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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Jan 11. 2024

눈 밭에서 핀 동지애

이틀 전 내린 눈으로 골프장이 휴장을 했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휴가 아닌 휴가 같은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덕분에 쉰다고는 했으나 토요일 대체근무가 기다리고 있어 안 푼 문제 하나 남기고 시험지를 낸 것 같은 기분으로 책상 정리 마치고 커피 한 잔 하다가, 휴대폰에 저장한 사진도 정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이쁘고 멋지고 좋아 보여서 구도니 배경이니 하는 것은 다 제치고 마구 찍어뒀던 사진들을 하나씩 넘기는 재미도 쏠쏠했고, '이건 대체 왜 찍은 거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사진도 있어서 웃음이 났다.

근래 들어 찍은 사진 중에는 눈 온 후의 풍경 사진이 많다. 사실 눈은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지만,  내겐 묵직한 삶을 느끼게 해 준 첫 번째 키워드다. 


국민학교 4학년 2월 봄방학 때, 5학년 반을 배정받고 새 학기 교과서를 받아서 상급 학년으로 올라간다는 기대와 설렘을 안고 집으로 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와 몇몇 친구들은 교과서는 물론 반편성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밀린 '육성회비'를 완납하기 전까지 유급조치가 된 것이었다.


그날 담임 선생님은 평소 인자한 얼굴을 감추려고 가면을 쓴 듯 무표정(아니 억지로 참 듯 입을 앙 다문 모습)으로 우리를 야단치셨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선생님께서도 윗분들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은 모양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선생님도 월급쟁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야단을 맞으면서도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단친다고 당장 육성회비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선생님은 그걸 모를까? 우리가 일부러 안 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

선생님 앞으로 불려 나와 야단을 맞는 우리들도, 책상 앞 자신의 자리에 앉아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친구들도 모두 죄인이 된 양 서로 눈을 피하며 고객만 숙이고 있었다. 그런 교실 유리창 밖에는 굵은 눈송이가 나비처럼 소리 없이 운동장에 내려앉고 있었다. 


급기야 우리는 사또 앞에 엎드려 곤장을 맞는 죄인처럼 30cm 플라스틱 자로 손바닥을 세 대씩 맞고,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선생님의 엄명을 받고 교실 밖으로 쫓겨났다. 운동장엔 여전히 나비 같은 눈이 내려서 나는 머리에 어깨에 하얀 나비를 얹고 터덜터덜 천천히 교문을 나섰다. 일부러 먼 길로 돌아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엄마를 어떻게 데리고 오나? 내가 이렇게 속상한데 엄마는 얼마나 더 속상할까? '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가난 때문에 맞았다는 게 너무 속상했고, 그런 심정을 엄마까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철이 들어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갑자기 내가 확 커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플라스틱 자로 내 손바닥을 때릴 때 선생님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선생님도 우리 마음을 다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맞은 손바닥이 아픈 줄도 모르고, 선생님까지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모두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얼마쯤 걷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눈은 펑펑 내리고 아무도 없는 길 한가운데 나만 서 있었다. 온통 하얀 세상에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은 먼 하늘에서 내려올 때는 흰색이 아닌 진한 어두운 회색의 점으로 떨어져 얼굴 위에서 사르르  녹으며 내 눈물과 섞였다.

'차라리 이대로 눈 속에 파묻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과 회초리가 한 번 내려쳐질 때마다 눈물을 흘리던 선생님이 불쌍하다는 마음뿐이었다.

 '사는 게 참 힘들구나!'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열한 살짜리 답게 '아무도 없는데 하얀 눈귀신이 나와 잡아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잠깐 무섭기도 했지만, 사는 게 이렇게 힘들 바에야 눈귀신한테 잡혀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눈 밭에 서서 어디로도 못 가고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거짓말처럼 눈귀신 대신 엄마가 내 앞에 딱 나타났다.  내 손을 잡은 엄마의 손은 아주 차가웠다. 엄마는 일을 마치자마자 온 게 분명했다.


"추운데 이러고 서있으면 어떡해?" 엄마는 얼굴을 싸맸던 붉은색 보자기를 풀더니 내 머리에 쌓인 눈을 털고 내 얼굴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가기라도 할 것처럼 꽁꽁 싸맸다. 나일론 보자기가 얼굴에 닿아 더 차가웠지만 나는 차갑다고 하지 않았다. 엄마도 나도 이미 온몸으로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00 이는 벌써 집에 왔던데.. " 함께 손바닥을 맞은 친구는 그사이 집으로 가서 아직 집에 오지 않은 나를 기다리는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다 얘기한 것 같았다. 

엄마는 내 손바닥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미안하다'라고 할까 봐 맘을 졸였다. 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니까.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야. 기죽지 말고 살아보자."

엄마는 그날 처한 상황 때문에 내가 의기소침하게 지낼까 봐 걱정인 모양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까 봐 은근히 맘 졸이던 나는 엄마의 '살아보자'는 소리에 엄마 손을 더 꼭 잡았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리 어려운 순간이 닥쳐도 언제나 엄마가 등을 토닥이며 '힘내라'라고 해 줄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엄마와 나 사이에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동지애' 같은 게 생겼다. 같은 아픔을 겪고 난 후에 생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같은...


삶의 모든 순간이 다 아름다울 순 없는 것처럼, 지나고 보면 고난의 시간들이 모두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어느 하루, 어느 한순간의 감정 한 가닥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내가 그렇다. 엄마의 '살아보자'는 말이 힘든 순간마다 나를 붙잡아 줬다. '그래, 그런 날도 지나왔는데... 이런 일쯤이야.' 하며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눈이 오면 항상 그날이 떠오른다. 엄마와 내가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에서 손을 잡고 걷던 풍경이, 학교로 갔는지, 집으로 갔는지 방향은 안 보이는데 눈 속을 걷는 이미지는 아직도 선명하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생된다.


언제나 든든한 아군인 나의 동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참? 그리고 그때 육성회비는 어떻게 정리가 됐지? 아직도 그게 궁금하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국민학교 졸업장이 있는 걸 보면 나는 5학년 반 배정을 받았다는 거겠지. 그날 내가 간절히 바라던 눈귀신이 아닌,  빨간 보자기를 쓰고 나타난 슈퍼맨 같은 엄마가 또 나를 구해준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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