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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놀마드 노을
Dec 19. 2024
LH행복주택은 무옵션이다
LH행복주택은 옵션으로 제공되는 가전이나 가구가 거의 없다.
원룸형인
곳에는
작은 냉장고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내가 입주한 곳은 붙박이 신발장이 옵션의 전부였다.
같이 살게 된 동생이 자취하며 쓰던 밥솥을 제하고 모든 가전을 사야 했다.
# 100만 원이 생겼다
입주날짜가 가까워져 본가에서 짐을 싸고 있는 내게 아빠가 노란 봉투를 건네주셨다.
5만 원짜리 20장, 100만 원이 들어있었다.
가전 사려면 돈 많이 들 텐데 보태라는 말씀과 함께.
'돈이 어디서 나서?'라는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돈봉투를 들고 계신 아빠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가을 찬바람을 만나 하얗게 갈라져버린 아빠의 흙물 든 까만 손을 보고 있으니
돈의 출처가 짐작됐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께서 이른 봄부터 한여름 염천을 지나 가을에 이르기까지 힘들게 고추를 키워 마련하신 귀한 돈이었다.
20대 중반부터는 부모님께 금전 지원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4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봉투를 받아 든 내 손이 움찔거렸다. 제
몫이 아닌 것을 쥔 것처럼.
걱정일지 미안함일지 응원일지 아니면 그 모두가 섞인
건
지 검게 탄 아빠의 얼굴이 더 어두워 보인다.
내가 백수가 아니었다면 신경 쓰시게 할 일도 없었을 텐데. 감사함 뒤로 죄송한 마음이 둔중한 걸음으로 쭈뼛대며 따라왔다.
# 알맞은 것들을 찾아서
내 상황과 집에 맞는 적당한 가전을 찾아야 했다.
제조회사, 성능, 가격, 크기, 디자인, as 등 고려해야 할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검색과 비교, 선택의 고뇌 속으로 들어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지 머리회로가 망연히 멈춰 선다. 현실을 외면하며 사고자체를 거부한다.
채우고 쌓기에 바빴던 관성 때문에 비워져 있는 곳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빈
공간을
채우는
일은 어렵다기보다는 귀찮음에 가깝지만, 채우기 위해 애써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다행히 동생과 할 일을 나눴다. 내가 냉장고와 인덕션, 동생이 세탁기와 전자레인지를 각각 맡아서 구매했다. 가성비를 기준으로
찾으니 아빠가 주신 돈 안에서 얼추 해결이 됐다.
내 키만 한 소형냉장고, 작은
이불빨래까지는
가능한
세탁기, 중소기업제품이지만 가격이 저렴한 2구짜리 인덕션, 핑크색 비스포크전자레인지가 최종 낙점됐다.
며칠에 걸쳐 배송된 가전으로 비어있던 집이 하나둘 메워졌다.
본가에서 가져온 반찬으로 새
냉장고를
배 불리고,
쌓여있던 빨래를
세탁기에 넣었
다.
시멘트냄새 가득했던 냉랭한 공간이 조금씩 사람 사는 곳의 모습을 갖춰갔다.
모든 게 엉망이라 느껴질 땐 버튼하나로 모든 게
리셋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것도 갖춰진 것 없이 시작해야 하는 이 집에서,
아무도 길들인 적 없어서 내 손으로 곳곳에 붙어있는 안전테이프를 뜯고 있지만,
함께 채워주는 가족이 있었고 꾸준히 가고자 애쓰는 나 자신이 존재한다.
옵션하나 없이 텅 빈 곳 일지라도, 기존 방식과는 다른 모습일지라도,
과한 건
걸러내고 지금의 상황과 크기에 알맞게
조금씩
채워
나갔
다
.
모든 것을 갖추려 하면 번잡하고 끝이 없다. 의외로 없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없기에 가볍기도 하다.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 막막해 시도조차 못했던 시기를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내 뜻대로 차곡차곡 채워갈 수 있었다.
필요한 것만 들이고 복잡한 것은 걸러진 이 집은 내가 원하는 삶의 모양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 상황과 의사를 타진하며 갖춰놓은 이 집이 마음에 든다.
서두르지 말고 조금씩 차근차근 알맞은 것들로 채워가야지. 집도 삶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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