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음악소설집』 중 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에 대한 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소문 들으셨어요? 『음악소설집』(2024, 프란츠)이라는 책 소문이요. 장안에 핫하다는 소설가 다섯 분을 모셔서 음악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을 해 만든 소설집입니다. 저는 김애란님의 소설부터 읽었습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첫번째 소설이기 때문 만은 아닙니다. 김애란님의 소설을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그리고 그의 『달려라, 아비』(2005, 창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야기 하고 싶지만, 꾹 참고 오늘은 이 소설집에 실린 “안녕이라 그랬어”에 관한 이야기만 할게요.
『음악소설집』에 실린 소설이니 당연히 음악 이야기가 나오겠죠? 네, ‘Love Hurts’라는 노래 이야기 나옵니다. 제겐 나자레스(Nazareth) 라는 가수가 부른 버전이 익숙한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Kim Deal과 Robert Pollad가 부른 버전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나자레스가 느끼고 부르는 사랑의 상처와 킴 딜(Kim Deal)과 로버트 폴라드(Robert Pollad)가 부르는 사랑의 아픔이 얼마나 다른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것도 꾹 참아 보겠습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건 바로 “안녕이라 그랬어”라는 소설이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 물론 김애란 님이 직접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읽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이 『음악소설집』에 실려 있는 이유가 ‘Love Hurts’라는 노래 때문이 아니라 이 소설의 형식이 소나타 형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시작해 볼까요?
아시는 것처럼 소나타 형식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 제시부에서는 보통 두 조성 영역(공간)이 제시됩니다. 두 주제라고 하기보다는 두 조성이 제시된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두 공간이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하나는 남자 친구인 헌수와 관계된 세계이고 또 하나는 주인공이 인터넷으로 영어 회화를 배우는 ‘에코스(echoes)’라는 (가상)공간입니다.
먼저 헌수의 세계가 제시되죠. 그리고 그 세계에서 ‘Love Hurts’를 들으며 나눈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영어로 불리는 이 노래에서 난데없이 ‘안녕’이라는 우리말이 들렸다고 주인공이 우기는 내용입니다. 이 ‘안녕’이라는 화두 혹은 모티브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영역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우리말 ‘안녕’이라는 말은 ‘반갑다’라는 뜻과 ‘잘가’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말을, 다음 영역의 주인공인 로버트에게 전하면서 말이죠.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 부분, 소나타 형식에서는 이런 부분을 ‘경과부'(transition)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이 끝나면, 김애란 님은 + + 표시로 한 부분이 끝났음을 알려줍니다. 소나타라면 제1조성 영역 혹은 제1주제와 경과부가 끝난 거죠.
이야기는 두 번째 공간인 ‘에코스’로 이어집니다. 거기서 만난 선생님들로 시작된 이야기는 로버트라는 선생님 이야기에서 머물게 됩니다. 주인공은,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로버트와 가상공간에서 만나면서 묘한 감정적 교류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로버트의 아버지도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이 교류가 독특한 감정적 영역을 만들어 냅니다. 여기가 제시부의 제2조성 영역인 거죠. 소나타 형식이라면요. 그리고 이 부분이 끝나면 + +가,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소나타 형식에서 발전부는 제시부에서 제시된 영역에서 떠나는 부분입니다. 특징적 선율(주제라고 합니다)이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그 주인공이 제시부의 조성 영역을 떠나서 집을 떠나는 부분이라고 할 만 합니다. 원래 조성에서 상관이 없는 점점 더 먼 조로 떠나갑니다. 그래서 소나타에서 발전부를 알아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뭔가 음악이 종결감이나 안정감을 주지 않고 파편화된 것 같은 선율이 불안감을 주는 부분, 그런 부분을 듣고 계신다면, 바로 거기가 발전부입니다.
“안녕이라 그랬어”의 발전부는 로버트와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 즉 원래 알고 있는 영역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곧 또 다른 선생님이었던 로즈와의 이야기인 짝짓기 프로그램 이야기, 그리고 다시 로버트와 스무고개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이 이야기 모두가 ‘에코스’에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원래 제2영역이 등장했을 때의 주인공과 로버트 사이의 독특한 감정적 영역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부모님의 죽음을 공유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공감 영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부분은, 주인공과 로버트가 “치얼스”를 외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것과는 영 다른 세계에 다다른 거죠.
