고, 창작, 연주, 청취 환경이 새로워지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폭과 속도는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 디지털 환경에서 놀랍도록 커 보입니다. 물론 기술이 야기한 어두운 면도 분명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오늘날의 기술 환경 속에서 물리적, 신체적, 심리적 제한이나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음악 활동을 가로막은 장벽들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새로워지는 모습도 적잖게 발견됩니다.
최근 새로 개발된 기술은 음악에 실험적으로 접목되어 다양한 관점들을 표현할 유연한 도구가 되기도 하고요. 또 전통적으로 제한되고 배타적인 영역이라 간주하던 음악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 주기도 합니다. 디지털, 인터랙티브, 가상현실, 웨어러블 센서 등의 첨단 기술은 음악을 좀 더 체험적이고 참여적인 형태로 경험하도록 변화시켰습니다. 한편 이러한 기술은 다양한 이유로 음악 접근이 제한된 사람들에게 음악적 기회를 높이는 수단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이제는 사회 곳곳에 녹아든 ‘베리어 프리’(Barrier free)라는 개념은 음악과 공연 예술 분야에도 다양한 형태로 적용되는 중인데요,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회 구성원이 문화 예술에 접근을 어렵도록 만드는 장벽을 조금씩 없애보자는 포용적 움직임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서 관객과 예술가 누구나 물리적, 심리적, 제도적 장벽 없이 예술을 누릴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지요.
일찍부터 영국에서는 ‘장벽 없는 공연’(Performance without Barriers, PwB) 프로젝트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코이치 사무엘스(Koichi Samuels)와 프란치스카 슈뢰더(Franziska Schroeder)는 즉흥연주의 자유로움과 포용적 잠재력, 그리고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개방성과 접근성을 결합해 장애 음악가들의 어포던스와 표현 가능성을 확장했습니다.(1) 이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한 실험적인 VR 악기는 움직임에 어려움이 있는 뮤지션이 전자 사운드를 사용해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된 사례를 소개합니다. 기술을 활용해 장애 뮤지션들이 자신이 가진 창의성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장애인의 음악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이 사용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렇지만 기술이 단지 신체적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보조하는 수단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기술의 순기능은 단순히 신체의 일부를 대신하는 도구적 역할을 극대화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이들의 창의적 협업과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지난 씨샵레터에서도 소개된 바 있듯이 닐 럭(Neil Luck)과 주빈 캉가(Zubin Kanga)의 신작 《무엇이든 당신을 짖누르는 것》(Whatever Weighs You Down,2022) (2)은 장애와 신경 다양성이 창작 과정에 통합되었을 때 새롭게 발생할 수 있는 풍부한 음악적 가능성을 제시해 줍니다.(3) 이 작품에서는 MIMU 센서 장갑, 텍스트 음성 변환 소프트웨어, 인공지능으로 처리된 노래 녹음 등 흥미로운 음악 기술들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것은 장애 예술가와 비장애 예술가가 협업 파트너로서 공동 창작을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소리 표현 방식을 창조해 냈다는 겁니다.
작업을 위해 두 작곡가는 청각 장애 퍼포먼스 아티스트 미나미무라 치사토(Minamimura Chisato)와 공동 창작을 구상했고요. 작품 창작을 위한 워크숍에서 미나미무라는 피아노 뚜껑을 온몸으로 눌러보고, 사운드보드의 밑면을 만져보고, 특정 현을 깨무는 등 진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반응했습니다. 사물을 느끼고 소리를 느끼기 위한 행위였지요. 그로부터 유도된 미나미무라의 신체적 표현들은 작곡가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제스쳐와 모션 툴로 구체화되었고, 또 그것은 제스쳐와 모션에 반응하는 MIMU 센서 장갑에 매핑되어 사운드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제스쳐와 모션이 세분화되고 다양해지는 과정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다양한 사운드를 창출하는 결과로 이어졌지요. 또한 공연에서는 사운드와 텍스쳐, 무대와 스크린의 움직임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화면 속 미나미무라와 미러링하거나 소통했고요. 화면 속 미나미무라의 제스쳐는 무대 위의 캉가의 손동작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두 퍼포머는 무대 위에서, 또 화면 속에서 서로에게 공명하면서 몸이 사용되고 몸이 수행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경험하고 표현해 낸 겁니다. 관객 역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몸의 움직임과 소리의 관계를 경험하게 되고요.
이러한 프로젝트는 장애와 신경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고정된 사고에 도전합니다.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가 고정된 의학적 상태가 아니라 일부 신체는 수용하고 다른 신체는 배제하기로 선택한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장애 연구의 입장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차이를 인류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술은 그 모호한 경계의 틈에서 이들을 매개합니다.
(1) Koichi Samuels & Franziska Schroeder, “Performance without Barriers: Improvising with Inclusive and Accessible Digital Musical Instruments.” Contemporary Music Review 38/5 (2019)↩
(2) 씨샵레터 62호 PICK ‘장갑 추울 때만 껴요? 전 그걸로 예술해요’ 중↩
(3) Zubin Kanga, “The Cyborg Hand: Gesture, Technology, Disability and Interdisciplinarity in Whatever Weighs You Down.” Contemporary Music Review 42/3 (2023).↩
63호_VIEW 2024.03.21.
글 ∙ 김경화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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