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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Feb 09. 2024

명절만 되면, 우리는 왜 무례한 질문을 하는가?

착각과 의무감


#1. 왜 기어코 무례한 질문을 하는가?


 결혼 질문 4,000원. 취업 질문 5,000원. 아이는 질문 4,000원. 성공해서 고생한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잔소리 5,000원. 자가 마련 잔소리 10,000원.


 반농담, 그보다는 반 진심으로 잔소리 메뉴판까지 나오는 세상이다. 한 푼 보태주지도 않을 거면서 무례한 질문과 훈계를 굳이 하고 싶다면, 돈을 내고 하라는 의미다. 이런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공감과 웃음을 잦아 내는 걸 보면, 그만큼 이런 질문과 간섭이 ‘무례함’의 범위에 들어가는 걸 사회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여전히 많은 집의 명절에서 일어나는 풍경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이중성만큼, 그런 무례한 언어를 내뱉는 이들도 나뉘는 듯하다.

 ‘어른이 걱정돼서 말 한마디 하는 걸 가지고’라는 이들도 많지만, ‘요즘은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데…’라고 꾹꾹 참다가 시간이 지나면 끝내 슬쩍 꺼내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너도 다 생각이 있겠지만, 그래도 슬슬 취업해서 부모님 걱정 덜어드려야지.", "요즘 결혼을 늦게 하긴 하지. 그래도 어서 좋은 사람 만나야 할 텐데. 물론 꼭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전자의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후자의 많은 이들은 대체 왜 ‘요즘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기어코 꺼내고 마는 것일까.


 단순히 ‘꼰대’이기 때문일까. ‘요즘 것들은 쯧쯧’이라며 젊은이들을 무시하기 때문일까. 그렇다기에는 너무나 한국 사회 전반의, 대부분 가정에서 나타나는 명절의 불편한 풍경이다. 또 그런 말을 꺼내는 이들도 평소에는 사회생활을 무척 원만하게 잘 해내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 단순히 꼰대라는 한 개인의 성향이 아닌, 가족관계에 대한 사회적 시각에서 그 이유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명절만 되면, 우리는 왜 그토록 무례한 질문과 훈계를 꺼내고 마는가.

     

- 첫째로, 친척. 그러니까 가족이란 기본값이 친밀한 관계라는 착각이며

- 둘째로는 정상 가족이라면 친밀한 모습이어야만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2. ‘가족이니까’ 기본값이 친밀하다는 착각

   

 어느 정도 사회화를 거친 사람이라면 상대와 나의 친밀도에 따라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구별할 줄 안다.


 같은 반이지만 친하지는 않은 친구에게 대뜸 “너는 성적이 어떻게 돼? 나중에 무슨 대학에 가서 어디에 취업할 거야? 어? 근데 그건 요즘 취업 안된다던데 다시 생각해 봐. 다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라고 하지 않는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정도의 옆 부서 김 대리에게 “김 대리 자가는 마련했어? 아니 그 나이 되도록 아직도 자기 명의의 집 한 채도 없다니 걱정이 많겠네. 돈은 잘 모으고 있지?”라고 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친척들이 정말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는 김 대리보다 편하고 친밀하게 느껴지는가. 친하지 않은 같은 반 친구보다 더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자주 교류하고 친하게 지내는 친척 관계도 있지만, 말 그대로 1년에 불편한 하루 이틀을 함께 보내는 관계도 많다. 오히려 김 대리나 같은 반 친구보다 서로를 훨씬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친밀도에 따른 거리감 기준을 벗어나는 말을 꺼내는 것일까. 명절만 되면 사회적 능력이 하루 만에 후퇴할 리도 없을 텐데 말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친밀도의 설정값이 높다는 착각 때문이 아닐까.

 보통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는 0에서 시작하는 친밀함의 값이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10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2나 3 정도에서는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척도 인간관계이다. 얼굴과 이름만 알다가 일 년 만에 만났는데 갑자기 10에서 시작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뿌리 깊은 K-가족문화 그리고, 명절만 되면 하하 호호 웃으며 함께 윷을 던지고 함께 노는 가족들의 모습이 나오는 각종 매체는 ‘그래도 가족은’ 이 정도 친밀감과 가까움은 당연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노력하지 않아도 가족이기에 이 정도 거리감으로 다가가도 괜찮다고, 평소의 사회적 기준값과 다른 기준을 적용해 무례한 거리감으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3. ‘정상 가족은 친밀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의무감


 앞서 가족관계의 기본값이 친밀함 10에서 시작된다는 착각과 이어진다. 그래서 ‘정상 가족’이라면 당연히 10의 친밀한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상상해 보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있는데, 5초 이상 침묵이 흐른다. 누군가는 어색하게 화장실에 가고, 몇몇은 어색하게 핸드폰으로 오지도 않은 메시지를 괜히 클릭한다. 누가 봐도 어색하다! 가족은 10 이상 친밀해야 정상인데, 이건 마이너스 친밀함이다! ‘우리’ 가족이 ‘정상’ 가족이 아니라는 말인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은 큰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정상 가족이 되려면 누군가는 끝없이 소리를 내야 한다. 일명 오디오를 채워야 한다. 특히 집안의 ‘어른’일수록 그런 의무감을 느낄 확률이 높을 것이다.


 방송에서 오디오가 텅 비어버리지 않게 출연자들은 끝없이 이야기한다. 말을 안 하면 웃기라도 하고, 찰나의 빈 부분은 자막과 효과음이 충실히 채운다. 그래야 흐름이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특정 주제와 대본을 가지고 방송하는 방송인이 아니다. 학업과 취업, 회사 생활에 찌들어 있는 이들이 갑자기 가족이 모였다고 뛰어난 유머 능력이 생길 리도 없다. 하물며 보조 역할을 해주는 자막과 효과음도 없다! 오로지 ‘말’로 소리를 밀도감 있게 채워야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년에 한두 번 보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같은 반 친구에게는 앞 수업의 선생님을 욕할 수도 있고, 김 대리와는 회사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너무 오랜만에 보는 가족은 대화의 공통분모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결국 케케묵은 말을 꺼내고 마는 것이다.

 “요즘은 잘 지내?”에서 두루뭉술하게 시작했다가 끝내 “결혼은 생각 있고?”로 치닫는다.

 “너희 엄마가 어릴 때 이랬다.”라며 웃으며 부모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그렇게 너희 부모님이 고생했으니, 네가 성공해서 효도해야지”의 결말을 맞이한다.




#4. 어색함 대신 선택한 무례함


 정상 가족은 당연히 친밀한 관계이며, 그렇기에 친밀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은 어색함보다는 무례함을 택하게 만든다.


 사실 그런 질문과 잔소리를 꺼내는 일은 하는 사람도 큰 생각을 하고 꺼내는 경우는 드물다. 온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상대의 미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순간의 침묵에 소리를 집어넣기 위해 ‘그냥 꺼낸 아무 말’에 가깝다.


 그러나 별 의도가 없다고 해서 상대의 난처함이나 불쾌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가족 간의 유대감이나 친밀함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말도 아니다. 착각했다면, 사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인정하면 되고, 친해지고 싶다면 ‘정상’ 방법으로 다가가는 노력을 하면 된다.

 다음 글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눠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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