그러다가 문득, 가장 먼 영역에 도달한 바로 그다음 순간 주인공은 말합니다. “사실 오늘 네게 할 말이 있어.”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남은 시간 동안 우리 수업 말고 그냥 대화 할래?” 주인공의 이 말을 통해서 금방 깨닫게 됩니다. 왜 이 부분이 처음 부분과는 느낌이 좀 달랐는지 말이죠. 제2영역에서도 ‘에코스’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때는 ‘수업 내용’을 이야기했던 것이 아니었거든요. 주인공과 로버트 사이의 감정과 느낌에 관한 것이었죠. 발전부가 좀 생뚱맞았던 것은, 아니 원래 이야기에서 멀리 떠나왔다 싶었던 것은 같은 ‘에코스’ 이야기이지만, 여기서는 진짜 ‘수업’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주인공의 한마디 말, “수업 말고 그냥 대화할래?”라는 말을 통해 이야기는 다시 원래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소나타 형식에서는 이런 부분을 ‘재경과부'(retransition)이라고 부릅니다. 발전부가 끝났습니다. + +
재현부에서 음악은 원래 영역으로 돌아옵니다. 실은 각기 두 영역이 심지어 한 영역으로 합쳐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대립이 해소된다고나 할까요? “안녕이라 그랬어”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은 로버트 이야기에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로버트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다시 꺼내거든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그냥 앞선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로버트가 드러냅니다. 그 드러냄을 통해서 모호하게 한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불편한 긴장감을 만들어 내던 주인공과 로버트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돌아온 제1영역이 끝났으니 다시 ” + + “
당연히 헌수의 이야기도 돌아옵니다. 외국 가수가 느닷없이 ‘안녕’이라고 한국말로 노래했다는 주인공의 말에 헌수가 대답합니다. 사실은 “I am young”이라는 가사였다고 말이죠. 바로 이 순간에 또 하나의 긴장, “대체 왜 외국인이 갑자기 한국어로 노래하는 거야?”가 해소가 됩니다. 재현부는 원래 영역으로 돌아오되,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던 긴장을 해소하며 돌아오는 부분입니다.
자, 제 분석은 거의 끝났습니다. 아, 압니다. 이 소설의 모든 부분이 아주 정교하게 소나타 형식에 딱 들어맞는 건 아니라고 하실 만도 합니다. 대체 이 분석이 캐플린의 이론을 따른 거냐 아니면 헤포콥스키를 따른 거냐 이렇게까지 하신다면, 뭐 죄송하달 수 밖에요. 하지만 재밌고 놀랍지 않나요? 이 소설이 소나타 형식과 이토록 닮아있다는 것이?
더 있습니다. 혹 음악을 조금 깊이 있게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소나타 형식이 순환적이라기보다는 직선적, 목표지향적 형식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레티(Rudolf Réti)같은 이론가는 베토벤의 어떤 소나타를 분석하면서 그 소나타는 사실 처음 시작할 때 제시했던 음악적 세포(cell)의 모순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뭐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씨샵레터’ 이름의 근거가 된 베토벤 교향곡 8번의 4악장을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F 장조 악장에서 C♯음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F 장조라는 세계에 자기 자리가 없는, 애매한 음이라고 할 수 있죠. 4악장 전체는 사실상 그 ‘문제’를 해결하고 그 애매한 의미를 확정하는 과정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안녕이라 그랬어”의 C♯은 바로 “안녕”이라는 말입니다. “안녕”이라는 말은 원래 애매합니다. ‘반갑다’와 ‘잘 가’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까요. 결국 이 소설은 ‘안녕’이라는 말의 애매함을 동력으로 합니다. 안녕이 새로운 만남과 시작을 의미하는지 혹은 그것이 이별과 그침을 의미하는지 사이를 탐구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결국 재현부에 이르러서 이 두 의미의 길항은 끝이 납니다. 안녕을 “부디 평안하시라”는,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서 말이죠. 다시 말하면 이 소설은 안녕의 애매한 의미를, 안녕이라는 말이 갖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압니다. 김애란 님이 소나타 형식을 알고 이 소설을 쓰셨냐고 묻고 싶으신 거죠? 몰라요. 저는 그냥 팬일 뿐이어서 대화를 해본 적도 없습니다. 또 다른 긴 이야기가 필요하겠으나, 이 정도로만 해 두려고 합니다. 사실 김애란 님이 소나타 형식을 알고 모르고는 별 상관없습니다. 소나타 형식은 원래 ‘좋은’ 이야기의 구조를 닮았거든요.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주인공이 집에 머물면 안 됩니다. 집을 나서야 이야기가 시작되고, 집을 나섰다가 바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슬아슬한 저 너머까지 가야, 그래서 집에 못 돌아오면 어떡하지 걱정이 될 때까지 나가야 비로소 입맛 다실만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음, 좀 허무할지 모릅니다. 무릇 좋은 이야기는 거기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집 나갔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행복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가 만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의 ‘원형’ 같은 거라면 말이죠, 소나타 형식은 바로 그 원형을 쏙 빼닮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김애란 님의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 사람들을 홀딱 반하게 하는 이야기라면, 자연스레 소나타 형식과 닮아있을 테니 말이죠.
그래도 궁금하긴 합니다. 김애란 님이 소나타 형식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쓰셨는지, 그래서 그것이 이 소설이 『음악소설집』에 실린 진짜 이유인지 말이죠.
65호_VIEW 2024.08.15.
글 정경영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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