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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어 May 27. 2024

좋은 시절

   언젠가의 여름방학이 끝나갈 때쯤 내 옆에 누워서 눈물 흘리던 유를 기억한다. 할머니 집 입구 방에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우린 잠들 예정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유튜브를, 유는 인스타 릴스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유를 보자 유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내려오는 것이다.


"뭐야 너 울어??? 왜??? 남자 친구랑 싸웠어??"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자기 우는 유가 걱정스러워 나는 유튜브를 끄고 고개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유를 향해 돌려 누웠다. 유는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는 대답 없이 울기만 한다. 유가 펑펑 우는 걸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나 갑자기, 소리 없이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나는 꽤 당황한 상태였다. 사실 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울었어도 당황했겠지만 평소에 씩씩하다고 생각한 유였기에 그 눈물은 너무 뜻밖이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도 이런 장면의 밤을 맞이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남자 친구랑 싸운 건지, 알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것저것 캐물어도 유는 특별한 답이 없다.


"몰라…. 그냥 갑자기 눈물이 나. 이렇게 방학이 끝나버리는 게 허무한가?"


  나도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곤 한다며 위로라기에도 애매하고 공감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말을 건네고는 민망할 유를 위해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유는 남자 친구에게게 전화를 걸고는 피식 웃었다가 다시 울었다가 한다. 오랜만에 할머니 집에 들러 그 입구 방에 혼자 누워있으니 자연스레 유가 생각이 나는 것이다. 유가 내 옆에서 울었던 사건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다.


  유는 나의 엄마의 오빠의 딸. 그러니까 외사촌이다. 공교롭게도 동갑이라 내가 핸드폰이 생긴 중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주 오랜 우정의 역사를 자랑한다. 우린 서로의 모든 걸 공유하며 자라왔다. 중학생 시절에는 친구 문제, 고등학교 시절에는 입시 문제, 대학에 오고 나서는 서로가 만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늦잠을 자서 수업에 지각했다는 아주 작은 이야기부터 남자 친구와 곧 헤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서로에게 서슴없이 들려준다.


  유의 집 근처에 할머니가 살기 시작한 이후로할머니 집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나와 유가 스무 살이던 시절, 내가 남자 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듣자마자 향한 곳은 할머니 집이었다. 당연히 그 옆에는 유가 있었다. 이후로도 우리는 종종 할머니 집에서 만났다. 어떤 좋은 곳을 갔다고 해도 결국 마지막 종착지는 할머니 집이었다. 할머니가 주무시는 동안 우리는 씻고 선풍기 바람에 머리를 말리며 또 다른 하루를 시작했다. 할머니 집에서 여기에 다 담을 수 없는 우리의 수많은 역사가 이루어졌다. 해가 갈수록 변화무쌍해지는 우리는 해가 아무리 지나도 여전한 할머니 집에서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이제 예전만큼 서로의 모든 것을 나누지 않는다. 나도 유도 변한다. 하지만 여전히 할머니 집에서 만난다. 그 입구 방에서 잠이 든다.


  이른 새벽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할머니와 수다를 떤다. 양말을 신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는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헷갈리는 말들을 늘어놓으신다.


"너희가 많아 봤자 스물하나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벌써 스물셋이라고? 하이고~ 시간 참 빠르다~ 이제 너희도 좋은 시절 다 갔네!"

 

  할머니는 저 말을 내뱉자마자 바로 말을 바꾸신다.


"아이다!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 보면 좋은 시절 또 온다~ 할머니는 늙고~ 너희는 크고~ 아이지. 늙는 게 아니라 익는 거지. 사람이 나이가 들어야 해. 영원히 젊은 건 좋은 게 아니야~"


  영원히 젊고 싶은 나는 아직 할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겁고도 혼란스러운 청춘이 빠르게 지나가는게 아쉽게만 느껴지기에 지금이 제일 좋은 시절 같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을 믿고 싶다. 한 시절이 지나가도 좋은 시절은 또 온다는. 꼭 청춘만 좋은 시절은 아니라는 말을.


  그때의 유가 왜 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르고 유의 부모님도 모르고 유의 남자 친구도 모른다. 어쩌면 유 자신도 그 눈물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분명한 건 유가 눈물 흘리고 그 옆에 내가 누워있고 아늑한 듯 더웠던 그 시절은 좋은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는 유를 생각하며 잠이 드는 지금도. 좋은 시절에는 갑자기 울어버리는 일도 갑자기 웃어버리는 일도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좋은 시절은 다 간 듯하다가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좋은 시절이었지 좋은 시절이었지를 되뇌이며 또 다른 좋은 시절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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