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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스막골 Oct 11. 2024

아빠와 한글

어느 날 아빠가 하늘이를 불렀어. 그날은 하늘이 아빠가 낮에 집에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어. 아빠는 책을 펼쳐놓고 글자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불렀어. "기역 니은 디귿......" 하늘이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따라 읽었어. "기역 니은 디귿......" 그걸 몇 차례 반복하고 하늘이 보고 혼자 읽어 보라고 했어. 더듬더듬 읽다가 틀리면 아빠가 다시 읽어주고 따라 하고 다시 혼자 읽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어요.


다음 날은 "가 나 다 라 마 바 사......"를 했어. 이건 어제보단 조금 쉬었어. 금방 끝나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어.


다음 날은 "가 갸 거 겨 고 교....." 였어. 첫날이랑 똑같이 아빠가 읽으면 하늘이가 따라 하고 혼자 해보라고 하면 해보다가 틀리면 다시 아빠가 읽어주길 반복했어. 그렇게 몇 번을 하고 끝이 났어.


다음 날은 "나 냐 너 녀 노 뇨......."를 했어. 어제랑 똑같이 아빠가 읽으면 하늘이가 따라 하고 혼자 해보라고 하면 해보다가 틀리면 다시 아빠가 읽어주길 반복했어. 그렇게 몇 번을 하고 끝이 났어. 하늘이는 이 시간이 좋았어.


아빠가 다시 일을 하러 멀리 가셨어. 하늘이는 혼자 앉아서 아빠랑 보던 책을 펼쳐봤어. 아직 이 책을 다 보지 못했는데 아빠가 언제 시간이 날지 알 수가 없었어. 그래서 하늘이는 혼자 더듬더듬 진도를 나가기 시작했어. '가갸거겨' '나냐너녀' '다댜더뎌'가 생긴 것도 비슷하고 소리도 비슷한 거 같았어. '가나다라'를 외웠으니까 '가갸거겨'처럼 '마'도 따라 할 수 있을 거 같았어. '가'랑 '마'랑 한참을 소리 내며 입술이랑 목구멍에서 나는 느낌에 집중했어. 그러곤 드디어 '마'에서 하듯이 입술을 붙였다가 '아'에서 입을 벌리고 소리를 밀어냈어. 'ㅁ 아'. 이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대충 비슷한 것도 같아서 다음은 '야'를 붙였어. 'ㅁ 야'. 그러다 헷갈리면 '가갸거겨' '나냐너녀'를 다시 하면서 입이랑 목구멍이 벌어지는 걸 다시 익혔어. 하늘이는 하루종일 그렇게 책을 가지고 혼자 소리를 내고 있었어.


몇날 며칠이 지났는지 몰라. 하여튼 한참을 지나 하늘이 아빠가 돌아왔어. 하늘이는 책을 들고 아빠한테 가지고 갔어. 그리고 자랑스럽게 '가갸거겨'부터 '하햐허혀'를 했어. 아빠는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그대로 끝이 났어. 아마 자기가 다 가르치고 갔다고 생각한 거 같아. 하늘이는 아빠가 없는 동안 연습한 거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왠지 부끄러워서 하지 않았어. 말하지 않아도 아빠가 알고 칭찬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와 함께 한글을 배우는 시간은 이대로 끝나버리고 말았어. 하늘이는 자기가 잘못한 걸까 고민이 됐지만 그것도 역시 물어보지 않았어. 그래서 하늘이가 한글을 어떻게 떼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됐어. 그 후로 하늘이는 항상 책을 손에 들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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