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오페라 《오텔로》(Otello, 1887)를 보고 나온 후 제 기분이 말이에요. 무대가 멋졌고 어느 가수 목소리가 좋았고 연출이 대단했거나 하는, 이런 감상보다도 더 길고 오래 남은 정서는 찜찜함이었습니다. 오페라가 끝난 후 집에 가는 길 떠나지 않던 생각은 바로 이런 거였습니다. “작품에 드러나는 시대착오적 사고방식과, 그럼에도 그 작품이 가지는 고전적 가치 사이 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실질적으로는, “이런 틈을 가진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작품은 그냥 작품일 뿐일까?”, “내가 이상한가?” 이런 질문들이었고요. 이 글은 이 찜찜함에서 시작합니다. 무엇이, 왜 찜찜했던 것인지 생각해 볼 참입니다.
베르디의 《오텔로》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Othello, 1603)를 바탕으로 만든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 5막이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1막이 생략되어 전체 4막으로 완성됩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부하직원의 모략에 속아 넘어가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의심과 분노를 키워가던 오텔로가 결국 자기 손으로 아내를 죽이고, 죽인 직후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자결하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극 중 무어인으로 설정되는 오텔로(테너)는 베니스의 장군입니다. 부관 자리를 노리는 오텔로의 기수 이아고(바리톤)는 오텔로가 부관 자리를 자신이 아닌 카시오(테너)에게 임명하려는 것을 알고는 음모를 꾸밉니다. 오텔로에게 그의 부인 데스데모나(소프라노)와 카시오가 은밀히 사랑하는 사이라고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죠. 오텔로의 마음은 순식간에 의심과 질투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리고는 둘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아고는 오텔로가 데스데모나에게 선물했던 손수건을 몰래 훔쳐 카시오의 집에 가져다 두고, 카시오 손에 든 손수건을 오텔로가 직접 볼 수 있도록 상황을 조작합니다. 자신이 데스데모나에게 선물한 손수건이 카시오에게 있는 것을 확인한 오텔로는 둘 사이 관계가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결국 데스데모나를 죽입니다. 살해 직후 데스데모나의 시녀이자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메조소프라노)가 들어와 모든 것이 이아고의 모략이었음을 밝히고, 자신이 속아 넘어간 것을 안 오텔로는 뒤늦게 처절하게 후회하며 자결하는 것으로 전체 오페라가 종결됩니다.
이상한 건요. 이 오페라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여기서 데스데모나가 차지하는 중요도는 크게 떨어진다는 겁니다. 여주인공인데도 말이지요.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긴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작품의 제목에 해당하는 오텔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텔로는, 물론 데스데모나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극의 등장인물에서 세 번째로 소개되는 악당 이아고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이아고야말로 이 극을 주도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지난해 무대에 오른 연극 〈오셀로〉의 김정희 연출이 “셰익스피어가 왜 제목을 ‘이아고’라고 하지 않았을까” 물은 것은 정당해 보입니다.
다시 데스데모나로 돌아와서요. 데스데모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정절을 지키는 여인입니다. 남편의 말도 안 되는 의심과 분노를 비롯해 자신을 향한 질타와 치욕스러움을 견뎌내면서도 끝까지 오텔로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시오와의 관계가 사실이 아니라는 데스데모나의 항변이 단 한 번도 오텔로에게 가 닿지 않고 공기 중에 흩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투명인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데스데모나는 고전적 서사에서 나타나는 타자화된 여성 캐릭터의 전형인 듯합니다. 고전적 서사에서 여성 캐릭터의 타자화는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재현됩니다. 하나는 정절, 순결, 연약함, 순수 같은 단어와 연결되는, 이른바 착한 여자 프레임입니다. 착한 여자는 가정과 사회의 모범이자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형태입니다. 베르디의 또 다른 오페라 《리골레토》의 질다,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의 미미 같은 역할을 떠올리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위험, 죽음, 광인, 마녀 같은 단어와 연결되는 나쁜 여자 프레임입니다. 비제 《카르멘》이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엘렉트라》에서 나쁜 여자로 재현되는 여성 캐릭터의 전형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타자화된 여성 캐릭터는 착한 여자든 나쁜 여자든 희생제물이자 감정, 비이성, 비논리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재현된다는 것 역시 두드러지는 점 중 하나입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데스데모나는 착한 여자 쪽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남편을 향한 지고지순한 마음을 지키는 여자니까요.
