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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어 Jun 03. 2024

여름에, 여름에 대해 말하는 것.

  한여름에 여름에 대해 말하는 것과 청춘의 한복판에서 청춘에 대해 말하는 것. 둘 중에 어느 게 더 싱그러울까.


  드디어 6월이다. 6월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6월은 이제 진짜 여름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상한 강박 같은 게 있는데 12개월을 딱 4계절로 나눠서 12/1/2월은 겨울, 3/4/5월은 봄, 6/7/8월은 여름. 9/10/11월은 가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5월이 아무리 더워도 아직 여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름의 시작과 동시에 그동안 기다려왔던 많은 일들을 시작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선풍기에 머리 말리기. 여름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다. 나는 머리 말리는 걸 굉장히 귀찮아한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마를 머리를 왜 굳이 뜨거운 바람을 쐬어 억지로 말려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덕분에 23년 인생 중에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 지는 2년도 채 안 되었다. 하지만 선풍기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상해 보시라. 거실이나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선풍기를 켠다. 바람의 세기도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오래 앉아서 느긋하게 머리를 말리고 싶다면 미풍, 너무 더워서 강력한 바람이 필요하다면 약풍. 강풍은 머리를 말리는 걸 넘어 머리통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기에 잘 틀지 않는다. 그렇게 앉아서 유튜브를 켠다. 브이로그도 좋고, 예능도 좋고, 드라마도 좋다. 무엇이든 평소에 즐겨 보는 콘텐츠를 틀어 놓고서 시간을 보낸다. 두 손이 자유로우니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이나 수박을 들고 먹을 수도 있다. 바깥은 뜨겁고 내 몸은 조금 축축하고 머리로는 바람이 부는. 너무나도 완벽한 여름이지 않은가.


  6월이니 'And July'가 빠질 수 없다. 딱히 들을 노래도 듣고 싶은 노래도 없다면 일단 And July를 튼다. 노래 속에서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두 남녀가 고백할까 말까 이리저리 재고 있다. 나는 노래를 듣는 동안만큼은 딘에게 고백받는 헤이즈가 되어 거리를 활보한다. 그 걸음은 아주 새침하고 당당하다. 왜냐하면 난, 헤이즈니까. 헤이즈가 되어 3분 46초를 보내다 보면 대망의 마지막 가사가 등장한다.


"난 남자일 때가 더 괜찮아"

  처음 들었을 때도 오글거렸고 지금 들어도 오글거리지만 딘이 저렇게 고백한다면 수긍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생각하다가 며칠 전 수혁이와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넌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 알아야 해...!"

"그럼 넌 내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알아야 해!"

.

.

.

"흠 그래. 우리 서로를 더 알아가도록 하자."


  놀랍게도 딘과 헤이즈가 나눈 대화가 아니라 나와 수혁이가 나눈 대화이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뻔뻔하게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2년 동안 이어진 서로를 향한 관심과 애정일 것이다. 우리는 2년을 넘게 만났지만 아직도 서로에 대해 다 모른다. 이제 다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우리의 연애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몇 번의 싸움과 몇 번의 눈물이 지나간 후에야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하나씩 알게 된다. 서로를 더 매력적이고 괜찮은 사람으로 만든 장본인이 자기들인 줄도 모르고 우리의 코는 높을 대로 높아져 있다. 높아진 코는 가끔 너를 보지 못하고 나만 보게 만든다. 내가 얼마나 빛나는지,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젊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너도 그럴 텐데. 너도 나만큼이나 빛나고 좋은 사람이고 젊고 아름다울 텐데. 그걸 모르기에 우리가 청춘인 걸까. 청춘이라는 안개는 중요한 걸 흐리게 만들기도 하니까. 청춘은 여름처럼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서 지금이 청춘이야! 라고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느낄 뿐이다. 여름이 다가오는 걸 느낄 때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설레하는 모습에서, 조금 얌전한 옷과 야한 옷 중에 야한 옷을 고르는 선택에서, 이 밤이 지나가는 게 아깝다고 느껴지는 순간에서.


  여름도 노래도 청춘도 너무 싱그러워서 어지럽다. 다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날 우리의 청춘은 끝나는 게 아닐까.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어지럽고도 신나는 나의 친구들과 함께 이 시를 읽고 싶다.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런적 있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누군가 귤 하나를 막 깠을 때

이내 사방이 가득 채워지고 마는


누군가에게라도 벅찬 아침은 있을 것입니다

열자마자 쏟아져서 마치 바닥에 부어놓은 것처럼

마음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면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집니다


넘어져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돌아볼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리로 쪼아서 거침없이 하늘에 내던진 새가

어쩌면 전생의 자신이었습니다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청춘의 기습>,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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