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내기, 거꾸로 살기, 마구 뒤섞기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을 때, 꼭 이전 시간을 모두 지워야 할 필요는 없다. 노트 한 권에 꼭 한 이야기만을 쓸 필요가 없듯이.
몇 페이지 뜯어내도, 뒤에서부터 써 내려가도, 얼마든지 중간중간 다른 이야기를 새롭게 써도 한 권의 노트는 가득 채워져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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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 학창 시절, 공부 시작 전에 하던 청소는 왜 그리 개운했는지 모르겠다.
평소 되는 대로 살다가도 이상하게 공부 전 청소 시간만 되면 무척 칼 같은 사람이 되곤 했다. 작은 먼지도, 비뚜름하게 놓인 물건들도, 책장에서 살짝 삐져나온 책도 거슬렸다.
저녁 8시에 공부를 하려고 앉았다가 청소를 시작하면 9시 47분이 되었다. 마치 살짝 삐져나온 책만큼 거슬리는 시간이다. 차라리 10시 정각에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핸드폰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0시 17분이다. 30분에 딱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11시, 11시 30분, 12시 자정까지 공부 시간은 저 홀로 밤을 건너 술술 날아가곤 했다.
그 버릇은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변하질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에 자격증 공부라도 시작하려면 매번 새 책과 노트를 샀다. 새것을 사야지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을 한다고 다 끝을 봤다면, 이렇게 어중간한 인간이 됐을 리가. 시작한 노트는 애매하게 사용하고는 흐지부지되어 쌓여갔다.
- 영어단어 외우겠다며 3장만 쓴 수첩
- 긍정적으로 살아보자고 1장만 쓴 감사 노트
- 10장 필기하다 포기한 자격증 노트
- 문화 기록인이 되겠다며 7장만 쓴 영화 리뷰 노트
-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와, 나 시작은 정말 이것저것 많이도 했다. 그 많은 것 중 제대로 마무리 지은 게 하나도 없는 게 더 놀라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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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던 걸 안 쓰고, 시작할 때마다 새로 노트를 산 것도 꼭 정각 시간을 맞추던 때와 똑같아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과거의 내가 이해는 갔다. 사실 이걸 펴는 지금도 '그냥 버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올라왔으니까.
전에 쓰던 노트를 보는 건, 뭐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실패의 시간의 흔적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싹 다 지우고 잊고 싶달까. 그런 적 없는 척, 개운하고 가뿐하게 새로운 인간인 것처럼 태어나고 싶달까.
하지만 역시, 버리지 못했다. 어중간하고 애매한 나란 인간은 남은 페이지들을 보며 '너무 쓸 만한데...'를 읊조린다.
그래, 물건이든 내 과거의 선택이든 책임지기로 했잖아.
나는 마음을 다잡은 후, 다섯 장 이내로 쓴 노트들은 쓴 부분을 뜯어내 버렸다. 생각해 보니 잊고 싶은 걸 꼭 가지고 가야 할 필요는 없다. 뜯고 보니 표지에 조금 손때가 탔을 뿐, 그것들은 멀쩡했다. 내가 다시 사용할 페이지가 첫 장이 되었다. 성실하지 못한 영어 공부의 실패 흔적이 사라졌다.
10장 정도 이상 썼거나, 페이지를 뜯어내면 너무 너덜너덜해질 것 같은 노트는 뒷장부터 쓰기 시작했다. 꼭 노트를 앞에서부터 쓸 필요도 없다. 종이를 오른쪽으로 넘기냐, 왼쪽으로 넘기냐의 차이일 뿐이다. 외국 서적들은 왼쪽으로 넘기는 책들도 있는데, 이국적인 기분도 느끼고 좋다.
이 글을 쓰기 위한 작업 노트도 이런 식으로 뒤 페이지부터 시작한 노트에 적고 있다. 쓰던 페이지를 다 쓴다. 왼쪽으로 넘어간다. 반듯하게 글씨를 써야 한다는 피곤함도, 잘 써야 한다는 느끼함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휘갈겨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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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뒤에서 앞으로 넘기다 보면, 앞의 몇 페이지만 쓰고 멈춘 과거와 만나는 순간이 온다. 노트 한 권을 다 쓴 순간. 은근한 쾌감이 찾아온다.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며 한 권의 노트를 마무리 짓는다.
취업준비를 위해 신문 스크랩한 앞 페이지와, 퇴사 후 아무거나 휘갈기고 있는 현재의 페이지가 만난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이 한 치 앞도 모르던 바보야. 너 제 발로 뛰쳐나오게 된다? 과거의 나를 만나면, 취업을 못 해 이불속에서 끙끙거리던 나를 흠씬 놀려주고 싶다.
과거의 마무리 짓지 못한 흔적을 마주하는 게 꼭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예전의 내가 쓰다 만 노트를 보며 그때의 시간을 만난다. 마치 과거 일기장을 보듯이 수치심에 이불 발차기를 하고 싶어질 때도 있고, 키득거리며 놀리고 싶을 때도 있고, 그냥 바라봐주고 싶은 페이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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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을 살고 싶을 때, 꼭 이전 시간을 모두 지워야 할 필요는 없다. 노트 한 권에 꼭 한 이야기만을 쓸 필요가 없듯이.
몇 페이지 뜯어내도, 뒤에서부터 써 내려가도, 얼마든지 중간중간 다른 이야기를 새롭게 써도 한 권의 노트는 가득 채워져 끝이 난다.
다 쓰고 난 노트를 버리기 전에, 차르륵 넘기며 내가 쓴 것들을 본다. 어쨌든 뭔가 했다는 사실이 물증으로 남아 종이 위에 새겨져 있다. 질서 없이 휘갈겨 쓴 내용은 한 글자 한 글자 살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멀리서 넘기면 마치 엄청난 천재 작가의 습작 노트 같다. 물론 악필이라 내가 내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는 수준도 있지만, 뭐, 오히려 그래서 천만다행이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종이들을 다 채웠다는 게, 그리고 내 기분이 좋다는 거지.
계속 생각하지만, 역시 사용라이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좋은 '기분 내기'이다.
종이류 버리는 곳에 분리수거하여 버린다. 다 쓴 노트가 책장에서 빠져나간다.
각별하면서도 시원한 이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