극의 ‘내용’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와 전체 극의 흐름에서 데스데모나의 역할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데스데모나는 극의 갈등의 중심에 선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는 오해가 이 극의 가장 큰 갈등이니까요. 다시 말해 데스데모나는 이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갈등의 기제이자 갈등의 중심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데스데모나는 갈등 그 자체인 인물면서도, 갈등을 만드는 인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을 해결하는 인물도 아닙니다. 그러기는커녕 이아고가 치밀하게 짜 놓은 틀 안에서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힘없이 꺼져가는 인물이죠. 데스데모나는 극을 전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데스데모나는 극의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극의 ‘전략’에 있어서도 희생양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주변화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듯한 데스데모나는 앞서 언급한 질다나 미미, 카르멘 같은 타자화된 여주인공과도 구별됩니다. 주변화되면서도 여전히 극을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는 다른 여주인공과 다르게, 데스데모나는, 사실상 없어도 아무 문제 없는 존재처럼 보이니까요.
아마 제 찜찜함은 여기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물론 여성 캐릭터를 향한 왜곡된 묘사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고전적 작품을 대 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더 어려울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데스데모나의 경우는 제게 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데스데모나는 타자화되거나 주변화되는 것을 넘어, 학대받는 캐릭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요. 데스데모나는 베니스의 장군 오텔로의 부인이라는,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군중들 앞에서 오텔로에게 수치와 폭력을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녀인 에밀리아에게도 불쌍히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이아고에게는 그의 욕망을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극에서 의아할 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손수건’의 의미를 살피자면, 데스데모나는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오텔로는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이 카시오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데스데모나를 향한 의심이 사실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분노는 극에 달하죠. 그러나 데스데모나가 죽은 후, 사실은 카시오가 쥔 손수건이 이아고의 계략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마침내 데스데모나는 오해의 틀에서 해방됩니다. 이렇듯 ‘손수건’은 데스데모나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오해의 틀을 ‘강화'하는 것이자, 그것을 ‘붕괴'시키기도 하는 이중 기제로 작용합니다. 이 ‘손수건’이 데스데모나를 상징한다고 할 때, 그는 자신을 향한 오해를 스스로 수행하면서 심화하는 인물이자, 죽음으로써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희생제물의 전형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타자화와 폭력은 그 무엇보다도 가학적입니다. 데스데모나가 다른 여성 캐릭터보다 처참한 건, 그가 극의 ‘내용’과 ‘전략’만이 아니라, ‘상징적 이면’의 차원에서도 타자화되기 때문입니다.
(1) 서발턴은 노래할 수 있는가?
데스데모나를 바라보면서 스피박의 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서발턴’subaltern)은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권력을 가지지 못한 하위 계층을 일컫는 말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처음 쓴 용어입니다. 스피박은 이 용어를 특히 제국주의 하에 억압된 비서구권 하위 계층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면서 서구 학계가 서발턴의 목소리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서발턴이 정말로 말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아만다 와이드먼(Amanda Weidman)은 자신의 책 Singing the Classical, Voicing the Modern: The Postcolonial Politics of Music in India의 네 번째 장에서 스피박의 제목을 따 “Can the Subaltern Sing?: Music, Language, and the Politics of Voice”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소제목은 스피박과 와이드먼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저도 압니다. 이건 베르디의 오페라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관한 글이 아니냐고 물으시겠지요. 오페라가 음악 장르라는 점을 망각한 것은 아닙니다만, 음악이 아니라 극의 내용만으로 오페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글의 한계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것들을 음악적 측면에서도 고민해 볼 생각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지금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스데모나의 노래도 극의 ‘내용’이나 ‘전략’, ‘상징적 이면’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데스데모나가 극 중에서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4막에서입니다. 배경은 데스데모나의 침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데스데모나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슬픔을 노래하는데요. 그런데요. 참 지독하기도 하지요. 끔찍할 만큼 고통스러운 슬픔을 노래할 때조차 데스데모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노래를 빌려옵니다. 자기 어머니의 시녀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려진 후 부른 노래가 떠오른다며 에밀리아에게 들려주는 것이죠.(2) 그마저도 오텔로가 자신을 죽이러 올까 두려워하는 레치타티보로 자꾸만 중단되고 맙니다.
(2) 데스데모나의 “버들의 노래”(”Piangea cantando nell’erma landa”)
제가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좀 찜찜한 게 해결되었느냐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해진 건 있습니다. 여성 캐릭터를 향한 왜곡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님에도, 왜 이 오페라를 본 후 내 마음이 특별히 더 찜찜했는지가요.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작품은 그냥 작품일 뿐”인 것은 아니라는 것도요. 그 작품을 보고 찜찜한 내가 있으니까요! 물론, 이런 앎이 앞으로 제가 오페라를 보는 데, 혹은 고전적 서사들을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찜찜함을 덜어줄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 이런 고민들이 계속해서 축적되어서 나름대로 그럴 듯하고 설득력 있는 대답을 찾는다고 해도, 여전히, 편안하게 오페라를 감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도 듭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67호_VIEW 2024.09.19.
글 에디터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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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S 박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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