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척'하는 성실함
그날이 그날이고,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과 똑같을 게 뻔한 시기가 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날이 그런 식이. 굳이 일기에 남길만한 것이 하나도 없게 느껴지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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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동안 세 곳의 직장에 다녔다. 지금은 네 번째 직장에 다니는 중이다.
이토록 툭하면 곧잘 그만두는 성정의 내가 유일하게 꾸준히 한 게 바로 '일기 쓰기'다. 기억나는 것만 해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썼으니, 어언 20년 넘게 쓴 셈이다.
그러나 이 성실함에는 함정이 있다.
20여 년간 20여 권의 일기장을 썼다는 게 꼭 매일 일기를 썼다는 건 아니라는 점. 며칠에 한 번 겨우 쓸 때도 있었다는 점. 한 달에 두어 번 쓸 때도, 심지어 1, 2월 쓰다 중간은 텅 비어버린 채로 12월을 쓰고 마무리 지은 일기장도 있다는 점.
그래도 나는 그해에 일기를 썼다고 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어쨌든 조금이라도 썼으면 쓴 걸로 '치는' 정신 승리가 아닐까, 하고 정신 승리를 하면서. 부작용이라면 그 성실함을 아무도 모르고 나 혼자 안다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불성실한 꾸준함을 이어오는 나 같은 작심삼일 형 인간은 점점 더 꼼수를 부리게 되었다. 어쨌든 일기장의 중간이 텅 비어있는 건, 나중에 봤을 때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일기를 쓰고 싶지도 않아 지게 된다.
그렇게 불성실한 인간의 꾸준한 일기 쓰기의 방법을 터득해 가기 시작했다.
#. 정해지지 않은 다이어리를 사용하기
1.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다이어리
: 일기는 '일'을 기록하는 것이지, 그게 꼭 '매일'일 필요는 없다.
나같이 게으른 퐁당퐁당 형 일기 쓰기의 성향에는 날짜가 인쇄되지 않은, 요일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빈칸의 다이어리를 고르는 걸 추천한다. 일자를 내가 쓰는 다이어리는 한 달 후에 써도 바로 이어서 쓸 수 있기 때문에, 언뜻 보면 나의 불성실함이 티 나지 않는다!
쓸 날을 정하는 건 내 마음이다. 의무감에 일기를 쓸 필요는 없다.
2. 줄과 칸이 정해지지 않은 다이어리
: 쓰고 싶은 만큼만, 내가 쓰고 싶은 형식으로
줄이 나뉘어 있으면 행간이 정해져 있고, 글씨를 반듯한 선을 따라 써야 할 것만 같다. 그 선을 벗어나는 순간 지저분해 보인다. 칸이 정해져 있는 다이어리는 그날 적어야 할 분량의 한계가 정해진 느낌이다. 최소한 반절은 채워야 빈약해 보이지 않고, 칸을 넘어가면 다음 날의 공간을 침범해 버린다.
그래서 나는 주로 모눈이나 도트 (점)으로 된 속지의 다이어리를 사용한다.
그렇게 날짜도, 형식도 정해지지 않은 다이어리를 쓰면 부담감이 줄어들고, 불성실이 들키지도 않는다.
한 페이지를 꽉 채우고 넘어가도 좋고, 한 줄만 써도 좋다. 선으로 나뉜 게 아니니 낙서를 끄적이며 그림을 그려도 좋고, 글씨를 한 줄도 적고 싶지 않을 때는 그냥 성의 없이 보고 온 영화 티켓을 붙여도 좋다.
오히려 그렇게 대충 써야 멋스럽다.
다 쓰고 나서 넘기면, 휘갈겨 쓴 글씨나 덕지덕지 붙어있는 영화표나 사진, 비딱 선들이 모여 오히려 더욱 다이어리를 멋스럽게 만들어준다. 마치 나의 하루하루가 노트 (다이어리) 안에 담겨 제법 근사한 한 해를 보내고, 애쓴 만큼 바랜 빛의 향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다이어리에 쓸 말이 없다면
그날이 그날이고,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과 똑같을 게 뻔한 시기가 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날이 그런 식이. 굳이 일기에 남길만한 것이 하나도 없게 느껴지는 날들.
그럴 땐 굳이 하나의 '글'을 적을 필요가 없다. 꼭 내 생각을 적을 필요도 없다. 앞서 말했듯, 꼭 매일 쓸 필요도 없다. 아래는 그런 시기 말 그대로 '쓰기'에만 목적을 둔 내가 적은 것들이다.
신기한 건, 나중에 한 해의 다이어리를 돌아보면, 이런 아무것도 아닌 내용이 모여 무엇이라도 되어있다는 것이다.
- [3줄 글쓰기] 날씨 1줄, 있었던 일 1줄, 내 감정이나 느낌 1줄
* 이를 활용하여 5줄 글쓰기, 6줄 글쓰기 등으로 쓸 수도 있다.
- [사실만 적은 리스트] 오늘 먹은 것, 지출 명, 해야 할 일과 한 일, 오늘 만난 사람, 읽은 책, 본 영화/드라마/웹툰/웹소설/유튜브 (옆에 출판사나 방송사, 감독 등의 이름만 적어놔도 제법 있어 보인다.), 예적금 정리, 버킷리스트 등등
* 꼭 내 생각이나 감정을 적을 필요는 없다.
- [오늘의 오감] 오늘의 온도, 습도, 들었던 소리, 길가에서 만난 고양이의 색깔 등등
* 사건이 없다면 그냥 그날 나의 감각만으로 칸을 채워도 좋다.
- [지식/사회형] 새롭게 알게 된 생활 꿀팁이나 지식과 정보, 오늘의 헤드라인 뉴스, 경제지표 등
* 꼭 내게 직접적으로 일어난 일만 적을 필요는 없다. 내가 사는 사회에서 일어난 일도 나의 일부이다.
- [필사형] 출퇴근길에 SNS에서 본 좋은 문장이나 글귀, 재미있는 광고 문구
* 꼭 책이나 멋진 철학 문구를 적을 필요는 없다.
- [단어형]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아무 단어들 무작위로 나열해 쓰기
* 꼭 문장으로 적어야 기록인 건 아니다. 일관성이나 논리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 [낙서와 스티커] 귀엽거나 오늘의 내 상태와 비슷한 스티커, 졸라맨으로 내 상태 낙서하기
* 단어 하나 적을 힘도 없는 날, 그날의 내 상태를 표현해 줄 스티커 하나를 붙이고 끝내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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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일도 없이 지난한 하루라고만 느껴진 날, 다이어리에 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적거나 붙이면 의외로 그날만의 무언가 있었다는 걸 새롭게 깨닫곤 했다.
올 한 해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느껴지는 연말,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꼼수로 적은 다이어리를 쭉 펼쳐본다. '의외로 나 참 열심히 살았구나, 이게 올해 있던 일이었어?' 하며 놀라곤 한다.
불성실한 작심삼일형 일기가 그해의 내 연말을 '너 올해 참 애썼다'라고 부드럽게 감싸줄 것이다.